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250)

204화.

"……."

예상보다 커진 일에 생각이 많아진 걸까. 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단지 오크에 불과하더라도, 문명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야. 세월이 쌓이고 쌓여 이룩하는 것이지. 놈들이 간혹 가다 인간들을 위협하는 극악무도한 놈들이라지만, 저 중엔 전사들 외에도 평범한 오크 주민들 역시 다수 섞여 있을 것이네. 개중엔 어린 오크들과 그들의 어미 되는 오크들 역시 섞여 있겠지."

"……."

"드워프에게 저 고향을 되찾아 주려면 저들을 모두 죽이든지. 아니면 내쫓든지 해야 하는데…. 자네 혼자서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떠나서 다수의 생명을 거둔다는 것은 큰 책임과 부담이 따르는 법이네."

이든이 이를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레온하르트가 재차 물었다.

"자네는 그 책임감과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나?"

레온하르트의 물음에 내내 묵묵부답이던 이든이 되레 물었다.

"만약 레온하르트 님이라면 이 상황에 어찌하시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고민도 않고 답했다.

"나라면…. 드워프들의 고향을 되찾아 주는 것을 포기할걸세."

"……."

"저들을 내쫓는 것은 전쟁이 아니네. 무분별한 학살일 뿐이지."

레온하르트의 대답을 듣던 이든은 찰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패도의 길을 걸었던 전생의 무진이었던 그 시절. 그는 무림 전체를 신교의 발아래 두어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물론 무림이란 곳이 늘 그렇듯, 천하제일인이라는 목표에 반발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 중에 하나였다.

특히 무림맹의 반발이 가장 거셌다.

길었던 백도와의 전쟁.

그 긴 싸움 끝에 승리한 이는 다름 아닌 무진이었다.

무진은 무림을 일통하겠다는 원대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문득 패도자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기쁘진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참혹한 황량함뿐이었기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시신으로 이룬 산과 거기에서 흐르는 피로 이뤄진 강의 흔적을 바라보고 나서야 뒤늦게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패도의 길은 외로움이 동반된 길이란 것을.

지나온 길을 되짚어 봤을 때, 남은 것이라곤 오롯이 그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조차 패도란 무진의 목표를 위해 희생되었고, 오랜 세월 자극이 되어준 백도의 수많은 고수 역시 먼지처럼 사라졌다.

천하제일인이란 그런 자리다.

적아를 떠나 피로 쌓아 올린 의지를 딛고 끊임없는 책임감으로서 아래를 굽어보아야 하는 자리이다.

무진은 그 자리에 오른 뒤, 공허할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무림인의 삶은 택한 이상, 천하제일이라는 목표는 백도나 흑도나 혹은 마도 할 것 없이 모두가 꿈꾸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표로 두었던 패도의 길도 감당키 힘든 책임감이 따르는 법이건만, 전쟁도 아니면서 하나의 문명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학살하다시피 할 때면 응당 거기에 따라오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마 후회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 후회에서 오는 책임감은 패도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더한 책임감으로 이든을 오랜 시간 짓누를 것이 분명했다.

레온하르트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든이 저들의 터전을 짓밟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저들이 인간이건, 오크건, 그 무엇이건 간에 말이다.

찰나 잡념에 사로잡혔던 이든이 대뜸 입을 열었다.

"저들과 전쟁 중이었다면 거리낌 없이 나섰을 겁니다. 하나, 저들이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오크라 해도 저기에 껴 있는 주민들까지 죽이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군요."

"그럼, 역시 이대로 돌아갈 생각인가?"

레온하르트의 물음에 이든은 고갤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응?"

"멀린 장인에게 약속한 것도 있고, 그의 말대로 훗날 있을 데스 스타와의 전쟁을 대비하려면 저곳에 있을 미스릴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면…."

"물론 저들에게 난데없이 싸움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겠지요."

"설득이라…. 오크들을?"

레온하르트 생각에 오크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세상에 멸시를 받는 종족일지언정 힘을 숭배하며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는 만큼 스스로의 대한 자부심이 강한 종족이다.

애초에 말로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종족이 아니란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레온하르트가 제안했다.

