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가을의 새벽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찬 바람이 갑옷과 옷 속으로 파고들며 한기를 느끼게 해서일까.
병사들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늘어선 병사들에게서 이따금 들리는 대화 소리를 들어 보면 꼭 한기 때문에 몸을 떠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괘, 괜찮을까?"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전방을 주시하던 병사의 눈이 힐끗 옆을 향했다. 그가 물었다.
"뭐가?"
"이번 산채 토벌 말이야. 우리 실전은 처음이잖아."
듣던 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뭔 실전이 처음이야?"
"……?"
"영주님 오시기 전에 걸핏하면 산도적 놈들 마을에 쳐들어오려 했던 것 그새 잊었어?"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레온하르트 영지에 이든 영주가 부임하기 전, 마을의 청년들은 하루가 멀다고 수탈을 시도하는 산도적들을 막느라 목숨을 걸고 고생을 해야 했다.
말인즉슨 조금 전 동료의 말대로 그들에게 있어 실전은 한때나마 일상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조금 전 탄성을 내뱉던 이가 곧 반박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도 어떻게든 살겠다고 기를 쓰고 막는 입장이었잖아. 이렇게 먼저 놈들 때려잡겠다고 쳐들어가는 것 자체는 생전 없었다고."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수성하는 거랑 바로 앞에서 제대로 맞붙는 게 같을 리가 있겠냐…."
"……."
듣다 보니 맞는 말 같아 결국, 대꾸하던 병사의 얼굴에도 잔뜩 그림자가 졌다.
본래 암울한 분위기는 전염이 빠른 법이다.
조금 전, 그들의 대화를 시작으로 병사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먼발치에서 영주가 발리스타 교관과 스왈로 촌장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늘어서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다가오는 영주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헐…."
"와! 영주님 맞어?"
곳곳에서 웅성대는 청년들의 소리에 함께 늘어서 있던 엘프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걸어오는 이든을 향했다.
엘프들 역시 이든을 보곤 입 밖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제법 놀란 표정들을 했다.
이들의 반응이 하나같이 같은 이유는 갑옷을 쫙 빼입고 등장한 이든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멋진 인간이 멋들어진 갑옷까지 걸치니, 신화 속 주인공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넋 나간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이든은 어느새 병사들 앞까지 다가와 단상 위에 섰다.
이든이 입을 뗐다.
"어제, 난데없는 출정 소식에 다들 당황했으리라 생각한다."
"……."
"황실에서 산채 토벌을 도와줄 수 있겠냐는 서신이 왔었다. 도와줘도 그만이고, 안 도와줘도 그만이긴 한데 난 돕기로 했다."
"……."
"황실을 향한 충성 같은 유치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내가 토벌을 강행하는 이유는 제군들을 위해서다."
"……?"
듣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제군들이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한 지 거진 석 달 정도 됐을 것이다. 겨우 석 달이지만, 제군들이 보낸 석 달의 훈련량은 결코 적지 않다. 뭐, 스스로 잘 알겠지. 달라진 모습에 자신감도 제법 붙었을 것이고."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병사들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감이 한창 물오른 상황이었다.
토벌이 결정 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그 자신감이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지. 우리의 출정은 단순한 토벌이 아니다. 그간 제군들의 훈련 성과를 확인해 보는 자리다. 물론 부담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제군들은 강하다. 제군들이 그간 받아 온 훈련이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리스타 교관으로부터 마을 청년들과 엘프들이 받아 온 훈련은 절대 조잡한 무공이 아니었다.
정식 마인(魔人)들부터 익힐 수 있다는 마공심법(魔工心法)부터 해서 백팔마검(百八魔劍)과 마귀창술(魔鬼槍術), 그리고 마귀보법(魔鬼步法)이 그것이었으니.
신교 내에선 가장 기본적인 수련법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있는 어떤 단체 훈련보다 체계적임을 이든은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라고 이를 모를 리 없다. 그 자신들이 받아 온 훈련이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없는 훈련이라는 것쯤은 예상했던 바였다.
