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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194/250)

194화.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자릴 놓고 카다비 후작과 이든 남작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표결로 가리자는 황제의 의견이 대신들 다수의 찬성으로 결정되었다.

칼스테인 공작 역시 거기에 찬성한 이 중 한 명이지만, 왜일까?

의회장에서 나온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벅저벅.

집무실로 향하는 어린 황제의 뒤에 찰싹 붙어 걷던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황제를 향하며 그가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저… 폐하…."

칼스테인 공작이 앞서가던 황제를 부르기 무섭게.

"공작님."

황제 역시 대뜸 칼스테인 공작을 불렀다.

입을 떼려던 칼스테인 공작의 말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예, 폐하?"

칼스테인 공작이 화들짝 놀라며 되묻자, 당당히 앞서가던 황제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뒤따라 걷던 칼스테인 공작의 걸음 역시 자연히 멈추어진 상황.

걸음을 멈춘 황제의 얼굴이 칼스테인 공작 쪽을 향하자, 황제를 마주 보던 그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떠졌다.

"폐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조금 전 당당하고, 위엄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황제의 얼굴.

그리고 거기에 대신 자리한 것은 세상 모든 걱정을 짊어진 듯한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급변한 황제의 안색에 칼스테인 공작이 걱정 한가득한 얼굴로 묻던 그때, 황제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 잘한 짓 한 거 맞나요…? 하하…. 하…."

"…예?"

황제의 난데없는 말에 이를 듣던 칼스테인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곧장 되묻던 그때, 그의 시선이 재차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는 것부터 해서 어색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무언가 안절부절못한 듯한 모습까지.

황제의 안색을 살피던 칼스테인 공작이 일순 조금 전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저 잘한 짓 한 거 맞나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기분과 함께, 칼스테인 공작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칼스테인 공작이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확인하듯 물었다.

"폐, 폐하…. 혹시 조금 전 의회장에서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

"폐하의 의중이 아니셨던 겁니까…?"

칼스테인 공작의 물음이 허를 찌른 걸까.

황제가 솔직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

어쩐지 평소 의회장에서 보던 황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했다.

자신이 알던 황제는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 고민을 거듭하며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오늘 의회장에서 황제가 보인 모습은 칼과 같은 결단력을 보이지 않았던가. 해서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건만, 그런데….

설마설마했는데, 그때 그것이 황제의 의중이 아닐 줄이야.

칼스테인 공작이 표정을 굳히며 황제에게 물었다.

"대체 누굽니까. 폐하께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시킨 이가."

"……."

그 자신의 물음에도 황제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칼스테인의 머릿속에 찰나 스치듯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스테인이 곧장 물었다.

"혹 카다비 후작이…. 폐하께 부탁드린 겁니까?"

대신들을 규합한 카다비가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가 되기 위한 좀 더 확실한 명분을 얻기 위해 이 어린 황제까지 포섭하여 이런 짓을 벌인 것이라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계획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고갤 저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아닙…니까?"

어린 황제가 심성이 여려서 칼 같은 사람은 아닐지언정, 자신을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님을 칼스테인 공작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면 대체 누가 폐하께 그런 부탁을 했단 말입니까…?"

칼스테인 공작의 계속되는 물음에 황제가 누가 듣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고갤 푹 숙인 채 입을 뗐다.

"그것이…."

"……."

"이든 남작이 제게 부탁을…."

"…예?"

칼스테인 공작이 지금 자신이 무얼 들은 것이냐는 얼굴을 했다.

황제의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던 그가 곧장 되물었다.

"폐하, 지금…. 이든 남작이라 하셨습니까?"

"……."

황제가 한마디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 모습에 칼스테인 공작은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의회장에서 황제가 보인 모습이 이든 남작이 부탁한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하나, 곧장 의문이 밀려왔다.

황제의 입을 빌려 의회장에서 한 말이 이든의 의중이라면, 굳이 표결까지 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영주가 될 수 있게 밀어붙여 달라 부탁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표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카다비 후작이 원하던 상황일진대, 무슨 생각으로 표결까지 끌고간 것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비단 이것은 칼스테인 공작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아무리 어리다 한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 못 할 바보는 아니었다.

이 어린 황제 역시 ‘표결’이 카다비 후작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던 것이다.

해서 의회장에서 나오기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자신이 잘한 것이 맞느냐고 칼스테인 공작에게 확인하듯 물은 것이었고.

황제도, 그리고 마주한 칼스테인 공작조차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때였다.

"제가 부탁드린 것 맞습니다."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 둘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한 사내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멈춰 선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를 본 칼스테인 공작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든 남작."

이든을 부르는 칼스테인 공작의 목소리는 어째선지 조금은 날이 서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이든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칼스테인 공작이 부르는 소릴 듣던 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대체 어찌 된 연유인지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칼스테인이 고갤 끄덕였다.

"당연한 소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거요."

칼스테인 공작의 노기 섞인 음성을 듣던 이든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 그리고 이든 남작은 곧장 황제의 개인 집무실 쪽으로 자릴 옮겼다.

세 사람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 찻잔이 올려지고, 차를 준비했던 신하가 나가기 무섭게 칼스테인 공작이 곧장 물었다.

"이제 어서 설명 좀 해 보시오. 폐하께서 그대를 영주로 임명하겠다. 밀어붙여도 모자랄 판에 표결로 가자니…!"

