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250)

197화.

과거 엘프와 드워프들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수백 년도 훨씬 전에 인간들과 등을 졌다.

엘프와 드워프에 비해 뚜렷한 장점도 없고 나은 것이라곤 ‘번식력(?)’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인간은 그 특유의 번식력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대륙 전반을 지배할 수 있었다.

말인즉슨 인간들과 등을 진다는 것은 세상과 등을 진다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얘기였다.

그래서일까. 인간과 등을 지기 위해 그들은 세상과 등을 졌고. 그 후로 수백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엘프의 눈물이 더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며,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부의 상징이 된 것이.

엘프의 눈물은 그런 사연이 있는 보석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아름다운 보석에 불과할지 몰라도, 사연을 아는 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단지 금전적인 가치를 넘어서.

세상과 등을 진 엘프와 드워프들이 한때나마 인간과 손을 잡고, ‘하나’가 된 시절이 있었다는 상징이 담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다.

평소였다면 허황된 생각이라 여겼을 것이고, 그 말을 꺼낸 이를 그저 이상주의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나, 칼스테인 공작이 바라보는 이, 이든은 단지 이상주의자에 불과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세 종족이 ‘하나’ 될 수 있는 초석을 다져 놓은 상태였다.

"하나가 된다라…."

칼스테인이 되뇌듯 낮게 읊조리고,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물었다.

"제국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보니 이든은 ‘중재자’다.

그리고 레온하르트 영지는 연합의 상징이자 장소가 된 셈이다.

레온하르트의 영지민을 제외하곤, 현재까지는 ‘엘프’와 ‘드워프’만이 함께하고 있는 상황.

이제 진정한 ‘하나’를 앞두고 제국의 결단만이 남은 것이다.

하나, 그 결단은 칼스테인 공작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어린 황제에게로 닿았다.

스윽.

"……."

"……."

칼스테인 공작과 시선이 마주쳤던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내며 여러 안건들을 처리해 왔지만, 지금과 같이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만한 선택은 그의 인생에 당연코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이미 진즉에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다만.

그 선택의 중차대함이 어린 황제를 일순 망설이게 했다.

이든의 물음에도,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에도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가 넌지시 물었다.

"다시 하나가 된다면 데스 스타를 막을 수 있는 겁니까?"

"……."

"…우린, 아직 늦진 않은 겁니까?"

막지 못할 것 같더라도 싸워야만 한다.

늦었다고 생각이 들지라도 대비를 해 놓아야 한다.

제국이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이상,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황제가 묻는 이유는 확인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 낼 것이라고.

아니, 반드시 막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든 역시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당장 데스 스타와 다시 싸운다면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었다.

일전 데스 스타와의 결전 이후, 다시 눈을 뜬 이래로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이다.

오직 놈과의 재대결에서 이기고 말겠다는 각오 하나로 말이다.

이든이 입을 뗐다.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아슬란 제국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전혀 방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대비해 놓는다면 이전과 같은 피해는 결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데스 스타는…."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이든에게 닿았다.

그가 씩 웃어 보였다.

"제가 반드시 저지하겠습니다."

"……."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에 찬 말은 아니었다.

다만, 웃는 이든의 표정에서 황제는 칼스테인 공작에게서 보던 신뢰를 느꼈다.

결심은 이미 진즉에 섰었다.

그 결심이 죽기를 각오했던 각오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이든에게서 대답을 듣고 난 이후엔 희망으로 바뀌었다.

어린 황제 역시 고갤 끄덕이며 힘 있게 답했다.

"…이전처럼 허망하게 백성들을 잃는 경우는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백성들을 지켜 내 보겠습니다."

어린 황제의 가슴속, 작게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꽃이 일순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그 기세가.

이든의 각오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

황궁에서 돌아온 이든은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영지에 관한 문제 때문에 그렇냐고?

아니, 영지의 일은 더는 그가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알아서 굴러가고 있었으니 신경 쓰고 말 것도 없었다.

아니면 일전에 새로 들인 제자 때문에 그렇냐고?

그것 역시 아니였다.

제이콥은 이든조차 이해 불가할 정도로 천재였다.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넘어 백을 할 줄 아는 아이이니, 이 역시 신경 따로 신경이 쓰일 일은 아니었다.

혹은 신사업 때문에?

그것 역시 크리스 지부장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상태.

그는 더는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면 무엇이 그를 더없는 고민에 빠지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이든, 그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몸의 어느 부분이 좋지 않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몸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해도 가장 최고라 단언해도 좋았으니까.

다만.

드래곤 하트의 기운이 그의 것으로 완벽해져 가는 시점에 몸의 변화를 느낀 것이 고민의 시발점이었다.

그럼 그 변화가 대체 무엇이냐.

바로 세상만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발리스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릴리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더 나아가 칼스테인 영지에 있는 이리아 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아마도 호송 중인 로즈 씨는 어느 곳에 있는지 말이다 다만 그런 것들이 세세히 보인다는 표현보단 뭔가 그럴 것이라고 느껴진다는 게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이랄까.

설명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아무튼 참으로 신비하고 편리하기까지 한 능력이었지만, 이든은 어느덧 갑자기 이 능력이 생긴 이유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이든은 문득 레온하르트와 데스 스타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도 그렇고, 데스 스타 역시 그랬다.

그들은 듣지 않아도, 혹은 보지 않아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간에 대륙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라면 손바닥 안처럼 훤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치 ‘천리안’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든에게 생긴 ‘이능력’ 역시 이들이 설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대체 왜 내게…?’