병사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며 이든의 말에 귀 기울이던 그때였다.
이든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오합지졸 산적들을 상대로 피 보는 순간, 산적한테 죽기 전에 나한테 먼저 죽는다. 아주 그냥 산적한테 죽여 달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굴릴 줄 알아. 알았어!?"
"……."
…예?
병사들의 얼굴이 식겁한 듯 금세 하얗게 질렸다.
이든 옆에 있던 발리스타 교관과 스왈로 촌장 역시 그의 말을 듣곤 입을 쩍 벌렸다.
출정 전,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줄 것이라 예상했건만, 사기는커녕 협박이라니…. 그들이 심히 당황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든의 연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든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냥 악으로 깡으로! 어? 이 악물고 훈련받던 거 떠올리면서 그냥 다 조져 버리라고. 알겠어!?!?"
"……."
"대답 봐라. 알겠냐고!!!"
병사들이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겉모습이 멋들어지면 뭣하나.
성격이 개차반인 것을….
"악으로!!!"
"깡으로!!!!!"
으아아아아아아아!!!!
새벽이나 다름없는 이른 아침부터 영지가 떠나가라 들려오는 악 쓰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비몽사몽인 모습으로 이게 대체 뭔 소란이냐는 얼굴을 하며 문밖으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제대로 된 첫 실전임에도 불구하고, 겁을 지레 먹기는커녕 ‘악’과 ‘깡’만 남은 병사들이 씩씩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투구 속 이든의 얼굴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야.’
사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든이 이용한 것은 분노를 매개로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효과는 대단했다.
그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올린 이든은 곧장 말에 올라탔다.
발리스타 역시 마련된 말에 올라타 천천히 몰며 선두로 나섰다.
그렇게 선두에 선 둘 뒤로 사기 백배한 모습에 병사들이 곧장 따라붙었다.
병사들의 눈이 어째선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앞에 산적이 보이기 무섭게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였다.
효과가 조금 과했나 보다….
***
"그아하하하하!!"
괴상한 웃음소리가 숲속에 요란하게 울렸다.
푸드드득.
숲속에서 지저귀며 노랠 부르던 새들도 깜짝 놀라 도망치듯 날아갈 만큼 괴이한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뒤.
"크하하하하!"
괴상했던 웃음소리를 따라 여러 웃음소리가 뒤섞인 소음이 다시 한번 숲속에 울렸다.
숲속에서 이게 웬 난데없는 웃음소리인가 싶겠지만, 과거 트럼프 영지가 있던 이곳은, 전쟁으로 영지가 폐허가 된 이후 갈 곳 없던 난민들이 산채로 대거 투신하여 산적들이 가장 많이 들끓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말인즉슨, 조금 전 웃음소리는 숲속의 산채 중 하나에서 들려오는 산적들의 웃음소리였던 것이다.
"그아하하하하!!!"
참으로 많은 산적들이 들끓는 이곳이지만, 특히나 이 괴이한 웃음 소리에 주인은 그 악명이 다른 산적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트럼프 영지의 병사들을 교육하던 교관 출신이었으나, 전쟁 발발 직후 영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피신해 있던 그는 트럼프 영지가 폐허가 되기 무섭게 일찍이 목이 좋은 곳에 산채를 만들고는 투신하는 자들마다 부하로 거둬들여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갔다.
물론 부하가 되길 간청하는 자들만 그를 찾던 것은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제국이 혼란스런 틈을 노려 산의 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자들의 도전 역시 숱하게 받아야 했지만, 애초에 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교관 출신이자, 기사였다.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숱한 도전을 받아 내고 승리한 그는 일대 산채 중 대 산채가 되어 산적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산적 왕이 된 이후로 그의 삶은 반복의 연속이었다.
주변 산채들로부터 약탈한 재화와 여자를 조공받는다. 조공 중 일부는 바친 이들에게 떼어 주고, 잡아들인 여자는 노예 상인들에게 팔고 술과 고기에 흥청망청 쓴다.
