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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207/250)

207화.

두 맹수의 영역 싸움을 보는 듯했던 쿠훌락과 대쿨락의 살벌했던 싸움이 끝나고, 일순 전쟁터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

패배한 대쿨락 진영의 오크들과 승리한 쿠훌락 진영의 오크들마저 숨죽이며 말을 아끼던 그 순간.

처억.

쿠훌락이 태도를 쥔 한 손을 높게 들어 양 진영의 오크들을 향해 외쳤다.

"크오오오오(내가 이겼다)!!!"

쿠훌락의 외침을 시작으로.

크오오오오오오!!!

쿠훌락 진영의 오크들 역시 우머리의 승리를 축하하는 고함을 질렀다.

축제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쿠훌락 진영과는 다르게 대쿨락 진영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그때.

철컹. 철컹.

대쿨락의 오크들이 일순 쥐었던 무기를 땅바닥에 던지며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

쿠훌락은 말없이 그런 대쿨락 진영의 오크들을 쭉 훑다가 무겁던 입을 뗐다.

"나. 쿠훌락. 대쿨락 오크들 용서한다. 나 쿠훌락. 대쿨락 오크들 원한다면 가족으로 받아 준다!"

우두머리의 곁으로 곧장 따라갈 줄 알았던 대쿨락의 오크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쿠훌락의 포용력에 감탄한 것이다.

과연 상남자 쿠훌락이었다.

그때였다.

벌떡.

대쿨락 진영에서 무릎 꿇고 있던 한 오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소리가 울리도록 쳐 대며 외쳤다.

"쿠훌락 족장에게 영광을!"

그 선창에 남은 대쿨락의 오크들이 따라 외쳤다.

쿠훌락 족장에게 영광을!!!

조금 전, 일어섰던 오크가 다시 외쳤다.

"쿠훌락 족장에게 복종을!"

"쿠훌락 족장에게 복종을!!!"

복종을 맹세하는 외침과 함께 대쿨락의 오크들이 일제히 쿠훌락을 향해 고갤 푹 숙였다.

쿠훌락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고갤 주억거렸다.

그렇게 상남자들 간의 의식이 끝이 날 무렵. 쿠훌락의 시선이 이번엔 이든을 향했다.

쿠훌락이 이든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 쿠훌락. 먼저 용기 있게 나서 준 나의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고맙다."

이든이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별말씀을. 친구끼리 좋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니면 뭐겠나.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 맞나?"

이든이 조금 전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던 행위가 맞는지 묻자, 쿠훌락이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맞다. 그것이 우리 오크의 인사다."

확인을 마친 이든이 재차 가슴을 한 손으로 두드렸다.

"아무튼, 승리를 축하한다. 쿠훌락."

"후웅!"

쿠훌락이 당당히 가슴을 펴며 콧김을 쭉 뽑아냈다.

"후웅!"

이든도 따라서 콧김을 뽑아냈다.

도중에 콧물이 나올 뻔하자 이든이 황급히 빨아들였다.

그 모습에 쿠훌락이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꾸꾸꾸꾸!!!"

이렇게 쿠훌락 부족은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

쿠훌락은 승리했지만, 아직 모든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과거 드워프족의 왕국이었던 이곳을 놓고 쿠훌락과 이든의 한판 승부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

쿠훌락의 시선이 앞에 마주 앉은 이든을 향했다.

이든을 바라보는 쿠훌락의 눈빛은 부동심을 연상시켰다.

쿠훌락이 말없이 이든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

이어서 쿠훌락이 자신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쿠훌락이 술잔을 들었다.

"마셔라. 단 각오해야 한다. 오크족의 술은 꽤 독하다."

싸움과 술이라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상남자가 이든이다.

이든이 피식 웃으며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넘겼다.

‘크, 이거 세네?’

술을 한 번에 넘겼던 이든은 내심 화들짝 놀랐다.

쿠훌락의 말대로 술이 상당히 독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남자답게 내색하진 않았다.

반면에 그런 이든을 바라보던 쿠훌락의 표정은 묘했다.

인간인 이든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이 따라 준 술을 훌훌 털어 넘긴 것에 감동한 것이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혹여 술에 독이라도 타지 않았을까. 의심했을 터.

비단 인간뿐이랴.

오크인 그 자신 역시 인간이 자신에게 술을 따라 준다면 덜컥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하나, 쿠훌락이 마주한 이든은 달랐다. 그는 쿠훌락에게 의심 한 점 없던 것이다.

넋을 놓다시피 이든을 바라보던 쿠훌락이 잔에 채워진 술을 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넘겼다.

쿠훌락이 ‘크’ 소릴 내며 빈 잔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렇게 서로의 잔에 술이 채워지고 비워지길 몇 차례 간 반복하고 나서야 쿠훌락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나. 쿠훌락. 앞에 있는 인간 존중한다. 보기 드문 인간 상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든은 내 친구다."

"고맙다."

"하나, 친구는 친구일 뿐. 이 땅과 관련된 것은 친구와 별개의 문제다."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공감한다."

"이 땅. 넓다. 이 성. 견고하다. 우린 이곳 마음에 든다. 결코 드워프에게 다시 내줄 수 없다."

"……."

쿠할락이 눈빛만큼이나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든이 이놈을 어찌 구슬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쿠훌락이 재차 입을 뗐다.

"하나."

"……?"

"친구의 말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이 땅. 드워프에게 되돌려 주려는 이유. 뭔가?"

"데스 스타에게 맞서기 위해서다."

"데스 스타."

데스 스타의 이름이 거론되자 쿠훌락의 눈이 일순 빛을 냈다.

