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폐허가 된 트럼프 영지 한가운데. 인적이라곤 없던 이곳에 난데없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보니 어때?"
묻는 이는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이든의 물음에 트럼프 영지를 쭈욱 둘러보던 쿠오락이 고갤 저었다.
"넓고 좋긴 하지만. 아쉽다. 너무 평지다."
"…그, 그래?"
"우리 쿠훌락 오크. 건물 짓는 것 어설프다. 그래서 수성에 약하다. 하지만 지금 사는 드워프 성은 그 단점 보완해 준다. 그래서 거기 좋았다. 하지만. 여긴 허허벌판이다."
쿠오락은 깐깐한 상남자였다.
그의 대장인 쿠훌락이 면밀히 사전 조사하라 했던 말도 있고, 부족들이 앞으로 살게 될 땅을 고르는 일이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살필 줄은 이든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난감하게 됐군. 진짜 레온하르트 영지에 데리고 들어가서 살아야 하나….’
이든이 볼을 긁적이며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쿠오락이 중얼거렸다.
"허허벌판보단. 숲속 깊은 곳이 좋다."
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숲속?"
"그렇다. 우리 오크. 숲속 좋아한다. 다만 숲이 너무 울창하진 않았으면 한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고루 섞인 땅이면 더 좋을 것 같다. 햇빛도 잘 들었으면 좋겠고. 근처에 물이 있으면 더더욱 좋다."
‘…진짜 깐깐하네.’ 정말 깐깐한 쿠오락이었지만, 이든은 쿠오락의 생각에 부합되는 곳을 이미 떠올린 상태였다.
이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쿠오락, 이 근처에 네가 말한 것과 부합되는 곳이 한 곳 있다."
쿠오락이 반색하며 물었다.
"오! 거기가 어딘가!"
"산적 왕이 살던 곳."
"산적 왕?"
이든이 말한 곳은 다름 아닌 얼마 전,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왔던 산적 왕 오윈과 그의 산하의 산채가 있던 영토였다.
트럼프 성이 존재했던 폐허가 된 영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공간으로 이동하면 거리가 얼마나 됐든 코앞이나 다름없는 금방이었다.
이든은 곧장 용언과 함께 허공에 검을 휘둘러 이공간을 열었다.
휙휙.
이든과 쿠오락이 서 있던 자리 정면에 허공에 금이 가듯 십자로 그어지며, 산채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든이 먼저 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쿠오락도 이젠 익숙한 듯 이공간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이공간에서 나온 쿠오락은 지금은 사람이 없어 비어 있는 산채들을 쭉 둘러보았다.
쿠오락이 산채 하나를 다 둘러보고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여기 산채.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무슨 일 있었나?"
과연 쿠오락은 깐깐한 상남자답게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 줬다.
이든이 아는 대로 설명했다.
"여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적들이 세력을 이루며 살아가던 곳이었다."
"산적들. 인간 중에 가장 성가시다. 우리 오크와 습성 비슷하기 때문에 동선이 겹친다. 해서 자주 싸운다. 그런데 여기 있던 산적들 지금 어딨나?"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포로가 되었지."
"전쟁이 있던 건가?"
전쟁이라면 전쟁일 것이다.
물론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전쟁이긴 했지만.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셈이지. 얼마 전에 내가 이곳에 병사들을 이끌고 산적들을 토벌했었거든."
"그런 일이 있었군."
"당시에 토벌을 마치고, 산채를 태울까 했지만, 그냥 내버려 뒀었다. 산채가 한두 개도 아니고, 자칫 큰 산불로 번질까 봐. 자제했지."
"이것과 같은 산채가 얼마나 있지."
"글쎄 내 기억으론 사오십 개는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든이 말끝을 흐렸다.
당시 레온하르트 토벌대의 전략은 적들의 무방비를 이용하기 위해 속전속결로 대 산채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때문에 빠르게 이동하는 족족 산채가 보일 때마다 정리를 해 댔던 터라 이곳에 산채가 몇 개나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대략 사오십 개 언저리쯤 있던 것은 확실하다.
예상보다 많은 산채의 수에 쿠오락이 놀란 얼굴을 했다.
"굉장히 많군!"
쿠오락의 시선이 재차 산채들을 쭉 훑다시피 했다.
"근처에 숲이 둘러싸고 있다. 농사지을 수 있는 고르고 넓은 토지 역시 충분하다. 하나의 산채에 여유 있게 오크 백 명 수용 가능. 조금 무리해서 넣으면 이백 명까지도 수용 가능. 이러한 산채가 최대 오십 개까지 있다는 가정하에 만 명의 쿠훌락 부족 수용 가능하다."
"……."
이든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쿠오락을 보며 일순 정색했다.
‘이 새끼, 정말 오크 맞아?’
하는 말만 들어 보면 영락없는 장사꾼 같아 보였지만 아무튼, 쿠오락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이든이 일순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근데, 지금은 쿠훌락 부족만 있는 게 아니잖아. 대쿨락 부족 오크들은 어찌할 생각이야. 걔네들도 숫자가 제법 되지 않아?"
쿠오락이 고갤 저었다.
"우리 오크 손길 세심하진 않지만, 이 정도 건물쯤은 충분히 지을 수 있다. 대쿨락이었던 오크들한테 건물 지으라 시킬 거다. 놈들 괘씸해서 그 정도 강제 노동은 정당하다!"
"그, 그래…?"
생각보다 뒤끝 있는 쿠오락의 모습에 이든이 볼을 긁적이다가 확인하듯 물었다.
"아무튼, 쿠오락 너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그거지?"
쿠오락이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 훌륭하다."
