소설리스트

193화. (193/250)

193화.

의회장 내부에서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후보들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던 양 진영이 일순 조용해졌다.

스윽.

칼스테인 공작의 눈이 중앙 가장 상석에 앉은 소년을 향했다.

이제 14살쯤 됐을까?

아직 젖살조차 덜 빠진 아이가 중년과 노인들 사이에 껴 있는 모습이 홀로 튀어나온 못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칼스테인 공작을 포함해 관료 대신 모두 그 소년을 쉬이 대하는 이가 없었다.

의회장에 자리한 모든 대신이 예를 갖추는 저 소년의 정체.

전(前) 아슬란 황제의 손자이자, 아슬란 제국의 현(現) 2대 황제를 맡고 있는 ‘아슬란 에반’이었다.

어린 황제가 대신들을 쭉 훑더니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자릴 놓고 경들의 이견이 좁혀지는 것 같지 않아 결론을 내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제가 직접 와 봤습니다."

"……."

대신들이 입을 꾹 다물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안건을 처리하려 할 때면 대립만 하다 결과는 내지 못하고 끝내기 일쑤였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못한 안건이 지금도 산처럼 쌓여 있다.

‘그 와중에 또 평소처럼 대립만 하다가 얘길 끝낼 것 같아 답답한 나머지 내가 직접 왔다.’ 저 어린 황제의 속뜻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든이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로서 적합하지 않다며 학을 떼던 관료 대신들이 무안한 얼굴로 괜히 헛기침만 하는 사이, 에반의 시선이 자신의 우측에 자리한 칼스테인 공작을 향했다.

"칼스테인 공작님."

"예, 폐하."

"현재 논의 중인 사안이 어디까지 얘기가 되어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 예. 그것이…."

칼스테인 공작이 이제 막 자리한 황제에게 의회장에서 지금까지 오간 쟁점들을 설명했다.

한참을 듣던 황제가 일순 고갤 갸웃거렸다.

"카다비 후작을 후보로요?"

그의 눈이 어느새 카다비 후작을 향해 닿아 있었다.

"크, 크흠. 그, 그것이 말입니다…."

황제의 시선을 받은 카다비 후작이 무안한 얼굴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사이, 눈치 빠른 도리스 남작이 황급히 입을 뗐다.

"폐하, 신이 카다비 후작을 추천하였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카디비 후작 옆에 자리한 도리스 남작을 향했다.

"도리스 남작께서 말입니까?"

"예."

도리스 남작이 먼저 나서 입을 뗀 순간, 카다비 후작의 표정이 조금은 편해진 듯 보였다.

그사이, 황제가 도리스 남작에게 물었다.

"혹 카다비 후작을 추천하신 이유에 대해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역시, 그의 인품 때문 아니겠습니까."

"인품이요?"

황제가 저도 모르게 ‘그게 뭔 말이냐?’와 같은 말투로 되물었다.

황제의 반응에 도리스 남작이 찰나 당혹스러워하다가 서둘러 표정을 고치며 입을 뗐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선 중간에 들어오셨기에 상황을 모르시겠지만, 사실 여기 있는 다수의 관료 대신들이 카다비 후작이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직을 맡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도리스 남작을 향하던 황제의 시선이 찰나 칼스테인 공작을 향해 이동했다.

황제의 눈빛이 ‘정말이냐?’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칼스테인 공작이 무겁게 고갤 끄덕였다.

그 이유가 어떨지언정 다수의 대신들이 카다비 후작을 추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칼스테인 공작을 향했던 황제의 눈에 착잡한 빛이 드리워졌다.

그가 작게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곤, 재차 도리스 남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사이, 도리스 남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 대신들이 입을 모아 카다비 후작을 추천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인품 때문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도리스 남작이 고갤 주억거리며 힘 있게 입을 뗐다.

"예. 폐하, 아시다시피 카다비 후작은 제국 창설 초기부터 황실을 위해 일해 온 몇 안 되는 인사 중 하나입니다. 대마법사 듀크 경 역시 그 이유로 현 듀크 영지의 영주가 되지 않았습니까?"

"……."