이든은 이능력이 생긴 이유에 대해 드래곤 하트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만약 드래곤 하트 때문이었다면 레온하르트가 드래곤 하트를 자신에게 떼어 줬던 그 순간부터 이능력이 생겨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가 아니고선 난데없이 이능력이 생긴 것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고민하며 생긴 이능력을 가지고 놀던(?) 중이었다.

불현듯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든은 한 가지 가설을 내렸다.

혹 이능력이 생긴 것이 드래곤 하트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과정에 그 자신의 몸 역시 점차 ‘드래곤화’ 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말이다.

레온하르트는 드래곤 하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드래곤이 가진 힘의 원천이자. 전부라고.

비록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이든은 그 엄청난 것이 몸 안에 자리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기운을 점차 그의 것으로 만들고 있던 중이었고.

그 과정이 끝에 가까워지자, 드래곤 하트를 품고 있는 그의 몸 역시 점점 드래곤처럼 변해 가고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었다.

"…혹."

왜일까.

이능력을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써 보던 이든이 일순 누군가를 떠올렸다.

"데스 스타…."

만약 데스 스타가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의 이능력에 데스 스타 역시 느껴져야 마땅했다.

꿀꺽.

이든이 마른침을 삼키고, 데스 스타를 대상으로 이능력을 발현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돌풍처럼 들이닥치며 그의 온몸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돌풍은 마치 끝없는 낭떠러지로 이든의 정신을 강제로 끌고 가는 듯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땅속 깊은 곳을 지나 빛 한점 없는, 흡사 무저갱을 연상시키는 어둠 속에 끌려온 이든은 문득 무언가를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륵.

강렬한 어떤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점점 커져 가며 이든의 정신 속을 꽉 채워 갔다.

느끼는 것을 넘어 눈앞에 두고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던 그 순간이었다.

"왔느냐."

익숙한 음성이 머릿속에 가득 울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바로 데스 스타의 목소리였다.

놈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

이곳을 채운 대부분은 사실상 어둠이었다.

중간, 중간 켜 있는 몇 개의 횃불이 몸부림치다시피 미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사방을 가득 채운 이곳에 어둠을 치워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찰랑.

그때였다. 오직 어둠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곳에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훗."

짧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찰나 들려온 소리였지만, 음성은 필시 여성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 이유 없이 웃음 소릴 낸 이 여인은 어둠 속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찰랑.

재차 물소리가 들려오고, 여인은 몸을 푹 담그고 있던 욕조에서 상반신만 일으켜 욕조 끄트머리에 기대었다.

그리고 감고 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화륵.

마치 푸른 불꽃이 그녀의 눈 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떠졌을 땐, 푸른 안광이 명멸하며 어둠 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횃불만으론 이 안에 가득한 어둠을 밀어내기 턱없이 부족했건만, 단지 그녀가 눈을 뜬 것만으로 조금씩 내부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로 가득 찬 욕조에 기대었던 여인이 입을 뗐다.

"재밌군."

그때였다.

스스스.

웬 인형이 그녀의 안광이 닿지 않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힐끗.

여인의 시선이 인형을 향했다.

그러자 자연히 그녀의 눈에 핀 안광도 인형이 나타난 곳을 비추었다.

인형의 모습은 기괴했다.

살가죽이라곤 없는 온몸이 뼈로 된 이였는데, 특이하게 갑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의 안광을 마주한 인형이 한쪽 무릎을 굽히곤 곧장 여인을 향해 몸을 숙였다.

여인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주인님의 음성이 들려 무슨 일인가 싶어 와 봤습니다."

입 한번 뻥끗했다고 왔다는 것이 유난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지난 3년간 욕조에 누워 내내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입 한번 연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였으니, 인형이 부리나케 그녀를 알현하러 온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고갤 저었다.

"별것 아니다. 조금 전, 재밌는 일이 있었거든."

"……?"

고갤 숙이던 인형이 고갤 갸웃거렸다.

지난 삼 년간, 주인을 모셔 온 이래로 그녀의 다양한 감정을 보는 듯해서였다.

인형의 궁금증이 커질 무렵.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날 이 꼴로 만든 발칙한 인간이 있었다. 놈이 인간답지 않게 강했던 이유도 있지만, 내가 방심했던 탓도 있었다. 아무튼, 위기에 순간 난 놈을 죽였다. 아니,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놈이 아직 살아 있더구나. 그리고… 신기하게도 놈이 나를 보러 왔다."

"……?"

인형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있는 이 장소는 줄곧 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침입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그러니 인형의 주인이 조금 전, 웬 놈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얘기는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형의 생각을 읽듯 여인은 고갤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

"놈이 날 보던 것은 천리안이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서 세상을 보는 그 능력처럼 말이다."

"……!"

인형은 놀랐다.

천리안은 오직 위대한 종족만이 사용 가능한 능력이었다.

한데, 인간에 불과한 녀석이 그의 주인과 같은 능력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탓이었다.

여인이 재차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가 재밌는 짓을 했어. 분명 그 천리안은 레온하르트의 것이었거든. 훗…."

여인이 재차 웃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핀 미소는 어째 쉽사리 지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나도 놈이 보이는구나…."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안광도 사라지고 내부엔 다시 어둠이 밀려와 사방을 가득 채웠다.

다시 무저갱처럼 돌아온 이 공간에 조금 전 여인의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단테스."

"예, 주인님."

"슬슬 준비해라."

"출정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십니까?"

"몸이 완전히 회복하려면 일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때까지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스스스.

어둠 속에서 인형이 읍하며 사라지고. 다시 그녀만 남은 이 공간에 재차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후후후훗…."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조금 전의 것보단 훨씬 길었다.

어둠 속에서 간만에 즐거운 듯 웃던 그녀.

데스 스타의 웃음 소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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