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250)

202화.

산적 왕 오윈이 발리스타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죽자, 더는 가망이 없다고 여긴 걸까.

철컹.

곳곳에서 산적들이 무기를 놓고 투항하기에 바빴다.

발리스타가 주변 상황을 쭉 살피다가 병사들에게 곧바로 명을 내렸다.

"투항한 놈들 단단히 결박하고, 허튼짓하는 놈 보이면 바로 죽이도록."

"예!"

대답하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평소보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조금 전 오윈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며 요리했던 발리스타가 보인 신위의 효과였다.

발리스타의 명이 떨어진 직후,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곳곳에서 고성을 내질렀다.

"무릎 꿇어!"

"손은 머리 위로 올려 새끼들아!"

"손 내리면 뒤져. 아주!"

병사들의 대처는 참으로 신속했다.

으름장을 놓으며 겁을 주는 병사들이 있는가 하면, 남은 일부 병사들은 산적들의 손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발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산적들에게 욕을 지껄이고, 발로 차서 허튼짓을 못 하도록 위협을 가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누가 산적이고 누가 토벌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리스타의 입가에 지어졌던 미소가 지운 듯이 사라졌다.

그의 눈이 손에 쥔 자신의 대검을 향했다.

‘…나, 정말 강해졌구나.’

소드 마스터의 경지는 이미 진즉에 오른 뒤였다.

지난 전쟁 때, 이든이 사라지고 2년 만에 달성한 쾌거였다.

하지만 그간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시험해 볼 기회가 없어 어느 정도로 강해진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던 상황이었는데, 오윈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 해결책이 된 셈이었다.

발리스타 생각에 오윈은 최소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준하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발리스타는 그런 오윈을 가지고 놀듯 손쉽게 압살해버렸다.

과거의 그였다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겨우 이길 수 있었을 상대이건만, 그만큼 이든이 그에게 전수한 신공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발리스타가 자신의 싸움을 되돌아보던 그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이든이 실실 쪼개며 발리스타에게 물었다.

"이겨서 기쁘냐?"

"……."

이겼는데 기분 나쁘기야 할까.

다만, 그토록 바라던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어째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발리스타가 고갤 저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강해진 것 같기는 한데, 뭐랄까…. 소드 마스터란 경지에 올랐음에도 별 감흥이 없소."

이겨서 좋다고 야단법석을 떨 것이라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라 이든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모르겠소. 소드 마스터라 하면 검에 관해선 극에 오른 경지라고들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 생각엔 그 말은 틀린 것 같소."

"……."

발리스타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든이란 사내 때문이었다.

이든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3년 전보다 훨씬 이전에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진즉에 올랐던 상태였다.

그리고 발리스타가 당시에 기억을 더듬어 이든의 경지를 떠올려 봤지만, 필시 그때 당시 이든은 소드 마스터 그 이상의 경지였던 것 같았다.

말인즉슨, 소드 마스터가 결코 검의 경지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자 복잡미묘한 만감이 그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가만히 발리스타의 감평을 듣던 이든이 씩 웃어 보였다.

"성장했네."

발리스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가 말이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이겨서 좋다고 호들갑이라도 떨어 댔으면 한 소리 하려 했거든."

"……."

"한데, 괜한 걱정이었구나 싶구나."

발리스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얼마나 더 있는 것이오?"

"뭐가?"

"소드 마스터 위에 경지가 얼마나 더 있느냔 말이오."

"글쎄, 단순히 단계로 나누면 그 위에 몇 단계가 더 있기야 하지."

"……."

소드 마스터, 그 위에 몇 개나 더 있다는 말에 발리스타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든의 설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단계마다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고."

발리스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물음에 이든이 저토록 자세히 알고 설명하고 있다는 건, 필시 그가 그 위의 경지를 현재 걷고 있단 뜻 아니던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정도로 절대 자만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발리스타는 깨달았다.

그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더니 내뱉었다. 발리스타의 시선이 어느새 하늘에 가 있었다.

