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장인 몰린이 건넨 제안에 이든이 놀라 되물었다.
"병사들의 갑옷과 무기를 전부 미스릴로 만들고 싶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이든은 검수로서 혹은 무인으로서 좋은 무기와 그렇지 않은 무기만 대충 구분할 줄 알 뿐이지. 장인으로서의 지식은 전무하다.
다만, 주변에서 들은 것이 있어 미스릴 가공법이 일반 철을 가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몰린이 재차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토벌을 다녀오시고 나서, 병사분들의 갑옷과 무기의 상태를 점검해 봤습니다. 한데 재료가 재료인 만큼 검의 날이 상당 부분 나가고, 갑옷에 흠집 역시 상당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음."
"지금이야 산적 토벌이었기에 그 정도로 그친 것이지만, 필시 데스 스타가 대륙을 침공하게 된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웬만한 공격으론 끄떡없는 갑옷과 날 역시 쉬이 나가지 않는 무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싸움은 역시 장비빨 아니겠습니까?"
이든이 몰린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싸움이란 것은 지닌 장비의 수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싸움의 규모가 전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급으로 가게 되면 장비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었다.
이든의 생각은 이랬다.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걸 뒷받침해 줄 장비까지 받쳐 준다면 금상첨화라는 것을.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이든이 고갤 저었다.
‘개소리지.’
저 전설의 장인 몰린조차 도구를 엄청 탓하며 모든 작업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지 않던가.
하물며 무인이라고 다를까.
강한 이가 강한 무기까지 쥔다면 응당 전투력이 상승하기 마련이다.
전생의 그가 속했던 무림에서 조차 신물이라 불리는 무기가 잠든 곳이 알려지면 정파와 사파, 마교 할 것 없이 혈겁이 벌어졌었다.
그만큼 무인에게 있어 장비빨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든이 몰린의 제안에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승인을 하려던 그때였다. 그가 불현듯 생각나 물었다.
"한데 말입니다…. 현재 마을에 주둔 중인 병사들에게 장비를 모두 맞춰 줄 만한 미스릴이 있습니까?"
"없지요."
"……."
미스릴이라는 것은 흔한 금속이 아니다.
미스릴은 아주 귀한 금속이었다.
어찌나 귀한지, 같은 크기의 황금보다 비싼 것이 미스릴이었다.
물론 얼마 전 몰린이 이든을 위해 미스릴 갑옷을 만들어 주긴 했지만, 그것은 몰린이 드워프 도시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때 혹시 몰라 미리 챙겨 둔 것이었다.
더는 무언가를 만들 만한 미스릴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든이 난감한 듯 물었다.
"하면 병사들의 장비를 미스릴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드워프 도시에 그만한 양의 미스릴이 있습니까?"
몰린이 고갤 저었다.
"있었으나 역시 현재는 미스릴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럼, 예전에는 미스릴 양이 풍족했단 뜻이군요?"
"아주 풍족했지요."
몰린이 고갤 주억거리다가 난데없이 질문했다.
"저희 드워프들이 어째서 미스릴 세공법을 아는지 아십니까?"
이든이 모르겠다는 듯 고갤 저었다.
몰린이 답을 알려 주듯 말을 이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드워프들이 미스릴을 최초로 발견하고 채취한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즉 미스릴이 채취되는 장소를 알고 계신단 뜻이군요?"
"맞습니다."
"종합해 보면 미스릴이 채취되는 장소를 알고 있음에도 드워프 도시에 남은 미스릴이 없다는 건, 그것을 채취할 만한 상황 역시 아니란 뜻이고요."
"예."
"어째서입니까? 미스릴을 채취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이든의 물음에 몰린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
"드워프들이 본래 살던 고향을 버리고, 땅속으로 숨어든 이유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본래 저희 드워프들이 살던 고향은 자원이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미스릴은 그중 일부였죠. 그래서인지 저희 드워프들의 고향은 자연히 다른 종족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숱한 침략으로부터 싸워야 했고,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그중 저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인간이었죠."
몰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인간들이 저희를 가장 많이 괴롭혔었죠. 그러던 중 빈번하게 일어나는 싸움에 희생되는 동료들의 수가 많아지자 저희는 결국 고향에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땅속으로 숨어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후로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 그사이에 고향의 상태가 어찌 변하였는지 궁금해 한번 찾아가 봤던 적이 있습니다. 한데…. 저희가 버려두었던 고향에 누군가 들어와 살고 있더군요."
"…고향을 비워 둔 사이에 누군가 그곳을 제집처럼 장악했다 그 말입니까?"
"예."
"누굽니까? 그들이. 역시 인간입니까?"
몰린이 고갤 저었다.
"인간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습니다."
"그럼…."
"오크가 있더군요."
"오크요?"
"예."
오크는 이든 역시 몇 번 상대해 본 기억이 있는 놈들이었다.
일전 호송 때 한 번, 그리고 레온하르트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한 번 말이다.
이든이 물었다.
"고향을 살피러 간 것이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2년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근래에 보러 가셨던 거군요?"
"예, 이방인들의 침략을 피해 땅속에 숨어들었는데, 그 못지않게 거대 개미의 괴롭힘 역시 감당 못 할 수준이 되자, 혹 고향의 상태를 보고 다시 거처를 옮길 수 있을까 싶어 수백 년 만에 찾아가 본 것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저희가 버려둔 곳을 누군가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크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놈들이 미스릴과 그밖에 다른 자원들을 노리고 그곳을 장악했다 보십니까?"
몰린이 고갤 저었다.