다시 또 조공받는다. 노예 상인들에게 이를 또 비싼 값에 판다… 그렇게 일대 산적 왕으로서 분수에도 맞지 않게 호의호식하며 방탕한 삶을 살던 그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술을 진탕 마실 때쯤, 웬 산적 놈이 그의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두모오오옥!"
요란법석을 떨며 달려오는 수하의 모습에 산적 왕 오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놈, 무슨 일이길래 왜 이리 요란인 것이냐."
오윈의 물음에 수하가 바싹 무릎을 꿇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쳐 댔다.
"두모옥! 크, 큰일입니다. 큰일!"
"큰일은 무슨 큰일."
"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황실에서 토벌대가 오고 있습니다…!"
"토벌대?"
오윈이 별일이란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의 토벌까진 엄두도 못 내던 녀석들이 토벌?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군."
"두, 두목 어, 어서 채비를!"
"채비는 무슨 채비! 우리 주변을 에워싼 산채만 수십 개다. 제아무리 황실에서 토벌대를 보냈다 한들 이 일대 산채들 전부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해 봤자 어정쩡한 산채 몇 개 건들다 가겠지. 호들갑 떨 것 없다."
"하, 하지만…!"
"어허, 호들갑 떨 것 없대도."
오윈이 ‘스읍’ 소리까지 내며 싫은 내색을 하자, 보고하던 수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두목이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충언하겠답시고 한마디 더 꺼내다간 그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윈의 성정은 그렇게나 개차반이었다.
수하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때였다.
"두모오오오오옥!"
"응?"
또다른 수하 한 명이 고레고레 소릴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술병을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대던 오윈이 인상을 썼다.
"오늘 무슨 날인가. 애새끼들 상태가 하나같이들 왜 이래?"
오윈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했지만 지금 달려오는 수하가 조금 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턱이 없다.
달려오던 수하가 먼저 무릎 꿇고 있던 놈 옆에 바짝 엎드렸다.
"두모오오옥! 크, 큰일! 큰일 났습니다!!!"
"네놈은 또 왜 이리 요란법석이냐!"
"토, 토벌대가! 토벌대가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쯧."
조금 전 수하와 같은 소리에 오윈이 혀를 찼다.
"그 얘긴 아까 저놈에게 들었다. 주변 산채들이 있으니 그리 호들갑떨 것 없…."
그때였다. 오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수하가 한시가 바쁘다는 듯 무릅쓰고 입을 뗐다.
"두목!!!! 지금 그 주변 산채들이 전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밖에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말을 끊은 수하의 태도에 얼굴을 구기던 오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 뭐라 했느냐? 주변 산채가 쑥대밭이 됐다고?"
"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속히 대비하셔야 합니다!"
수하가 서둘러야 한다는 듯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오윈의 얼굴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주변에 있던 그 많은 산채가 전부 쑥대밭이 됐단 말이냐?"
오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있는 대 산채 주변엔 보호하듯 다른 작은 산채들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산적이 우두머리를 제외하곤 오합지졸에 불과하다지만, 그의 상식선에선 황궁의 토벌대가 몰려온다 한들 인근 산채 전부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으아아!!!
"……!"
먼 곳에서 웬 비명 같은 것이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비명은 점점 잦아지며 수차례 들려오고 있었다. 수하가 다시 황급히 입을 뗐다.
"두, 두목…!!! 어서 대비를…!!!"
퍼뜩 정신을 차린 오윈이 주변 산적들을 향해 입을 뗐다.
"한심한 놈들아, 당황할 것 없다. 우린 악명 높은 대 산채의 산적들이다. 우린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의 입장이란 것을 잊지 마라!"
꿀꺽.
듣던 산적들이 두목의 흉흉한 기세에 절로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였다.
오윈이 바로 옆, 한구석에 놓았던 거대한 도끼를 쥐어 어깨에 턱 걸치고는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다들 채비해라! 그리고 겁도 없이 나의 영토에 함부로 들어온 저 시건방진 토벌대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오윈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 산채의 산적들이 한눈에 봐도 흉흉해 보이는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들의 서슬 퍼런 시선이 소란이 인 곳을 향해 일제히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