"여기서 저기까지라…. 역시 나는 아직 한참 먼 듯하오."

"해서, 허탈하냐?"

허탈이라….

허탈까진 아니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발리스타가 일순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어 보였다.

"무슨 소리! 잊었소? 나 발리스타요! 단지 까마득하다고 말하는 것일 뿐. 절대 멈출 일 없으니 괜한 걱정 마시오."

끝에 달한 줄 알았더니.

그 위가 까마득하게 더 있더라.

이는 이든 역시 전생의 젊은 시절에 한번 느껴 봤던 감정이었다.

하나, 이것을 자극으로 삼아 더 나아가느냐.

아니면 허탈감에 사무쳐 주저앉느냐.

그 의지의 차이가 앞날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든이 보았을 때, 발리스타는 명백히 전자였다.

무(武)에 관해선 발리스타 역시 그 자신만큼이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든이 발리스타의 등을 몇 번 두들기곤 걸음을 돌렸다.

"그거면 됐다. 그럼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

발리스타가 뚱한 얼굴로 이든의 등을 바라봤다.

‘뭐야, 평소답지 않게 자상하긴.’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도 드리웠던 근심이 사라지고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도 뭐, 조금은…. 도움이 되긴 하네.’

발리스타는 생각했다.

까마득한 먼 길이 남았다 한들 까짓것 어떠냐고.

쉬지 않고 계속 위를 향해 걷다 보면 그 자신 역시 저 하늘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사이에 먼저 하늘 끝까지 닿은 이든을 보면 배가 꽤 아플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그때였다. 이든의 뒤를 따라 걷던 발리스타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

"저 산적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오? 내 생각엔 여기서 처리하고 가는 게 이동하기 간편할 것 같은데."

발리스타의 말을 들은 걸까.

결박당하던 산적들의 안색이 금세 새하얗게 질렸다.

하나, 곧 구원의 말이 들려왔다.

이든이 입을 뗐다.

"싸울 의지가 없는 놈들까지 죽일 필요 뭐 있겠어. 데려가서 작업 현장 노예로 쓰지 뭐."

곳곳에서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발리스타가 곧장 반문했다.

"그럼 이동의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토벌대만으로 여기까지 오는데도 일주일이 걸렸는데, 저들까지 끌고 가면 그보다 더 걸릴 거요."

산적들의 얼굴이 다시금 새하얗게 질렸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걷고 달리는 것 역시 수련의 일종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지까지 달릴까?"

"…뭐요?"

발리스타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했다.

병사들 역시 산적들을 결박하다 말고 발리스타를 바라봤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비단 산적들뿐만이 아니다.

병사들이 제발 영주님을 말려 달라는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그 애원에 발리스타가 황급히 입을 뗐다.

"저, 저기 여, 영주님. 그건 좀 무리이지 않을…."

"무리?"

"……."

"무리이?"

"……."

"내 사전엔 무리란 단어는 없다."

"…예."

그래요.

달립시다. 달려요.

뭐, 죽기밖에 더하겠소?

발리스타가 눈빛을 보낸 병사들에게 휘휘 고갤 저었다.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그의 모습에 병사들이 곧장 죽을상을 했지만, 영주의 고집은 말릴 수 없는 것임을 그들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산적들은 병사들과 달리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중이었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공평하게 지옥에 발을 들였음을.

결국, 레온하르트 토벌대는 사로잡은 산적들을 줄줄이 세우곤 죽어라 달렸다.

물론 산적들도 죽어라 달렸다.

병사들은 이게 기합과 다른 것이 뭔가 싶었고, 산적들은 차라리 죽여 달란 소리가 목구멍을 넘어 입 밖으로까지 나왔다.

레온하르트 영지까지 가는 내내 나 죽네 하며 앓아 대는 곡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든은 그 소리마저 흥겨운 가락을 듣는 것만큼 즐거운 듯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절규를 들으며 발리스타는 또 생각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고.

