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발리스타는 산적들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난처한 것마냥 볼을 긁적였다.
‘…효과 좋네.’
출정 전날, 토벌을 나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달할 때만 해도 실전을 앞둔 병사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대단히 역력했었다.
발리스타마저 병사들의 반응을 보고는 이든이 토벌을 결정한 것에 대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건만.
그런데….
토벌 직전 이든이 병사들에게 했던 한마디가 땅에 떨어졌던 이들의 사기를 백배 충천시켰다.
이든의 말은 이랬다.
‘피 보면 구른다.’
구른다는 말이 무언가.
기합이다.
사실 병사들이 평소 받는 훈련도 훈련을 가장한 기합의 일종이지만, 어찌 됐든 이든의 얘기는 그보다 더하게 굴린다는 소리 아닌가?
그것이 자극제가 된 걸까.
똥 밭에 구르는 한이 있어도 사는 게 낫다지만, 이들은 산적들에게 죽는 것보다 이든이 친히 내릴 기합이 더 무서운 모양이다.
산적들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의 눈에 언뜻 비치는 광기에서 ‘기필코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압살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죽어!!! 죽어 이 새끼들아!!!"
"뒤져! 이 인간 말종 새끼들!!!"
"맹수 밥으로 만들어 주마. 산적 새끼들!!! 크하하하!!!"
"……."
이쯤 되면 누가 인간 말종이고, 누가 산적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발리스타의 시선이 마을 청년들인 병사들을 지나쳐 함께 대동해 온 엘프 병사들을 향했다.
"죽어랏!!! 숲의 쓰레기 같은 놈들!!!"
"심판의 화살을 받아라!!! 크하하하!!!"
"대가리에 구멍을 뚫어 주지!!!"
"……."
발리스타가 기겁했다.
‘쟤, 쟤들은 또 왜 저래….’
토벌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이던 엘프들이었지만, 그 기합에 자신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턴 엘프들도 저 지랄(?)이었다.
남다른 정신력을 소유한 엘프들이지만, 그들도 이든의 기합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쯤 되면 과연 저들이 숲의 수호자이자, 미(美)의 종족이었는지를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발리스타가 할 말을 잃고 입만 쩍 벌린 채 넋을 놓던 그때였다.
옆에 있던 이든이 물었다.
"애들 싸우는 거 어때?"
발리스타가 뭐 당연한 거를 묻냐는 듯 답했다.
"어떻긴 아주…. 누가 산적이고, 누가 토벌대인지 모를 정도로 살벌하게 잘 싸우고 있소."
이든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낄낄, 그렇단 말이지?"
그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발리스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든 형은 알고 있었소?"
"뭐가?"
"병사들이 이토록 잘 싸워 줄 것이란 것 말이오."
"뭐, 산적 정도야 대충해도 압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지. 생각보다 병사들이 겁먹었단 소리에 약을 치긴 했지만 말이지. 너도 예상하던 것 아니야? 너도 저들과 같은 훈련을 받던 시절이 있었잖아."
발리스타 볼을 긁적였다.
"뭐, 그렇기야 한데…. 뭐랄까. 가르치는 입장에선 그래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랄까?"
이든이 피식 웃었다.
"참 스승 다 됐군."
"스승?"
"스승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이성적으론 제자들이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도, 부모마냥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 말이야."
"…그런가? 그런데 이든 형은 딱히 불안해 보이지는 않던데."
"그런 척한 거지. 나라고 어찌 불안하지 않겠냐. 다만…."
"……."
"지휘관마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병사들 입장에선 더욱 기운 빠지는 법이거든. 지휘관이란 게 원래 그런 자리야. 그래도 안 그런 척하는 자리."
"…어려운 말이네."
"훗."
발리스타로선 당장에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이든 역시 전생의 천마였던 시절이 있었기에 미리 알고 있던 경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산채 역시 병사들의 압도적인 기세에 빠르게 토벌이 끝나 갈 때쯤이었다.
전방에서 산적들과 싸우던 병사들을 호위하며 주변을 정리 중이던 엘프 중 하나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곤 일순 어디론가 달려가 무언가를 확인하고 오더니만 이든 곁으로 다시 쏜살같이 달려왔다.
"영주님!"
달려온 엘프는 다름 아닌 실비아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든의 눈썹이 찰나 꿈틀거렸다.
"36번 훈련병?"
훈련병 시절은 이미 진즉에 졸업했건만, 이든은 여전히 그 호칭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36번 훈련병 실비아가 전방 어느 곳을 주시하며 입을 뗐다.
"웬 무리가 이곳으로 대거 다가오고 있습니다."
"음."
사실 그녀가 말하기도 전, 이든은 진즉에 기감으로 무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다만, 병사들 중 이를 알아차리고 고하는 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가만히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훈련의 성과가 있던 것인지, 실비아가 귀신같이 이를 알아차린 것이고.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산적 놈들이 말하던 대 산채의 산적들일 것이다. 서둘러 정리하고 바로 대열을 갖춰 준비하도록."
"예!"
실비아가 다시 쏜살같이 달려가 병사들 속으로 합류하고 이 사실을 알렸다.
듣던 남은 병사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며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려 하는 잔당들을 마저 소탕하곤 서둘러 정비를 하며 대열을 갖추던 그때였다.
그사이, 실비아가 포착한 무리가 먼발치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옆에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저들을 바라보던 발리스타가 이든에게 말했다.
"과연 대 산채인가. 지금껏 상대했던 것들보다 기세가 만만치 않소."
"그러게. 좀 하네."