그럴 리가.

옆에서 듣던 칼스테인 공작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마법사 듀크가 전 듀란드 영지였던 곳의 영주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가 2년 전, 전시 상황 때 가장 선봉에 서서 위태하던 영지를 지켜 낸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가 솔선수범해 보인 모습과 듀크 경을 향한 그곳 영지민들의 민심이 좋았기에 영주 직을 맡게 된 것이지, 결코 황궁 생활 짬밥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리스 남작은 대마법사 듀크가 마치 오랜 관료 생활로 영주를 맡게 된 것이라며, 그를 격하시킨 것이다.

도리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침 듀크 경 못지않은 경험으로 황실을 위해 힘써 오신 카다비 후작께서 계신데, 굳이 이든 남작을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로 둘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듭니다."

도리스 남작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던 칼스테인 공작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던 그때였다.

황제가 연신 고갤 갸웃거리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이상하네요."

"……?"

"제가 할아버지께 들은 내용과는 사뭇 다른데요?"

도리스 남작의 얼굴이 일순 하얗게 질리며 되물었다.

"예? 아슬란 폐하께서요…?"

어린 황제가 고갤 끄덕였다.

"당시 할아버지께선 듀크 경을 영주에 위임시키시곤 그러한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제게 이유를 말씀하시길. 2년 전 제국을 위태롭게 하던 전쟁 때, 선봉에 서서 적들의 공세를 용감히 막아 낸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황실의 경험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한데 도리스 남작께선 듀크 경이 영주를 위임한 것에 대해 단지 관료로 지낸 기간이 길었다는 이유만을 대시는데, 그 말인즉슨 듀크 경이 당시 세우신 공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린 황제가 건넨 질문은 도리스 남작을 당혹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여기서 만약 듀크 후작이 세운 공을 재차 격하시킨다면 그는 그 공을 인정했던 전 아슬란 황제의 결정까지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도리스 남작이 기겁을 하듯 손을 저었다.

"서, 설마! 제가 어찌 듀크 후작님의 공을 인정하지 못하겠습니까. 오해이십니다. 폐하…!"

고갤 숙이며 입을 뗀 도리스 남작의 말에 황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역시 제가 오해한 것이겠지요? 저는 설마 남작께서 저의 할아버지께서 내린 결정을 두고 의심을 품었나 싶었습니다."

도리스 남작이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리다고 얕봤던 황제가 다짜고짜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듯 허를 찔러 오니 심히 당황한 것이었다.

카다비 후작 역시 어린 황제의 처세에 심히 놀란 얼굴을 하다가 속으로 욕을 삼키던 그때였다.

황제의 공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데, 왜 제 결정엔 다들 반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관료 대신들이 일순 벙찐 듯한 표정을 했다.

"이든 남작 역시 위태롭던 제국 지키기 위해 싸워 준 영웅입니다. 제가 이든 남작을 영주로 임명하기 직전, 대신들의 요청에 의회를 허락한 이유는 그가 영주로서 적합한 인물인 것에 대한 제 선택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데…. 제 결정이 아닌 대신들의 결정으로 다른 후보를 내세우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도리스 남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폐하, 저희는 절대 폐하를 상심시키고자 의견을 낸 것이 아닙니다. 오해를 거둬 주십시오…!"

도리스 남작이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고갤 숙이던 그때였다.

그의 눈이 일순 자신의 옆에 있던 카다비 후작을 향했다.

도끼눈을 하며 자신을 향해 따가운 눈길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 도리스 남작이 아차 하고는 황급히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폐하, 신들이 폐하의 의중에 절대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니 오나, 그래도 보다 나은 의견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충언을 드리는 것 역시 신하 된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대신들이 동의하듯 고갤 끄덕이며 ‘맞습니다’를 읊조렸다.

도리스 남작이 그것에 힘을 입어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하니, 카다비 후작을 영주로 추천 드리는 저희의 충언을 부디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 주십시오. 폐하."

맞은편에 있던 칼스테인 공작이 고갤 저었다.