"하면 내가 같이 가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이든이 놀라 물었다.

"레온하르트 님께서요?"

"아무리 저들이라고 나를 모를까. 오크도 그렇고, 엘프와 드워프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과 다르게 수명이 상당히 긴 편이네. 분명 나의 존재에 대해 얘길 꺼내는 순간, 보다 말이 쉽게 통할 거야."

"……."

이든은 어째선지 그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히 드워프와 오크 간에 문제였고, 거기에 중재자는 이든 그 자신이었다.

레온하르트의 힘을 빌리면 당장에 대화는 쉽게 풀릴지언정 근본적인 해결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역시 저만 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온하르트 님에게까지 그런 부담을 안겨 드리기도 싫고요. 물론 오크라는 종족을 여러 번 상대해 봤기에 저들이 과연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문명을 이루며 살아갈 정도의 지능이라면 아주 대화가 안 통하지는 않겠죠."

"상당히 긍정적이군."

"일단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야죠. 때려잡는 것이 저로서도 편하지만, 일단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니까요."

레온하르트가 진중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알겠네."

말을 마친 레온하르트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이공간의 문이 열리며 레온하르트 레어로 곧장 통하는 입구가 생겼다.

"다른 의미로 힘든 여정이 되겠군.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때려잡기 바쁘던 자네 아닌가. 대화로 무언가를 해결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걱정입니까. 악담입니까? 하나만 해 두시죠."

"반반이라 해 두지."

레온하르트의 대답을 듣던 이든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최대한 좋은 소식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알겠네. 그럼 수고하게."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걱정되는지 이공간의 문 앞을 서성이다가 휘휘 고갤 젓고는 안으로 재차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이든 역시 더는 고민만 해 봤자 무의미하다는 듯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저 이든이 대화로 오크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물론 레온하르트 말대로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 분명했다.

***

"꾸?"

경계 탑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보초를 서던 오크가 어느 한 방향을 보고는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고갤 멈췄던 전방을 주시했다.

잠시 뒤, 전방을 예의주시하던 오크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오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웬 인간이었다.

끼기기긱.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꽉 붙잡은 채 놈이 전방의 인간을 향해 소리쳤다.

"멈춰라. 이곳은 쿠훌락 부족의 주둔지. 인간 올 곳 아니다!"

하나, 오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인간의 걸음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오크가 팽팽히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애애애액!

엘프도 아니면서 활 쏘는 솜씨가 제법 수준급이었다.

화살이 정확히 인간이 서 있던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척.

날아가던 화살이 일순 다가오던 인간의 코앞에서 덜컥 멈추었다.

매섭게 쏘아 낸 화살을 인간이 맨손으로 낚아챈 것이다.

그 기겁할 광경에 오크가 재차 빠르게 활시위를 당기려던 찰나.

전방에서 다가오던 인간이 대뜸 걸음을 멈추곤 소리쳤다.

"사격 중지!"

"꾸?"

"싸우러 온 것 아니다. 너희의 우머리와 대화를 하러 왔다!"

"……."

오크는 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대뜸 자신들의 우두머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니.

지금껏 수많은 타 종족들을 봐 왔지만, 경험상 자신들을 마주했던 다른 종족 대부분이 칼을 뽑고 덤벼들거나 도망가기에 바빴지 누구도 대화를 시도하려 한 적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듣는 제안에 오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둔한 머리를 굴리려는 찰나, 인간이 재차 소릴 질렀다.

"이봐!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크는 기본적으로 지능이 살짝 딸리는 종족이었다.

생각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개체 수는 적은 편에 속했다.

물론 보초를 서던 이 오크는 그 적은 편에 속하진 않았다.

그때였다. 조금 전 소리치던 인간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다시 입을 뗐다.

"내 듣기론 너희 오크들은 두려움이란 모르는 상남자라고 들었다. 자신 있다면 응당 우두머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나의 제안을 받아다오!"

"꾸!?"

머릴 굴리느라 듣지도 못하고 대답할 새도 없던 오크가 ‘상남자’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후웅!

오크가 콧김을 훅 하고 뿜으며 가슴을 당당히 폈다.

