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250)

195화.

하늘 아래 사방이 고요하기 짝이 없는 깊은 밤.

"후후후…."

황궁 내부 한쪽에 마련되어 숙직을 서는 관료 대신들을 위한 숙소에 난데없이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그 웃음소리는 도중에 멈출 생각이란 없는 듯, 시종일관 끊임없이 이어졌다.

"후후…. 후…. 큭!"

그렇게 한참을 웃던 인형이 일순 웃음을 뚝 멈추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벅저벅.

인형의 걸음이 문득 창가 쪽으로 향했다.

찰랑.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가 쥐고있던 잔에 담긴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창가 가까이 섰을 땐, 잔 속에 담긴 술 표면이 밤하늘 환하게 비추던 달을 머금고 있었다.

창가에 선 인형의 시선이 황궁 너머 어느 먼발치로 향했다.

어디의 무엇을 보는 걸까.

문득 그가 쥐고 있던 잔이 입가로 향했다.

씁쓸한 술과 함께 표면에 비치던 달빛까지 한 모금 넘기던 그의 눈이 일순 밤하늘의 그것처럼 명멸을 반복했다.

‘내일 아침이면 레온하르트 영지가 내 손안에 들어오겠군…!’

기이한 웃음소릴 내던 인형.

그는 다름 아닌 카다비 후작이었다.

카다비 후작은 레온하르트 영주 자리를 놓고 벌이는 내일 있을 표결에 진즉부터 승리를 점치며 설레여 오지 않는 잠에 홀로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일 아침 표를 던질 관료 대신 중 구(九) 할에 가까운 대부분이 자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질 수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혹 저들이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표에 상대방의 이름을 쓰면 어쩌냐고?

그것 역시 걱정 없었다.

카다비 후작은 이번 표결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고자 그간 받아 온 뇌물 중 상당 부분을 풀어 대신들을 결집시켰다.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카다비 후작이 썼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뇌물을 풀어야 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카다비 후작의 예상대로 그의 승리로 끝난다면 ‘표결’로 가자는 황제의 악수(惡數)와 그간 쌓아온 부를 이용해 대신들을 자신의 편으로 묶은 카다비 후작의 금력(金力)이 더해진 결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나도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겠지.’

설레어 잠이 오질 않는다지만, 밤을 꼴딱 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 표결에서 승리한 승리자가 잠을 못 잤다고, 피곤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찰랑.

잔 속에 담긴 술이 한차례 잔의 모양을 따라 어지러이 춤을 추고는 재차 카다비 후작의 입 속을 향했다.

남은 술을 마저 머금은 카다비 후작의 입가에 재차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부푼 설렘을 안고 단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

새벽이 다 되어 갈 정도로 늦은 잠자리에 들었건만, 의회장에 들어서는 카다비 후작의 얼굴은 단잠이라도 잔 듯 안색이 좋아 보였다.

카다비가 먼저 자리해 있던 대신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의회장에서 보니 기분이 좋군요. 도리스 남작도 잘 주무셨…. 음?"

카다비 후작이 자신의 자리 바로 옆에 앉은 도리스 남작의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도리스 남작, 얼굴이 왜 이리 피곤해 보이십니까? 어제 숙직이라도 섰던 겁니까?"

카다비 후작의 말을 듣던 도리스 남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아, 아니요. 숙직은 아니고, 어젯밤 잠을 너무 설친 바람에…."

카다비 후작이 고갤 갸웃거렸다.

도리스 남작의 행동이 어째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 순간, 카다비 후작이 씩 웃어 보이며 도리스 남작의 등을 두들기고 입을 뗐다.

"후후. 알겠군요."

"…예!?"

난데없는 카다비 후작의 말에 도리스 남작이 어째선지 화들짝 놀랐다.

카다비 후작이 말을 이었다.

"남작께서도 저의 승리를 예상하며 부푼 마음에 밤에 홀로 축배를 드신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

듣던 도리스 남작이 한참이나 벙찐 표정을 하다 일순 고갤 거칠게 흔들며 끄덕여 댔다.

"아, 아아…! 예, 마, 맞습니다. 하하하…! 카다비 경께서도 어젯밤 축배를 드셨던 겁니까?"

"예. 잠이 오질 않아 한잔했지요."

"그, 그러셨군요."