황제가 나름의 허를 찌르고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는가 싶었더니, 충언이니 뭐니 하며 단체로 저리 나온다면 황제 된 입장에서 저들의 말이 개소리란 것을 알아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한데 왜일까?

대신들의 개소리를 듣던 어린 황제의 얼굴에 찰나 묘한 미소가 비친 것은.

황제가 얼굴을 다시 덤덤히 고치며 카다비 후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카다비 후작."

"예, 폐하."

"후작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경을 추대하는 저들의 의견에 대해서 말입니다."

과연 당사자는 저들의 의견에 어찌 반응할까.

보통 이렇게 물어보면 당사자는 한사코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며 겸손을 떨기 마련이다.

하나, 카다비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욕심을 채워야지 직성이 풀리는 이였다.

그는 결코 레온하르트 영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카다비 후작이 황제와 자리한 대신들을 향해 고갤 숙여 보이며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결코 영주 직에 어울리는 이가 아닙니다. 하나, 대신들이 하나같이 저리 입을 모아 주며 저를 추천하니, 혹여 저 스스로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정은 폐하의 의중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영주가 되든, 되지 못하든 저는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쩜, 저리도 능숙하게 곤란한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가 있는지. 질문을 던진 황제도 그리고 이를 본 칼스테인 공작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위기를 벗어났다 생각한 카다비 후작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던 찰나, 황제가 고갤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경의 말 잘 들었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이번엔 칼스테인 공작에게 닿았다.

"공작께선 별다른 말씀 없으십니까."

"……."

카다비와 그를 따르는 대신들의 의견은 철옹성 같았다.

이든이 영주가 되는 것이 희박할 것이라 결론 지은 칼스테인 공작은 고갤 저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황제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한 말을 했다.

"저는 그저 폐하의 선택에 따를 뿐이옵니다."

강압이나 다름없는 대신들의 의견에 흔들리지 마라.

혹은 흔들려도 부담스러워 마라.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당신의 편이다.

칼스테인 공작의 한마디는 저 모든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던 황제가 고갤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지금 같은 상황이 충분히 부담될 법하건만, 칼스테인이란 충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엔 한 점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칼스테인을 향하던 황제의 시선이 재차 의회장에 모인 대신들을 훑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결정했소."

"……!"

듣던 대신들의 눈이 일순 번쩍 뜨였다.

황제의 고민이 생각보다 길어질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결정을 빨리 내린 탓이었다.

대신들의 이목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닿았다.

노련한 정치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어린 황제가 씩 웃었다.

"카다비 후작을 추천하는 대신들의 뜻도 한결같으며, 이든 남작의 공을 높게 사는 나의 뜻 역시 한결 같은 바. 하여! 내일 오늘과 같은 시각에 이든 남작과 카다비 후작 둘을 놓고 대신들의 표결을 모으는 경합을 벌일까 하오."

‘표결과 경합’이란 말에 의회장이 일순 술렁였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다들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칼스테인 공작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마찬가지.

그가 지진이 난 듯한 흔들리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폐, 폐하… 어째서…?’

대신들의 표결을 놓고 벌이는 경합이라면 이미 결론지어진 것이나다름없었다. 한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카다비 후작 역시 처음 듣곤 꽤 당혹스러워 보이다가 잠시 후엔 벌써부터 자신의 승리를 점치듯 여유로운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황제가 재차 입을 뗐다.

"어떻소. 이렇게 하면 나오는 결과에 다들 순응하시겠소?"

카다비를 추천했던 다수의 대신들이 하나같이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진 것과 다름 없는 경합이었다.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도리스 남작이 환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공명정대한 폐하의 의견에 저희가 어찌 반대를 하겠사옵니까!"

대신들이 고갤 끄덕이며 도리스 남작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재차 확인하듯 묻는 황제의 표정을 보던 칼스테인 공작의 눈이 일순 커졌다.

어린 황제의 입가에 지어졌던 찰나의 미소를 포착한 것이다.

황제가 못을 박듯 말을 마쳤다.

"그럼 대신들 모두 동의한 것으로 알고, 예정대로 내일,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자릴 놓고 이든 남작과 카다비의 후작의 경합을 벌이도록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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