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성채 앞까지 안내한 오크가 뒤돌아 이든에게 말을 건넸다.
"내 안내는 여기까지. 우두머리가 인간 기다린다. 좋은 대화 되길 바란다."
이든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고맙다. 나. 안내해 준 상남자 오크 이름 알고 싶다."
"내 이름. 쿠오락. 인간 이름은 뭔가."
"내 이름. 이든."
쿠오락이 퉁퉁 소릴 내며 한 손으로 가슴을 쳐 댔다.
오크 특유의 인사법이었다.
"반가웠다. 상남자 이든.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그래."
쿠오락이 재차 보초를 서기 위해 걸어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사이, 이든은 인근에서 보초를 서던 정예 오크 전사의 안내를 받으며 성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드워프의 손길이 닿았던 곳이어서 그럴까. 오랫동안 제대로 된 관리가 안 된 것치곤 외곽부터 내부까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생각이 들 만큼 성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든에게 있어 성이 화려하고 말고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넓은 성채 내부를 걷던 중 이든의 걸음이 별안간 멈췄다.
그의 기감이 성채 끄트머리 단상 위에 있는 중앙 의자 쪽을 향했다.
거기엔 거대한 존재감을 발산해 대는 오크가 이든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단지 기감으로 느껴지는 존재감만으로도 자신이 이들 오크의 우두머리임을 알리는 기막힌 존재감이었다.
한참이나 이든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오크 우두머리가 무겁던 입을 뗐다.
"나. 이들의 위대한 우두머리 쿠훌락. 인간의 용맹한 요구를 받고 이곳에서 기다렸다. 용건이 뭔가."
쿠훌락의 물음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과연 상남자랄까.
듣던 이든 역시 당당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내 이름은 이든. 그대들에게 요구한다. 성 내놔라."
"……!"
당당한 것을 넘어서 겁 없는 요구에 쿠훌락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주변에 우두머리를 호위하던 정예 오크들 역시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쿠훌락이 인상을 쓰며 재차 물었다.
"인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라. 그리고 말투 거슬린다. 우리 말투 따라 할 필요 없다."
이든이 아쉬운 듯 입을 다셨다.
나름 오크 말투에 적응해 가며 재미를 느끼던 중이었건만, 우두머리 앞에서까지 할 짓은 아니었나 보다.
이든이 평소대로 말투를 고치며 재차 입을 뗐다.
"난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이든 이라고 한다. 나의 친구 드워프족의 부탁을 받고 그대들에게 정당히 요구하는 바이다. 성을 본래 주인인 드워프들에게 돌려줬으면 한다."
"……."
쿠훌락이 조금 전보다 더욱 얼굴를 구겼다.
재차 물었으나, 역시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 것은 매한가지라는 반응이다.
이든의 대답을 듣던 쿠훌락이 일순 섬뜩한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인간. 그대는 용맹한 것을 넘어 무식하다. 갑자기 성을 내놓으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허…."
살다 살다 오크에게 무식하다는 소리까지 듣는 날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걸까.
이든 역시 당혹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사이, 쿠훌락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 요구. 정당하지 못하다."
"…정당하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이 땅에 솟아 있는 성. 과거 드워프들은 비겁하게 이곳을 버리고 도망쳤다. 지키지 못했다. 하나, 우린 다르다. 우리가 대신 이곳을 지켰고, 우리가 대신 피 흘렸다. 우린 정당한 값을 지불했다. 이의 있나!"
"……."
어수룩한 말투지만, 나오는 말은 제법 논리정연했다.
오크 우두머리의 주장은 제법 타당했다.
드워프들은 타 종족들의 침략을 피해 수백 년간 이 자릴 비워 뒀다.
말이 좋아 수백 년 비워 둔 것이지, 사실상 버린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떠돌던 오크들이 이곳을 터전 삼아 수백 년 동안 지켜 낸 것이다.
사실상 오크들이 이곳의 주인이라 우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든 역시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만은 없었다.
후에 있을 데스 스타와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선 드워프들의 도움이 절실했고,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이곳의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든이 물었다.
