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50)

208화.

쿠훌락은 상남자 간의 동맹을 기념하자는 의미로 이든에게 연신 술을 권했다.

이든은 화주나 다름없는 오크의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고 결국 진탕 취했다.

쿠훌락 역시 과음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든의 주량이 생각보다 엄청 셌던 탓이었다.

다음 날, 이든은 해가 중천까지 떠서야 잠에서 깼다.

무리한 탓에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왔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이든이 가부좌를 틀고, 전신에 삼매진화를 피우듯 열기를 내뿜자 몸 안에 있던 주독이 말끔히 사라지고 숙취 역시 씻은 듯이 없어졌다.

참으로 편리한 숙취 해소법이 아닐 수가 없다.

숙취도 없앴겠다. 이든은 이곳을 떠나기 전 바람 좀 쐴 겸 바깥을 거닐었다.

바깥을 거니니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오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오크들의 우렁찬 소리가 나는 곳 인근에 멈춰 서서 한 오크를 붙잡고 물었다.

"지금 저들이 뭐 하는 거요?"

이든의 물음에 강제로 붙잡힌 오크가 답했다.

"올 한 해. 지은 농사 마무리 중이다."

"농사?"

오크는 기본적으로 잡식성이다.

이것저것 다 잘 먹는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육식이었기에 활을 잘 쏘는 오크들은 무리를 꾸려 종종 사냥을 나서 식량을 마련하곤 했다.

하나, 남다른 규모를 자랑하는 쿠훌락 부족은 식량을 마련하는 데 있어 사냥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원체 입이 많다 보니, 사냥만으로 이들의 배를 다 채우려면 주변 일대 동물들의 씨가 말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크들은 방식은 다를지언정 엘프와 마찬가지로 동식물을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자연이 있어야 자신들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많은 본인들의 입이 일대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해서 쿠훌락 부족의 오크들은 다른 종족이 그러는 것처럼 수렵과 농사를 병행했다.

드워프 왕국의 땅이 원체 넓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간 키워 온 작물을 수확하는 날이었고.

참으로 기특한 부족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크들이 한데 힘을 모아 작물을 수확하는 소리를 듣던 이든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목적지 없이 그저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이든은 계속 일대를 걸었다.

걷다 보니, 여러 소리가 한데 그의 귀에 들려왔다.

오크 아낙네(?)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

오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여러 오크가 껄껄 웃는 소리까지.

종족은 다를지언정 살아가는 모습은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간에선 오크를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한다.

이들도 이렇게 문명이라는 것을 이루고 살아가며, 다른 종족과 별다른 것 없이 살아감에도 말이다.

이든은 찰나 떠올렸다.

혹여 세상이 이들을 타 종족이 아닌, 괴물로 먼저 떠올리는 이유가 이들의 겉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물론 그는 이들의 겉모습이 어떤지는 볼 수가 없으니, 어떤 첫인상인지는 알 순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그런 것처럼 편협된 생각으로 드워프들을 위해 이들을 학살하고, 이들을 내쫓았다면, 이들의 또 다른 이면도 모른 채 이든은 후회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를 뻔한 것이다.

때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세상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크들의 삶을 피부로 느꼈던 이든이 일순 걸음 멈추었다.

슬슬 영지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내 친구 이든. 왔는가."

쿠훌락이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술이 아직 덜 깼나 보군.’

이든의 생각대로 쿠훌락은 아직까지 숙취로 고생 중이었다.

하나, 쿠훌락은 내색하지 않았다.

숙취 따위는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는 상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든을 바라보던 쿠훌락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이든은 숙취라곤 없는 말짱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쿠훌락이 물었다.

"이든. 나처럼 많이 마셨다. 한데. 숙취 전혀 없어 보인다. 술에 강한편인가?"

운기조식을 통해 숙취를 날려 버렸다곤 말하기 껄끄러웠는지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물론이다. 난 술에 매우 강한 편이지."