그때, 카다비가 재차 씩 웃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

"잠을 얼마 못 잤다곤 하나, 쌩쌩합니다. 오늘 밤 나와 뜻을 함께해 준 대신들과 술 한잔 걸칠 여력은 충분하단 얘깁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

표결 시작도 전부터 자신의 승리를 점친 듯한 카디비 후작의 모습에 도리스 남작은 연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켜 댔다.

그때였다.

스윽.

도리스 남작의 시선이 일순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기로 했던 의회장의 대신들 얼굴을 훑었다.

어째선지 그 자신과 한 점 다를 것 없는 안절부절못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도리스 남작은 깨달았다.

다른 대신들 역시 어젯밤 자신과 같은 제안을 받았음을….

대신들을 훑던 그의 시선이 재차 카리스 후작을 향했다.

그 자신을 포함해 어지러운 심경의 대신들과 달리 카다비 후작은 연신 싱글벙글대고 있었다.

도리스 남작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대체….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도리스 남작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사이, 의회장 안으로 남은 대신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개중엔 이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웃던 카다비 후작의 눈이 일순 들어선 이든을 향했다.

그의 눈이 찰나 의미심장한 빛을 냈다. 동시에 입가에도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윽.

카다비 후작의 맞은편엔 어제와 마찬가지로 칼스테인 공작이 자리해 앉았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엔 이든이 자리해 앉았다.

카다비 후작이 이든을 보더니만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든 남작."

"……?"

건너편에서 부르는 소리에 이든의 고개가 카다비 후작 쪽을 향했다.

카다비 후작이 여전히 밥맛 없는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건넸다.

"어찌,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소이까?"

어차피 너의 패배가 확실시된 표결을 앞두고 잠이 잘 오긴 했느냐는 속뜻이 담긴 짓궂은 안부였다.

하나, 안부를 받은 당사자인 이든의 얼굴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럼요, 두 발 뻗고 아주 잘 잤습니다."

‘훗.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은.’ 이든의 말을 듣던 카다비 후작은 속으로 조소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이번엔 이든이 웃으며 물었다.

"카다비 후작께선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뭐, 일찍 잠들진 못했지만, 나름 괜찮습니다."

미리부터 승리를 점치고, 부푼 마음에 일찍 잠에 들지 못했다고 차마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카다비 후작의 답을 듣던 이든이 곤란하단 표정을 했다.

"이런…. 어제라도 푹 자 두셨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지면 분통 터져 잠이 오겠냐는 이든의 역공이었지만, 카다비는 그것에 열이 받기는커녕 근거 없는 이든의 자신감이 오히려 가소롭기만 했다.

‘멍청한 눈먼 놈, 앞만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제 미래조차 한 치 앞도 보질 못하는구나.’

카다비는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는 입을 뗐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든 남작께선 푹 자 두셨다니 참으로 다행이군요. 하하하."

"하하하!"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한바탕 싸움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싸움이 점차 과열되기 직전, 일순 의회장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를 확인하던 관료 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든 역시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료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의 입장이라면 당연코 황제가 입장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일어선 관료 대신들을 지나쳐 중앙 상석에 자리하자, 대신들이 재차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이든 역시 눈치껏 앉았다.

상석에 앉은 이.

황제가 대신들을 한차례 훑다가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자릴 놓고 카다비 후작과 이든 남작의 표결을 겨루는 날이오. 다들 누굴 선택할지 속으로 정하셨습니까?"

"……."

황제의 물음에도 따로 대답이 들려오진 않았다.

관료 대신들은 그저 복잡미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할 뿐이었다.

황제 역시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황제의 시선이 일순 옆에 자리한 칼스테인 공작을 향했다.

끄덕.

의중을 파악한 칼스테인 공작이 의회장 한 귀퉁이에 서 있던 신하를 향해 눈빛을 보내며 고갤 주억거리자 신하가 눈치 빠르게 무언가를 서둘러 가져오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의회장 중앙을 차지한 거대한 탁자 위에 황실의 문양이 중앙에 새겨진 커다란 함 같은 것이 올려졌다.

함의 상단 중앙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중차대한 사안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마다 사용하는 일종의 투표함이었다.

투표함까지 따로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지금과 같이 표결이 필요한 논쟁이 한두 번 있던 것이 아니란 말이기도 하다.

표결을 주관하는 황제 역시 익숙 한 양 속전속결로 이를 진행했다.

‘이든’을 지지했던 대신들이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투표를 마친 상황에 카다비 후작을 지지하던 관료 대신들의 결정만이 남은 상황.