"우리 레온하르트 영지는 드워프와 동맹 관계에 있다. 그리고 우린 이곳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대들 역시 이곳의 자원이 필요한가?"
쿠훌락이 고갤 저었다.
"자원 같은 것 모른다. 우린 터전이 필요할 뿐. 이곳은 우리 터전으로 안성맞춤이다."
이든의 예상대로였다. 오크들은 이곳에 무슨 자원이 있건 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냥 그럴듯한 터전이 필요했던 것 뿐이었다.
이든이 쿠훌락에게 한 가지 제안했다.
"그대들에게 그럴듯한 터전을 제공해 준다면 이곳에서 떠나 주겠는가?"
"불가하다."
"어째서지?"
"우리 이곳에 뿌리내린 지 이백 년 훌쩍 넘었다. 이곳은 우리의 역사다. 우리의 역사. 버리고 갈 수 없다. 이곳이 필요하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 방법이 뭐지?"
"우릴 쓰러뜨려라. 우리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라. 그래야만 이 땅 가질 수 있다. 그전에는 절대 못 가진다."
"허…."
이든이 재차 헛바람을 삼켰다.
무분별한 학살을 피하고자 대화를 시도했건만.
정 이 땅을 갖고 싶다면 차라리 싸워서 이 땅을 쟁취하라니.
과연 상남자다운 종족의 상남자다운 방식이었다.
물론 이든 입장에서도 이곳을 되찾는 데 있어 쿠훌락의 제안이 좀 더 쉬운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나, 이든은 결코 그의 제안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전까지 만나 온 오크와 다르게 이들이 상당히 마음에 든 상태였다. 웬만하면 대화로 이 난관을 타개하고 싶었다.
"쿠훌락, 미안하지만 난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겁이 나서 그런가."
"겁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난 그대들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대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 또한 있다. 그래서 되도록 대화로 이 문제를 풀고 싶다."
이든의 대답을 듣던 쿠훌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크들은 지금껏 다른 종족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 때문에 수없이도 많은 피를 흘려 왔다.
한데, 눈앞의 인간이 자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말한 것이다.
난생처음 듣는 그 말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쿠훌락이 고갤 저었다.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그대의 제안 받아들인다. 하나, 이 땅을 넘겨주는 일은 없다. 우리의 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피 흘려 싸우는 것뿐이다."
"……."
이든이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오크들은 가히 상남자지만, 고집불통의 상남자였다.
쉬이 대화로 설득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이 고집불통 상남자들을 어찌 구슬려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때였다.
뿌우우우우.
일순 성채 밖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열려 있던 성채 문을 통해 한 오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밖에서 보초를 서던 오크 전사 중 하나였다.
오크 전사가 쿠훌락에게 보고하듯 소리쳤다.
"우두머리! 큰일 났다!"
"무슨 일인가!"
"적들 쳐들어왔다! 대쿨락 부족이다!"
"대쿨락! 후웅!"
쿠훌락이 콧김을 뿜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쿠훌락이 일어서자 옆에 있던 정예 오크가 그에게 거대한 태도를 건넸다.
쿠훌락이 태도를 받아 든 채로 성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쿠훌락의 전사들이여. 대쿨락에게 맞서 싸우자!"
"크오오오오!!!"
쿠훌락의 외침에 오크 전사들이 성채가 울리도록 괴성을 질러 대더니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쿠훌락 역시 그들을 따라 걸음 옮기려던 그때였다.
쿠훌락이 도중에 멈추더니 이든의 옆에 섰다.
"인간.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다 했다. 우린 친구를 지킨다. 대쿨락 부족 위험한 족속들이다. 친구는 성안에 숨어 있어라.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준다!"
"……."
쿠훌락은 그렇게 이든을 안심시킨 뒤, 먼저 나선 부하들을 따라 재차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든은 난데없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성 밖까지 천라지망을 넓힌 뒤 기감으로 사방을 훑었다.
그리고 조금 전 보고하던 오크의 말대로 수많은 무리의 무언가가 이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에워싼 무언가에선 짙은 살기까지 느껴지며, 이곳에 오크들과 대치 중인 듯 보였다.
일촉즉발의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 이든은 쿠훌락이 사라진 방향으로 곧바로 신법을 밟았다.