"맞다. 우리 오크들. 가히 사내답다. 인간의 당돌한 제안 받아들인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

오크의 대답을 듣던 인간은 일순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저들의 우두머리와 대화를 하기까지 상당한 곤욕을 치를 것으로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 탓이었다.

그때였다. 경계 탑 위에서 보초를 서던 오크가 성문 안쪽 밑에 있던 또 다른 오크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명을 하달받은 오크가 고갤 끄덕이며 후다닥 우두머리가 있는 성으로 달려갔다.

워낙 성 자체가 넓다 보니, 우두머리에게 이를 고하고 허락이 구해지는 데까지는 상당 시간이 걸렸다.

잠시 뒤, 성으로 내달렸던 오크가 허겁지겁 경계 탑 인근까지 다시 달려왔다.

달려온 오크가 상남자답게 숨 한번 헐떡거리지 않고는 고갤 끄덕였다.

방문자를 들이라는 우두머리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보초를 서던 오크가 재차 전방의 인간을 향해 소리쳤다.

"인간. 우두머리의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오도록!"

쿠쿠궁.

오크의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성문이 웅장한 소릴 내며 열렸다.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오크들의 영역 안에 위풍당당이 들어선 이.

다른 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이 겁 없는 인간 상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이든과 오크 우두머리.

가히 사내 중의 사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대화가 성사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

이든과 레온하르트의 예상대로 과거 드워프 왕국이었던 곳에 자리한 ‘쿠훌락’ 오크의 영역 안에는 정말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크들이 있었다.

영역 안에 들어선 이든은 곧바로 기감으로 천라지망을 펼쳐 이곳에 주거를 이루고 있는 오크들의 수를 훑었다.

느껴지는 기척의 수가 일만이 훌쩍 넘는다.

가히 하나의 문명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이만큼의 규모에 달하는 문명을 이루고 살았음에도 지금껏 다른 종족 이방인을 들였던 적은 한 번도 없는 모양이었다.

사방에 오크들이 수군거리며 인간인 이든을 향해 경계의 시선을 쏟아 냈다.

그 이목에 앞장서 안내하던 오크가 입을 뗐다.

"우리. 이방인 들인 것은 처음이다. 우리의 우두머리 그대의 용명함과 신사다움에 감동했다. 그래서 들이라 허락 떨어졌다."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맙다. 나. 좋게 봐 주니 감동했다. 인간 대표로 감사의 말 전한다."

듣던 오크가 고갤 갸웃거렸다.

"말투. 갑자기 왜 그런가. 굳이 우릴 따라 할 필요 없다."

"나. 가히 상남자 오크 말투 따라 한다. 마음에 든다."

"후웅!"

듣던 오크가 일순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콧김을 쭉 뽑았다.

놈이 재차 당당히 가슴을 폈다.

장난으로 무심코 던진 말이건만, 이든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 인간 마음에 든다. 너 뭘 좀 안다."

"고맙다. 후웅!"

"끌끌."

이든이 이번엔 콧김까지 쭈욱 뽑아내자 앞서가던 오크가 생긴 것답지 않게 헤벌쭉 웃어 댔다.

놈이 보인 반응에 이든이 낄낄 웃었다.

‘이놈들 말투 재밌네.’

그때, 한참을 기분 좋게 웃으며 앞서가던 오크가 무심코 이든을 향해 뒤돌아봤다.

오크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인간. 근데 내내 눈을 감고 있다. 왜 눈을 뜨지 않는가."

"앞을 보지 못한다."

"대단하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당당히 걷는 그 모습. 가히 상남자 답다."

"고맙다."

"별말씀. 우리 오크 전사들. 종족을 떠나 사내다운 이 존중한다. 나. 인간 존중한다."

오크의 반응에 연신 재밌다는 듯 웃기 바쁘던 이든의 얼굴이 일순 진중해졌다.

걸으며 막상 대화를 나눠 보니, 오크도 나름 정감 가는 놈들이었다.

이런 놈들을 드워프를 위해 내쫓는다는 핑계로 자칫 학살이라도 벌였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찔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잡이 오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오크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성채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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