"데스 스타에게 맞서는 것이 이 땅 드워프에게 주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데스 스타와 맞서 싸울 병사들에게 입힐 강한 갑옷과 강한 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드워프들이 만들어 주기로 약조했지. 하나, 그것을 만들 미스릴이라는 자원이 부족하다. 이곳의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지. 해서 이렇게 내가 온 것이다. 자네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쿠훌락이 고갤 끄덕였다.

이든이 댄 이유가 타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여전했다.

"나. 쿠훌락도 데스 스타 증오한다. 어둠의 힘으로 오크를 유혹해서 서로 싸움 부추긴다. 하나, 겁나지는 않는다. 또 다른 오크가 나에게 대쿨락과 같은 제안을 한다면 또 맞서면 그만이다. 데스 스타 역시 마찬가지. 데스 스타 쳐들어오면 맞서 싸운다. 나. 쿠훌락. 데스 스타 겁나지 않는다."

쿠훌락은 상남자지만, 역시나 고집불통이었다.

이든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도무지 이 땅을 드워프에게 넘길 생각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데스 스타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를 모르는 듯이 말이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든 역시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든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쿠훌락."

"말하라."

"정말 홀로 데스 스타를 막아 낼 수 있다 생각하나?"

"나. 쿠훌락. 용감하다. 승리의 신. 용감한 자에게 미소 짓는다. 오늘도 그랬다. 그래서 승리했다. 데스 스타도 그렇게 이겨 내 보일 것이다."

"상대는 드래곤이다."

"상관치 않는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 셈이냐?"

"…꾸!?"

쿠훌락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든이 재차 말을 이었다.

"쿠훌락, 넌 강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도 네가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알 정도다. 그리고 너가 데스 스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상남자기 때문이다. 하나, 쿠훌락, 스스로 망각하지 마라. 넌 상남자이기 이전에 부족을 이끄는 우두머리다. 만약 너가 데스 스타에게 패배한다면 남은 부하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쿠훌락이 담담히 말했다.

"나. 쿠훌락이 죽는다면. 내 부하들 데스 스타와 맞서 싸운다. 나의 복수를 위해."

"그다음엔?"

"……."

쿠훌락은 대답이 없었다.

데스 스타와 맞서 싸운 자신의 부하들이 어찌 될지, 아무리 아둔한 오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쿠훌락 부족의 오크들은 용감무쌍하지만, 데스 스타를 상대로 이겨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쿠훌락이 대답이 없자, 이든이 대신 답을 내놓았다.

"너의 수하들 역시 데스 스타에게 죽겠지. 허무하리만큼."

"하지만. 용감히 맞서 싸운다는 사실엔 변함없다. 내 부하들. 데스 스타에게 무릎 꿇느니, 용감한 죽음 택한다!"

쾅!

이든의 주먹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탁자가 휘어질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이든이 이를 갈며 말했다.

"예정된 죽음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무슨 용기냐. 쿠훌락!"

"그것이 오크다!"

"넌 오크이기 이전에 이들의 우두머리다! 너의 생각만으로 부하들의 등을 사지로 떠밀지 마라! 네놈은 부하들의 목숨이 그토록 하찮은 것이냐!"

"……!"

쿠훌락이 눈을 부릅떴다.

눈알엔 핏발이 가득하게 섰고, 가슴엔 용암 들끓듯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든의 말엔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쿠훌락이 씩씩거리며 화를 삼키는 사이, 이든이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쿠훌락."

"……."

"3년 전에도 데스 스타가 이 땅에 현신한 적이 있었다."

"……."

"그때의 나도 너처럼 데스 스타에게 맞서 싸웠지. 그때의 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어떻게든 놈을 막겠다고, 어떻게든 나의 동료들을 지켜 보겠다고 발악을 했었다."

"……."

"하지만 난 놈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물론 데스 스타 역시 한순간의 방심으로 치명상을 입었기에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말 그대로 물러나게만 했을 뿐. 난…. 그때 나와 함께 싸워 준 동료들을 지켜 내지 못했다."

"……."

"쿠훌락."

"말하라."

"…동료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어떤 상처보다 아프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리고 난, 내 친구가 그때의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

진솔한 얘길 꺼냈던 이든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길게 내쉬었다.

그가 쿠훌락이 한쪽에 두었던 술병을 들고는 빈 잔에 술을 콸콸 쏟아 내듯 따랐다.

그러곤 한 번에 들이켰다.

속이 뜨거워질 정도의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이든은 오히려 그것이 개운하다는 듯, 얘길 꺼내던 조금 전보다 한결 편해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 바람이 불어오는 성의 입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더는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바깥을 향해 걷던 이든의 걸음이 불현듯 멈췄다.

쿠훌락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쿠훌락이 뒤돌아 걷던 이든의 등에 대고 물었다.

"…드워프에게 이 땅을 돌려주면. 데스 스타를 막아 낼 수 있는가."

"그건 나도 몰라.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 단, 이것만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다."

"……."

"지금은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쳐야 할 때다. 그래야만 쿠훌락 너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수하들도, 그리고 이 드넓은 대륙도 지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지겠지."

"……."

"진정한 상남자는 때론 대의를 위해 자신의 고집도 꺾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부디 너의 부하들을 생각하며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이든이 재차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쿠훌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겠다."

"…응?"

"이 땅. 주인에게 돌려준다."

"정말?"

"단. 조건 있다."

"조건?"

"우리도 데스 스타와 맞서 싸운다. 너희들의 싸움에 우리도 끼고싶다. 가능한가?"

‘가능하냐고?’ 두말하면 입 아팠다.

이든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상남자 쿠훌락 부족이 우리와 뜻을 함께해 준다면 나야말로 더없이 영광이다."

"음!"

상남자와 상남자 간에 동맹이 결성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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