"대단하다. 과연. 나. 쿠훌락이 인정한 상남자다."

"…하하."

거짓말한 것이 살짝 미안해지는 그였다.

그때였다.

쿠훌락이 이든을 보더니, 자신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남아 있는 숙취를 애써 무시하곤 입을 뗐다.

"해서. 앞으로 계획은 뭔가."

쿠훌락이 묻는 계획. 다름 아닌, 자신들 부족이 터전을 잡고 살아갈 새로운 땅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이든이 찰떡같이 알아듣곤 곧장 답했다. 생각해 둔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 둔 땅이 있다."

"어딘가."

"트럼프 영지."

쿠훌락이 그곳에 관해 아는 바가 있다는 듯 되물었다.

"아슬란 제국의 트럼프 영지를 말하는 건가?"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맞다."

쿠훌락이 볼을 긁적였다.

트럼프 영지의 땅이라면 확실히 그 자신들 부족이 살아가기에 부족함 없을 크기인 것은 맞지만, 그곳은 엄연히 인간들의 영역이었다.

쿠훌락이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트럼프 영지. 인간들 영역이다. 인간. 우리 무서워한다. 인간들. 겁먹고 우리 공격할 수도 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꾸?"

"3년 전, 데스 스타가 아슬란 제국을 침공했을 때, 아슬란 제국의 몇몇 영지는 폐허가 되었다. 트럼프 영지 역시 그중 하나였지. 그 이후로 폐허가 된 땅은 인간의 발길이 끊겼다. 인간과 마찰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더는 안 해도 된다는 뜻이지."

"흠."

쿠훌락이 고갤 끄덕였다.

더는 인간들이 살지 않는 땅이라면 그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 별다른 마찰이 생기지 않으리라 판단되어서였다.

하지만 쿠훌락 생각엔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었다.

"하나."

"……?"

"인간들 살지 않는다 해도. 그 땅. 아슬란 제국 것이다. 우리가 터전을 이루면. 무단 점거한 꼴 된다. 아슬란 제국 역시 허가한 일인가."

"……."

이든은 쿠훌락의 말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수룩한 말투지만, 사용하는 단어가 상당히 고급지고, 통찰력 역시 예상외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든이 솔직하게 고갤 저었다.

쿠훌락의 말대로 아슬란 제국은 아직 이 사안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아직 모르는 일이다."

"하면. 그대의 독단인가."

"그렇다."

"그럼. 무산될 수도 있다 그 말 아닌가."

"무산되지 않을 거다."

"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들이 그 땅에 터전을 이룰 수 있도록 주장할 생각이다."

"난. 내 친구 이든. 믿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가 안 되면. 그땐 어쩔 생각인가."

"그땐."

이든이 고민도 않고 답했다.

"내 영지에서 내 영지민들과 함께 살아가자."

"…이든의 영지에?"

"그래."

"……."

"쿠훌락 부족은 내 친구이니, 영지민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쿠훌락 부족을 환영해 줄 거야."

쿠훌락은 이든의 말에 내심 감동했다.

하나, 그리한다면 이든이 곤란해진다는 것쯤은 쿠훌락 역시 알고 있었다.

쿠훌락은 말빨 좋고, 통찰력도 뛰어난 상남자지만, 친구의 곤란함을 외면할 줄 모르는 나름 세심한 상남자이기도 했다.

쿠훌락이 고갤 저었다.

"그건 안 된다. 나. 쿠훌락. 알고 있다. 그리하면 내 친구 이든. 곤란해진다. 오크 멸시받는다. 세상 오크 무서워한다. 영지민. 우리 무서워할 거다."

"……."

이든이라고 그것을 모를까.

내심 질러 본 말이긴 했지만, 그 역시 이 수많은 오크가 영지 안이나, 혹은 근처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영지민들의 반응이 어떨지 예상이 가는 바였다.

아마 두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든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직 결정 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거주지를 옮기는 일인 만큼, 걱정을 떨쳐 낸다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쿠훌락 역시 이든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맞는 말이다."