"……."
표현은 안 했지만, 이든을 바라보는 발리스타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심 애들 걱정된다는 사람이 할 만한 소리가 아닌데?’
어쨌거나, 발리스타의 말대로 흉흉한 기세를 온몸으로 발산해 대는 대 산채의 산적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늘어선 산적들이 대치하듯 근처에 멈추어 서더니, 양옆으로 빠릿하게 갈라졌다.
그 틈으로 한 거구의 사내가 산책하듯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대 산채의 산적왕 ‘오윈’이었다.
오윈이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웬 놈들이 감히 겁도 없이 나의 영역에서 소란들이냐!"
오윈의 기세는 지금껏 병사들이 상대한 오합지졸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감으로 오윈을 훑던 이든이 확인차 물었다.
"네가 이놈들 대장이냐?"
오윈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묻는 이든의 말투가 건방지게 느껴진 탓이었다.
"건방진 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면서도 함부로 지껄이느냐?"
"누구긴 누구야. 그래 봤자 산적 나부랭이지."
"뭣이?"
계속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이든의 말투에 오윈 눈에 핏발이 서려 할 때쯤이었다.
일순 이든이 칼을 뽑더니만, 고함을 내질렀다.
"다들 뭣들 하고 있어! 저 시건방진 놈들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버리지 않고!"
"……."
핏발이 서려 했던 오윈의 눈이 일순 당혹스럽다는 듯 흔들려 댔다.
‘저, 저건 내 대산데…?’
그리고 그때였다.
이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피어오르더니, 대치 중이던 산적들을 향해 일제히 악을 쓰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어라!!!"
"크하하!!!"
"이 산은 이제 우리 것이다!!!"
"……."
말하는 것만 들으면 누가 산적이고, 누가 토벌대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하나, 달려오는 병사들을 마주한 산적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지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우아아아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토벌대의 기세가 너무도 살벌했던 탓이었다.
산적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움직임이 둔해지던 그때였다.
오윈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호령하듯 고함을 쳤다.
"멍청이들아, 뭣들 하고 있어. 방패 들지 않고!!!"
"……!"
오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산적들이 황급히 방패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황실의 병사들도 아니고, 산적 주제에 방패라니. 이게 웬 부조화인가 싶지만, 어찌 됐든 그들이 방패까지 들고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산적들이 방패를 앞으로 들이밀기 무섭게 엘프들이 쏘아 낸 화살 수백 발이 비 내리듯 쏟아졌다.
쐐애애애액! 퍼버버버버벅!
"끄허억!"
물론 늦은 대처로 날아온 화살에 비명횡사한 산적 역시 몇몇 있었으나, 날아온 화살의 개수와 비교하면 죽은 놈의 수는 새 발의 피였다.
오윈의 판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삼백에 달하는 대 산채의 산적의 몸이 뚫려 순식간에 벌집처럼 됐을 터였다.
수하들의 방패 속에 몸을 숨겼던 오윈이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씨발! 그냥 이대로 밀어붙여!!!"
오윈의 판단은 탁월했다.
어차피 방패를 내려 봤자 재차 화살 비가 쏟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아아아아!
산적들이 고함을 지르며 거북이 등껍질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방패 대열을 유지한 채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흡사 잘 훈련받은 군 병력을 연상시키는 놈들의 대처에 발리스타 역시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발리스타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같이 방패로 밀어붙여!!!"
발리스타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들던 병사들이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일제히 빼내 들며 맞부딪치려던 그때였다.
파아아아앗!!!
발리스타의 옆에서 상황을 보고받던 이든이 일순 뛰쳐나가더니 신법을 밟기 무섭게 산적들의 대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산적들의 대열이 거대한 폭발에 휩쓸리며 무너졌다.
어느새 병사들을 앞서 나간 이든이 산적들이 들이밀던 방패를 뚫고는,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폭음과 함께 널브러진 산적들 틈 사이로 이든이 소리쳤다.
"씨발! 그냥 쓸어 버려!!!"
우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어찌해야 할지 종잡지 못하던 산적들의 대열을 비집고 놈들을 도륙해 나가기 시작했다.
산적들의 대처에 주춤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 전 이든의 무지막지한 돌격에 재차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산적들의 비명이 울렸다.
오윈의 안색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대 산채의 산적 왕으로 군림하면서 경험을 살려 오랜 기간 수하들을 직접 훈련시키며 공을 들여온 그였다.
거기서 오는 다른 산채 놈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무력으로 줄곧 대 산채로서 군림해 온 것이건만.
한데.
"으아아아악!!!"
재차 울려 오는 수하들의 비명.
그 자신이 아득바득 키워 온 수하들이 토벌대의 손에 무참히 쓰러져 가고 있었다.
자신의 왕국이 스러져 가는 모습에 이성을 잃은 오윈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이, 이이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한 차례 괴성을 지른 오윈이 쥔 도끼에서 짙푸른 오러가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우왕좌왕하던 그의 수하들도, 그리고 도적들을 도륙해 나가던 토벌대의 병사들마저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오윈이 수하들을 밀치다시피 하며 토벌대를 향해 달려들던 그때였다.
이든이 누군가를 불렀다.
"발리스타."
쏜살같이 빠르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든이 부르기 무섭게 발리스타가 번개와 같이 날아와 오윈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오윈이지만 눈앞의 거구의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이라는 것은 그 역시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오윈이 이를 갈다시피 하며 입을 뗐다.
"네놈은 또 뭐냐."
발리스타가 등에 걸쳐 있던 대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나? 얘들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