"오크는 힘은 셀지언정 저희처럼 자원을 세심하게 다룰 수 있을 만큼 월등한 지능을 가진 종족은 아닙니다. 고향의 상태를 보아하니 모든 공장이 가동이 멈춘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필시 그냥 머물 거처를 찾던 중에 저희의 고향이 보여 그곳에 오랜 기간 자리한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는 건 거기에 있는 오크들만 정리한다면 그곳에 있는 자원을 다시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다 그 말이군요. 거기엔 미스릴 역시 포함되어 있고요."
"맞습니다. 해서 말인데요…. 영주님께서 그곳을 장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몰린이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병사분들에게 미스릴로 된 무기를 만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무엇보다 고향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더욱 큰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 저희 드워프 종족만으로 그곳을 장악한 오크들을 몰아내는 데는 분명 큰 희생이 따를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영주님께서 저희의 고향을 되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드워프들이 땅속에 마련한 도시 역시 한 나라의 왕국을 연상시킬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지만, 그래봤자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의 도시였다.
드워프들의 고향은 그것과는 비견되지 않을 큰 규모와 역사를 자랑할 터.
더군다나 지금의 땅속 도시와 다르게 그곳은 주요 자원이 굉장히 풍족한 땅이었다.
그곳을 버려두고 계속 땅속에 살아가는 것엔 분명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몰린이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고향. 제가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이든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몰린이 놀라 곧장 되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드워프는 저희의 친구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친구의 고향을 되찾아 주는 일인데 제가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몰린이 감격한 듯 고갤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 그 감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든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웃으며 입을 뗐다.
"그리고 일단 고향만 되찾아 드리면 병사들 전부 미스릴로 된 갑옷과 무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 횡재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후후…."
"……."
"조금 전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저희 병사들에게 미스릴 갑옷과 무기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무, 물론이죠. 어찌 한 입으로 두말하겠습니까…!"
"후후후…. 어마어마한 미스릴이 이제 제 손…. 아니, 우리 영지 손에 들어오는 것이군요. 후후후…."
"……?"
뭔가 중간에 본심이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든이 나서 주기만 한다면 몰린의 바람대로 고향을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몰린이 고향을.
이든이 제 손에 쥐어질(?) 미스릴을 떠올리며 둘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되는가 싶던 그 순간, 몰린이 물었다.
"출발은 언제쯤 하실 생각입니까?"
"뭐, 시간 끌 것 있겠습니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죠."
"그럼 저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군요."
"몰린 장인께서요?"
몰린이 고갤 끄덕였다.
"말씀드린 고향과 일전 영주님께서 오셨던 저희 도시는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길잡이가 따로 있지 않은 한 찾으시는 데 상당히 어려우실 겁니다."
몰린의 말을 듣던 이든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장인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저에겐 누구보다 빠른 최고의 길잡이가 있으니까요."
몰린이 혹시나 해 넌지시 물었다.
"혹 영주님께서 말하는 그 길잡이란 분이…?"
"레온하르트 님 말고 더 있겠습니까?"
"아…."
몰린은 일순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드래곤을 길잡이로 쓰는 인간이라니.
지금에 와 돌이켜 보니, 일전 드워프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레온하르트가 이든의 길잡이를 해 줬을 가능성이 컸다.
세상 어느 간 큰 놈이 드래곤에게 길잡이를 해 달라 대놓고 부탁할 수 있을까.
새삼 눈앞의 영주란 인간이 대단해 보인 몰린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연신 툴툴댔다.
"자네 그거 아나?"
"뭐가 말입니까?"
"이 세상에 다른 누구도 아닌, 드래곤한테 길 안내를 하라는 정신 나간 놈은 자네밖에 없다는 거."
이든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정신 나간 놈을 살리신 게 바로 레온하르트 님인데요?"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든의 말대로 저 정신 나간 위인을 아득바득 살려 낸 것이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쁘다고 저놈을 살려 냈을까 후회하던 찰나, 일순 데스 스타의 면상이 떠올랐다.
‘아…. 데스 스타에게 한 방 먹였었지.’
데스 스타가 어떤 놈인가.
세상에 모든 드래곤을 말살시키겠단 목적으로 틈만 나면 전쟁을 일으키는 정신 나간 놈이다.
그리고 그 정신 나간 놈은 레온하르트 자신의 몸에 영영 회복 불가한 상처를 남겼다.
그런 놈에게 한 방 먹였단 사실이 떠오르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새삼 이든을 향한 기특함을 다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냥 이든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자고 다짐했다.
혹여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다간 저 정신 나간 인간이 데스 스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에게 한 방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설마 그러겠냐고?
레온하르트 생각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평소에도 자신이 하는 말마다 대드는 놈이 어느 날 대답 대신 주먹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레온하르 트님."
"으, 응!?"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레온하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유난스러운 반응에 이든이 물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아, 아니네."
"나 참."
이든이 별 싱겁다는 듯 말하다가 다시 전방 쪽으로 고갤 돌렸다.
이든이 물었다.
"그보다 말입니다. 저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생각보다 상당합니다. 레온하르트 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절벽 끝에서 과거 드워프 왕국이었던 곳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가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냥 상당한 정도가 아닐세. 육안으로 확인되는 오크들의 수만 봐도 수천에 달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입니까?"
"말 그대로 육안으로 확인되는 정도만 말하는 것일세. 바깥을 돌아다니는 오크의 수가 저 정도라면 최소 일만에 가까운 오크들이 저곳에 있다는 뜻인데. 이 정도면 서식이란 말로도 부족하지. 아무래도 드워프들이 자릴 비우고 나서 저들이 이곳에 문명을 이룬 지 상당 시간 흐른 것 같네."
"아…. 그렇습니까?"
이든의 얼굴에 찰나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던 레온하르트는 이든이 지금 어떤 생각 중인지 대충 예상하는 듯했다.
레온하르트가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어쩔 생각인가?"
"……."
"문명을 지운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자넨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