대체 무슨 내막인가 싶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
쿠훌락 부족의 우두머리 오크 쿠훌락은 경계 탑 위에 올라가 성벽 너머 이곳을 에워싼 무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치 중인 기세로 이곳을 에워싼 무리는 다름 아닌 같은 오크인 대쿨락 부족이었다.
하나, 같은 오크 종족이라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색이었다.
쿠훌락 부족 오크가 초록색 피부를 하고 있다면, 대치 중인 대쿨락 부족 오크들은 보랏빛의 피부를 하고 있었다.
대쿨락 부족을 바라보던 쿠훌락의 얼굴은 깊게 새겨진 주름과 함께 잔뜩 구겨져 있었다.
쿠훌락이 성벽 너머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대쿨락!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자 잠시 뒤. 대쿨락 부족 무리 중앙에서 유독 거구의 덩치를 자랑하는 보랏빛 피부의 오크가 어슬렁 걸어 나왔다.
대쿨락 부족의 우두머리 대쿨락이 쿠훌락을 향해 시선을 고정을 한 채 소리쳤다.
"쿠훌락, 생각은 바뀌었나!"
"나. 생각 같은 거 안 한다! 대답은 한결같다. 나. 그대의 주인 밑으로 들어갈 생각 결코 없다!"
"어리석은 쿠훌락. 우리 주인님은 결코 인내심이 많지 않다. 우리의 제안 오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전쟁뿐!"
"나. 쿠훌락. 그대들 주인 밑에 들어갈지언정 차라리 전쟁을 택하겠다!"
"정녕 피를 보고 싶은가!"
쿠훌락이 가슴을 당당히 펴며 콧김을 뿜었다.
"나 자랑스런 쿠훌락 부족의 오크다. 피 흘리는 것 두렵지 않다."
"멍청한 쿠훌락."
"대쿨락. 그대야말로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비겁하다! 어찌 오크로 태어나 남의 밑에 들어가는가!"
"쿠훌락. 말조심해라! 나의 주인 데스 스타. 위대한 드래곤 종족이다. 곧 그분께서 세상에 다시 나오시면 이 세상 온통 불바다 된다. 나는 내 부족을 지키기 위해 그분을 따르기로 맹세했다. 쿠훌락 너도 너의 부족을 지키고 싶지 않은가!"
"쿠훌락의 전사들. 결코, 죽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의 주인이 드래곤이든 뭐든 간에 상관없다. 우린 그저 맞서 싸울 뿐이다!"
"멍청한 쿠훌락!"
"더 멍청한 대쿨락!"
생각 외로 당당한 쿠훌락의 모습에 대쿨락이 잔뜩 인상을 썼다.
더는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여긴 걸까. 대쿨락이 쩌렁쩌렁 외쳤다.
"데스 스타의 하수인이자, 대쿨락 부족! 저 어리석은 쿠훌락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라!!!"
"크오오오오!!!"
대쿨락의 외침에 그의 부족들이 대답하듯 함성을 질러 댔다.
잠시 뒤.
뿌우우우우우우.
대쿨락 부족 진영에서 재차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대쿨락 부족의 오크들이 쿠훌락 부족의 성을 향해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거뭇한 무언가가 쿠훌락 부족 머리 위를 섬전처럼 지나갔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쿨락 부족 무리 중앙이 난데없는 거대한 폭음과 폭발했다.
대쿨락이 화들짝 놀라며 폭발이 인 곳을 향해 고갤 홱 돌렸다.
쿠우우우우.
폭발의 여파는 상당했다.
폭발이 인 곳을 중심으로 반경 십장 거리 이상이 거대한 원형으로 음푹 패였다.
폭발의 근원지인 원형 안에 있던 오크들은 온몸이 짜부라지고 터진 채 본래 형태가 어땠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모습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스스스.
폭발로 비산했던 흙먼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걷히자 원형 중앙에 한 인형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쿨락이 그 인형을 향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네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흙먼지 속, 원형의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이든이 대쿨락 진영 한가운데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듯 웃으며 입을 뗐다.
"나. 상남자 이든. 상남자 쿠훌락 부족의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