만약 쿠오락이 마음에 들어 하던 곳이 트럼프 영주의 성이 자리했던 조금 전 영토였다면, 아무리 이든이 우긴다 한들 황궁 내에서 오크의 거주 가능성을 두고 반대가 적잖았을 것이다.
하나, 이곳은 조금 달랐다.
아예 반대가 없지야 않겠지만, 트럼프 영지의 영토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황궁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산적들이 득실거리는 것보다 차라리 오크가 있는 것이 낫다는 반응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제 남은 일은 황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었다.
‘근데… 이걸 어찌 알린다.’
이 사안에 대해서 보다 확실하게 얘기를 나누려면 쿠오락이 함께 자리한 삼자대면만 한 것이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쿠오락을 황궁에 데려갈 순 없었다.
쿠오락에게 있어 황궁은 사지(死地)였다.
황궁에 오크가 나타났다는 소란이 일어나는 순간, 어찌 되겠는가.
아마 칼부터 뽑고 달려들 것이다.
제아무리 이든이 옆에 있다지만,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면 전서구?
이것 또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드워프들에게 서둘러 고향을 되찾아 주고, 오크들의 거주지 이동까지 도와주려면 한시가 바쁜데, 세월아 네월아 하며 서신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가.’
바로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을 영지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공간으로.
이든은 내심 레온하르트에게 이공간을 배워 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이든이 쿠오락을 향해 입을 뗐다.
"일단 가자!"
쿠오락이 고갤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어딜 말인가."
"내 영지."
"이든의 영지?"
"그래, 구경도 시켜 줄 겸 그리고 대화도 나눌 겸?"
"대화?"
"일단 가 보면 알어."
이든이 곧장 허공에 십자로 검을 그었다.
곧이어 레온하르트 영지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이든이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오락이 먼저 들어갔다간 무슨 난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섰던 이든이 음성에 내공을 잔뜩 담아 레온하르트 영지민들이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다들 주목!!!"
일하던 영지민들과 드워프들, 수련 중이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이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겠다. 다들 열렬히 환영해 주도록!!!"
이든의 외침을 듣던 영지민들이 일제히 고갤 갸웃거렸다.
‘새로운 친구…?’
그리고 잠시 뒤.
이든이 이공간 반대쪽을 향해 손짓하자.
쿠오락이 이공간 문을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쿠오락이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인간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입을 뗐다.
"꾸!"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를 알아들을 리 없던 영지민들은 난데없는 오크의 등장에 하나같이 기겁을 해 대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
황제의 집무실.
쪼르르.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에 따듯한 차가 따라졌다.
차를 다 따르던 궁녀가 고갤 꾸벅 숙여 보이고는 그 자세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황제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스테인 공작을 향해 먼저 입을 뗐다.
"병사들의 훈련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칼스테인 공작이 찻잔에서 입을 떼곤 답했다.
"급작스럽게 고되진 훈련에 처음에는 불만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나름 적응을 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칼스테인 공작님의 영지와 듀크 후작의 영지는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요 근래, 귀가 매우 간지러웠습니다. 병사들이 제 욕을 상당히 했나 봅니다."
칼스테인 공작이 피식 웃었다.
저 어린 황제가 저런 소리까지 하는 날이 오다니….
감개가 무량했던 탓이다.
칼스테인 공작이 살짝 미소 지으며 황제를 달래듯 말했다.
"병사들은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예."
황제가 고갤 주억거렸다.
하나, 입으론 알겠다고 얘길 해도,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럴까.
일전 이든이 다녀간 이후,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은 황궁을 포함해 두 영지의 병사들의 훈련량을 배로 늘렸다. 데스 스타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서 생긴 변화의 바람이었다.
훈련 또한 이전의 것은 버리고, 이든이 알려 준 훈련 방식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 훈련 강도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병사들 입장에선 봉급은 그대로인데, 훈련량은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어졌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이유라도 알았다면 죽기 살기로 훈련을 따랐을 테지만, 칼스테인 공작의 판단하에 아직 이를 알릴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덕분에 애꿎은 어린 황제만 욕을 먹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욕은 아니고, 저들끼리 떠드는 얘기로 말이다.
칼스테인이 재차 입을 뗐다.
"병사들의 불만은 잠시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데스 스타가 언제고 제국을 재침공할 수 있단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칼스테인 공작이 그런 것처럼, 어린 황제의 맑았던 눈망울 역시 일순 결의로 빛났다.
3년 전.
벨라트릭스 왕국의 침공은 죽음의 드래곤 데스 스타의 계획하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때, 아슬란 제국은 듀란드 공작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힘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언데드 군단의 침공으로 지금도 쉬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었다.
그때의 아픔을 다시 반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입을 뗐다.
"그땐 영문도 모르고 당하기 급급했지만, 이번엔 달라야 합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신 역시 최선을 다해 적들에게 맞서 싸우겠나이다."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각자 결의를 다지며 마음을 다잡던 그때였다.
우웅.
황제의 집무실 안에서 난데없이 십자 모양의 빛이 번쩍였다.
"누구냐!"
그 기이한 현상에 황제의 몸이 얼어붙고, 칼스테인 공작은 곧장 검을 뽑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십자 모양에 빛이 일순 개화하듯 펴지더니,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칼스테인 공작이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 영지…?"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한 인형이 그 안에서 걸어 나오자,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칼스테인 공작이 난데없이 나타난 인형을 향해 물었다.
"이든 공작,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빛 속에서 걸어 나온 이.
이든이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의 팔목을 낚아채다시피 하더니만 일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설명은 가면서 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기나 하십시오."
"어, 어어?"
워낙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터라,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 하는 사이에 이미 레온하르트 영지까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