"해서 말인데."

"?"

"본격적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허가가 난다는 가정하에 나와 함께 트럼프 영지를 둘러볼 오크를 동행시켜 주었으면 하는데. 쿠훌락 자네는 바빠서 안 될 것 같고 말이야."

"맞다. 나. 바쁘다. 대쿨락 부족 애들. 이곳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가 이든 따라갈 쿠훌락 오크 붙여 주겠다."

이든이 혹시나 해 물었다.

"혹시 동행할 오크 말이야. 내가 원하는 친구로 데려가도 될까?"

"원하는 오크가 있나?"

"쿠훌락 자네와 친구가 되기 전, 먼저 이름을 주고받은 친구가 있다."

"오! 누군가. 말하라!"

"쿠오락."

***

쿠훌락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쿠오락이 곧장 짐을 챙겼다.

짐이라 해 봤자. 활과 화살 통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쿠오락이 입을 뗐다.

"준비됐다!"

쿠훌락이 고갤 끄덕였다.

"쿠오락."

"말하라. 대장."

"면밀히 살피고 오도록. 우리 부족의 앞날. 쿠오락. 너에게 달렸다."

"명심하겠다."

쿠오락의 믿음직한 대답을 들은 쿠훌락이 쿠오락을 향해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잘 다녀와라. 쿠오락."

쿠오락도 가슴을 두들기며 답했다.

"다녀오겠다."

쿠오락이 눈을 빛내며 결의를 다지는 사이, 쿠훌락의 시선이 다시 이든을 향해 옮겨졌다.

쿠훌락이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입을 뗐다.

"내 친구. 이든과의 만남. 즐거웠다."

"나 역시 용감한 쿠훌락 부족과의 만남 이색적이고 즐거웠다. 좋은 소식으로 곧 다시 보자고."

"음! 다시 보자! 잘 가라 이든!"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이든과 쿠오락의 뒤엔 쿠훌락 부족의 수많은 오크가 둘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상황이었다.

오크들이 둘을 향해 한마디씩 던졌다.

"잘가라. 인간. 친구!"

"잘 다녀와라. 쿠오락!"

이든이 피식 웃었다.

살다 살다 오크의 배웅까지 받게 될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쿠오락 역시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던 그때였다.

이든이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 허공에 대고 용언(龍言)을 중얼거린 뒤, 레온하르트의 보검을 십자 모양으로 그었다.

그 순간.

보검이 그어진 자리로 허공이 베인 듯 갈라지며 일그러지더니, 트럼프 영지로 곧장 통하는 이공간 문이 열렸다.

이든이 쿠오락에게 말했다.

"자, 들어가자고."

"음!"

쿠오락이 고갤 끄덕이고 이든과 함께 이공간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쿠훌락이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두드리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쿵쿵!

"우리의 친구. 이든에게 영광을!!!"

쿠훌락의 선창에 모인 오크들이 따라 외쳤다.

쿵쿵!

"우리의 친구. 이든에게 영광을!!!"

쿵쿵!

"우리의 동료. 쿠오락에게 행운이 있길!"

쿵쿵!

"우리의 동료. 쿠오락에게 행운이 있길!"

오크들의 열렬한 배웅에 이든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쿠훌락을 향해 가슴을 두들겼다.

툭툭.

"나 역시 쿠훌락 부족과 힘을 합쳐 함께 싸우게 돼서 영광이다. 쿠훌락. 다시 보자고."

"후웅!!!"

쿠훌락이 콧김을 쭈욱 뽑아내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이든이 재차 이공간 안쪽으로 걸음을 뗐다.

쿠오락도 이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공간의 문이 닫히자. 이든과 쿠오락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크들이 그 신기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쿠훌락은 이든과 쿠오락이 떠난 빈자릴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크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오는가.’

빈자릴 바라보던 쿠훌락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그리며 희망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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