지옥에 마왕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든이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토벌은 끝이 났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토벌대 소식은 곧 황궁에 귀까지 들어갔다.

황궁은 이 소식을 듀크 영지와 칼스테인 영지에 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각 영지는 그것에 힘입어 자신들도 곧장 남은 영토에 토벌대를 파견했다.

칼라슈와 대마법사 듀크가 이끄는 토벌대인 만큼 레온하르트 영지 못지않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산적들은 상당수 줄었다. 하지만 이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산적이 들끓었던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전쟁 이후, 어려워진 삶에 벼랑 끝에 몰린 백성들이 최후의 선택으로 산채에 들어선 것이었고, 그 때문에 제국의 영토 각지의 산도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큰 숙제가 남은 것이다.

***

이든은 근래 들어 비슷한 꿈을 자주 꿨다.

맹인도 꿈을 꾸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이든은 꿈을 꿨다.

그리고 그 꿈은 그다지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항상 이 꿈을 꿀 때마다 그는 뒤숭숭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이든이 꾸는 꿈은 항상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으로 시작했다.

황급히 비명을 난 곳을 따라 걷다 보면 천지 사방이 화염에 휩싸인 세상이 보였다.

처음 이 꿈을 꾸었을 땐 난생처음 보는 세상에 이곳이 어디인가 싶었다.

그리고 이 꿈을 수차례 반복해서 꾸었을 땐 그가 바라보는 화염의 휩싸인 세상이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세상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이든은 이 꿈을 꿀 때마다 불에 타고 있는 아슬란 제국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그는 그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다.

누군가 불에 타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면, 그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왠지 모르게 그를 구해야만 이 기분 나쁜 꿈도 멈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없이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꾸던 그때였다.

어느 날은 화염 속을 해매다 보니, 누군가가 보였다.

불에 잔뜩 그을린 이였다.

이든을 그를 황급히 들쳐 업고 구했다.

구해진 이는 마치 이든을 알고 있다는 것마냥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든…."

이름이 불리자 이든이 놀라 등에 맨 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난생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목소리는 더없이 익숙했다.

이든은 놀라 물었다.

"아버지…?"

그의 아비가 왜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유가 뭐건 간에 그를 구했다 안심하던 찰나였다.

비명은 재차 들려왔다.

그 비명을 따라갔을 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고, 그 누군가 역시 이든을 알고 있다는 것마냥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처음 보는 이였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어머니…?"

그때였다.

그의 어미까지 찾고 나니 일순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죄다 아는 사람의 음성 같아 보였다.

이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불타는 제국을 두리번거렸다.

누구부터 구해야 하는지 망설여지던 그때였다.

깜깜한 하늘인 줄로만 알았던 상공에서 일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흐흐흐….

더없이 사특한 그 웃음소리에 이든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는 어둠에 푸른 불꽃 하나가 번뜩였다.

도깨비불인가 싶었다.

하나,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동자였고, 불꽃은 안광이었다.

푸른 안광을 번뜩이던 거대한 어둠이 불타는 제국을 바라보며 미소짓더니 이든을 향해 말했다.

- 마음에 드는가? 내 선물이….

이든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어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 어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데스 스타…."

그 어둠은 죽음의 드래곤 데스 스타였다.

이든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데스 스타는 말을 이었다.

- 곧 네놈이 사는 세상은 이리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에 절규할 것이다.

이든은 말했다.

자신이 그렇게 둘 것 같냐고.

하지만.

도리어 데스 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 아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일순 돌풍이 불어오며 화염은 더욱 커지고, 이든은 활활 타오르는 제국을 바라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그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매일 꾸는 같은 꿈이었지만, 오늘은 그가 꾼 꿈은 내용이 조금 달랐다. 좀 더 사실적이었고, 좀 더 섬뜩했다.

꾸욱.

이든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결코, 네놈이 바라는 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잠에서 깬 이든은 데스 스타와의 결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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