카다비 후작을 지지하던 세력에 대신들이 한 명씩 나가며 용지에 이름을 써넣기 시작했다.

슥슥.

투표가 진행되는 와중 내내 싱글벙글한 카다비 후작의 표정과 달리, 그를 지지하던 세력의 대신들은 어째선지 낯빛이 썩 좋지를 못했다.

그리고 재차 시간은 흘러.

함을 관리하던 신하가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 모든 관료 대신들의 투표가 끝났사옵니다."

옆에 자리한 칼스테인 공작이 물었다.

"결과를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황제가 고갤 끄덕였다

"시간 끌 것 없지요. 바로 확인하시죠."

"예."

칼스테인 공작이 고갤 끄덕이자, 신하가 함의 뚜껑을 열고, 상자 안의 용지를 탁자 위에 쏟았다.

이윽고 용지를 하나씩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용지에 적힌 이름이 발표될수록 어째선지 카다비 후작의 얼굴이 점차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카다비 후작은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고갤 저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어떻게 결과가 이리 나온단 말인가. 어떻게…!!!’

카다비 후작은 도무지 이번 표결의 결과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자신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건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카다비 후작이 적힌 두 개의 용지를 제외하곤, 모든 용지에 ‘이든 남작’이라 적힌 것이다.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한 것이다.

투표를 중간에 조작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

카다비 후작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옆에 자리한 대신들을 바라봤다.

유일하게 도리스 남작만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뜻을 함께 하기로 했던 남은 대신들은 시선을 피하듯 고갤 돌려 버렸다.

비로소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된 카다비 후작의 눈에 일순 핏발이 섰다.

"…이, 이이…!"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입에선 연신 이를 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머릿속은 이성의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상황.

카다비 후작이 불편한 기색을 도무지 숨기질 못하던 그때였다.

결과를 듣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뗐다.

"그럼 나온 결과대로 이든 남작을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로 임명하도록 하겠소. 경들의 결정이니 번복은 있어선 안 될 것이오."

"……."

황제의 시선이 찰나 카다비 후작을 향했다.

고갤 푹 숙인 채로 시뻘게진 얼굴을 하며 부들부들 떨어 대는 그의 모습에 황제가 고갤 휘휘 젓고는 곧바로 의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칼스테인 공작이 따랐고, 남은 대신들 역시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

우르르 사람이 나가자 의회장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스윽.

카다비 후작의 시선이 아직까지 자리한 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이든을 향했다. 그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한 것이오?"

후작의 물음에 이든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답했다.

"별것 없소. 당신이 평소 하던 것과 같은 짓을 했을 뿐이지."

"…내가 그들에게 먹인 뇌물의 양은 적지 않았소. 그들을 회유할 만한 자금력이 있었소?"

"황금성의 힘을 빌렸소."

"황금성? 황금성의 힘을 빌릴 시간이 있었소?"

"영지에서 엘프의 눈물을 놓고, 수도의 거상들을 초대했을 때, 그때 접촉했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란 것을 예상했던 것이오?"

"상인들의 뒤를 봐주며 뇌물을 밥 먹듯이 받아 온 자들이 황궁 내에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았소. 그런 그들이라면 레온하르트 영지에 욕심을 내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해서 미리 준비했을 뿐이오."

‘이 내가 수 싸움에서 완벽히 졌구나….’ 그때였다.

더는 나눌 얘기가 없다는 듯 이든, 그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카다비 후작."

멈춰 선 이든이 일순 카다비 후작을 불렀다. 카다비 후작의 시선이 이든을 향해 힐끗 움직이고 이든이 마저 말을 이었다.

"황금성 길드를 포함. 내 영지와 연계된 수도의 거상들이 더는 그대에게 상납하지 않기로 약조받았소."

"……."

"수도에서 열 손가락에 꼽는 거상들이 내게 약조한 만큼, 그대에게 돌아가는 뇌물 역시 상당 부분 줄어들 것이오. 어쩌면…. 이젠 아무도 그대에게 상납을 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겠지."

"……."

"남은 정치 생활, 부디 잘 해 보시오."

이든이 의회장 밖으로 나가고, 카다비 후작이 일순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훗. 후후후후… 후후후후…."

웃는 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승리를 예견하던 어제의 웃음과는 참으로 다른, 서글프게까지 들리는 참으로 허탈한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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