칼스테인 공작의 말을 듣던 이든이 곧장 황제가 앉은 쪽으로 고갤 돌리며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서도 칼스테인 공작님과 같은 생각이십니까?"

이든의 물음에 황제 역시 솔직히 답했다.

"저 역시 칼스테인 공작과 생각이 같습니다. 황궁에 카다비 후작을 따르는 세력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대로라면 표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카다비 후작이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던 이든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역시 그렇단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이든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스테인 공작이 혀를 찼다.

"남작께선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시오? 자칫하면 지금까지 남작이 어렵게 키워 온 영지가 엉뚱한 놈에게 넘어갈 판국이란 말이오!"

한 차례 더 노성을 터트리던 칼스테인이 고갤 휘휘 젓고는 이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슨 수로 표결로 가자 한 것인지는 모르나 정말 악수였소. 이젠 정말 카다비가 그 영지를 꿀꺽하는 일만 남았단 말이오."

"……."

칼스테인 공작이 내뱉는 한숨 섞인 말에 이든의 계획에 가담해 주던 황제까지 차마 무어라 변명하지 못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때였다.

이든이 쥐던 찻잔을 놓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

대체 머리는 있는 것인지,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 이든의 대답에 칼스테인 공작의 눈살이 재차 찌푸려지려던 찰나였다.

이든의 표정을 보던 칼스테인 공작의 말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표결을 앞둔 당사자인 이든의 얼굴엔 걱정이란 것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스테인의 예리한 눈이 이든을 자세히 훑었다.

‘생각이 없고 대책이 없는 게 아니야…. 분명 무슨 계책이 있는 듯한 표정이다.’

칼스테인이 넌지시 물었다.

"이든 남작, 혹…. 이 상황을 뒤집어엎을 계책이라도 있는 것이오…?"

칼스테인 공작의 물음에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계책이 있으니 폐하께 그런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

칼스테인 공작이 일순 안도의 숨을 쉬었다.

확실히 계책이 있지 않고서야 스스로 불리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질 이유가 없던 탓이다.

황제가 말없이 이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사이, 황제를 대신해 칼스테인 공작이 물었다.

"무엇이오. 그 계책이란 것이…!"

"그게 말입니다."

이든이 씩 웃으며 입을 뗐다.

그의 계책을 듣던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의 얼굴이 넋이라도 나간 듯 굳어지기 시작했다.

"……."

황제는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한 기세였고.

칼스테인 공작은 연신 입을 뻐끔거리며 숨이라도 넘어갈 듯한 모습을 보였다.

"대, 대체……. 그, 그게 무슨…."

이든을 바라보는 칼스테인 공작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 댔다.

그가 자신이 들은 것이 정말 맞느냐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그, 그러니까 대신들을…. 뇌물로 회유할 생각이란 말이오…?"

"예."

"……."

"……."

뭘까. 절대 당당해선 안 되는데 저 당당한 모습은…. 칼스테인의 얼굴이 재차 망가지듯 구겨지고.

그가 ‘대체 왜?’란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대신들을 뇌물로 회유하겠다니!"

"안 될 것은 뭐 있습니까?"

"……?"

"어차피 카다비 그 양반이 대신들을 규합할 수 있던 것도 그 뇌물 때문이 아닙니까?"

사실 이는 맞는 말이었다.

카다비 후작의 추종 세력이 그토록 많을 수 있던 이유.

그리고 카다비 후작이 눈 깜짝할 새에 대신들과 뜻을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그들의 관계가 ‘뇌물’로 엮인 사이였기 때문이다.

카디비 후작은 유명 길드와 더불어 대신들에게까지 뇌물을 받고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그리고 뇌물로 엮어진 그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세울 때, 대신들에게 인심 쓰듯 받았던 것 이상의 뇌물을 풀어 의회장에서 자신 뜻이 담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현 황궁의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카다비 후작의 무기였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간 받아 온 뇌물로 대신들을 사서 회의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만든다. 카다비 후작의 강점이 그것이지요."

"……."

"하나, 이는 곧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남작의 말은… 카다비의 강점을 역으로 이용하자…?"

"맞습니다. 뇌물로 흔들리는 이들이라면 필시 그보다 더 큰 뇌물에 쉽게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하나, 카다비에게 붙은 대신들을 돌리려면 만만치 않은 자금력이 필요할 터인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봤다.

이든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 제일가는 부자가 제 편이 되었거든요."

"…설마."

세상에 부자는 많다.

하나, 제국 제일이라 불릴 만한 이는 손에 꼽는다.

예상이 가는 바가 있는 걸까.

칼스테인 공작이 혹시나 하는 투로 물었다.

"혹 황금성의 버핏 경을 말하는 거요?"

황금성의 버핏.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 손에 꼽는 부자가 그였다.

그 넘치다 못해 흐르는 자금력은 필시 황궁 곳곳에 닿아 있을 터.

이든이 맞는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입을 뗐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

"황궁의 제일가는 간신과 대륙 제일의 부자 중 대신들이 누구 편에 설지 말입니다."

이든이 재차 놓았던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던 이든이 웃으며 재차 입을 뗐다.

"본래 독은 독으로 잡는 법 아니겠습니까?"

"……."

황제의 집무실이 일순 더없는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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