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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210/250)

210화.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은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좀 돌릴 겸 황제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빛이 번쩍하곤 거기에서 이든이 튀어나와 ‘어디 좀 갑시다.’ 하고 끌고 가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레온하르트 영지까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조차 안 되며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 끌려오다시피 한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는 이든이 쏟아 내는 말을 듣더니만 조금 전보다 더욱 놀란 표정으로 동시에 되물었다.

"예?"

"지금, 뭐라 했소?"

이든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가 막히셨나. 별로 얘기한 것도 없구만, 다시 말씀드려요?"

"……."

"……."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인상을 팍 쓰더니만 눈으로 이리 말하는 듯했다.

‘지금 못 알아들어서 되묻는 게 아니잖아. 이 양반아.’

그 둘이 이토록 화들짝 놀란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트럼프 영지 인근에 있던 산채를 오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이든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제국의 입장에선 크게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오크라는 몬스터가 위험한 부류의 종족이라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문제들은 기승을 부리는 산적들 때문이었지 결코, 오크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오크가 그곳에 터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자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다.

이든이라고 지금 이 둘의 생각이 어떤지 모를까.

그가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을 끌고 다니는 채로 재차 입을 뗐다.

"지금 당장에는 제가 드린 말씀이 어처구니없게만 들리실 겁니다."

듣던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세차게 고갤 끄덕이며 한마디씩 던졌다.

"네. 정말요."

"너무 어처구니없이 들리오."

그들이 무어라 떠들거나 말거나 이든의 걸음은 계속 바삐 움직여 댔고, 그의 입 역시 쉬지 않고 주절댔다.

"해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시게 됐습니다. 일단 제가 왜 이런 말을 드렸는지는 당사자들에게 직접 얘길 들어 보시죠."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재차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되물었다.

"예?"

"당사자?"

당사자에게 직접 얘길 들어 보자니?

당사자가 누구겠는가.

당연히 오크지.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오크가 와 있다… 그 말이오?"

듣던 이든이 씩 웃었다.

"예. 그 외에도 다른 귀한 손님들이 자리해 계십니다."

오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인데, 오크 말고 또 누가 더 있길래 저럴까.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는 정말이지 돌아가는 상황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을 끌고 온 이든은 어느새 마을 회관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는 입을 쩍벌렸다.

황제는 뭐, 어리니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

칼스테인 공작 역시 어찌나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봤길래 하나같이 같은 반응들일까.

쓱쓱.

칼스테인 공작이 눈을 비비며 재차 확인하듯 마을 회관의 커다란 탁자를 중간에 두고 둘러앉은 인사들을 바라봤다.

한 명은 미리 얘길 들었던 대로 오크가 앉아 있었고.

"꾸?"

또 한 명은 뿔 달린 난쟁이가 앉아 있었으며.

"허허허."

또 다른 한 명은 귀가 뾰족한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앉아 있었다.

"……."

칼스테인 공작이 마른침을 삼키곤 내내 다물지 못하던 입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여기 자리하신 분들이…."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소개했다.

"한 분은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쿠훌락 오크 부족의 대표 자격으로 대리 참석한 제 친구 쿠오락이고."

"반갑다. 나. 용감한 쿠훌락 부족의 쿠오락! 이든의 친구다!"

"다른 한 분은 드워프족 전설의 대장 장인이신 몰린 님."

"만나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허허허!"

"마지막으로 엘프의 왕인 갤러하드 님이십니다."

"……."

갤러하드는 팔짱을 낀 채 가볍게 고갤 숙여 보였다.

이든이 이번엔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을 가리키며 쿠오락과 몰린, 갤러하드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인간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신 아슬란 제국의 황제 폐하와 칼스테인 공작님이십니다."

어린 황제가 넋을 놓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마주 앉은 각 종족 대표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갤 숙였다.

"아, 안녕…. 하세요."

함께 자리한 인물들이 인물인 만큼 황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는 상태였다.

칼스테인 공작은 그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지 황제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폐하.’

"……?"

‘위엄을 보이소서.’

자신들도 인간 대표로 참석한 인사들이다. 칼스테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귀가 밝은 이든이 이를 귀신같이 듣고는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폐하,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편한 동네 옆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 동네 옆집 아저씨요?

황제가 그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이든을 바라봤고.

마주 앉은 옆집 아저씨들이 ‘뭣이? 우리 보고 옆집 아저씨?’란 표정으로 이든을 노려봤다.

스스로의 대한 자부심이 강한 각 종족의 대표들이 옆집 아저씨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

일순 찾아온 정적.

보이지 않음에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 걸까. 이든이 어깰 으쓱이며 함께 자리에 앉고는 중얼거렸다.

"뭐, 어떻습니까? 압박 면접할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옆집 아저씨는 좀….’

쿠오락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압박 면접이 뭔가."

"……."

아무튼, 그렇게 각 종족 대표들의 소개가 모두 끝나고, 이든이 주변을 환기하듯 화제를 돌렸다.

"지금 당장은 어색하겠지만, 다들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 모인 우리는 공통된 적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로 자주 왕래하면서 질리도록 봐야 할 사이란 뜻이죠. 내 등을 맡기며 함께 싸워야 할 동료들이 될 테니까요."

이든이 언급한 공통된 적이란 당연코 ‘데스 스타’였다.

듣던 이들은 따로 말은 없었지만, 이든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 이든 다음으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다름 아닌 칼스테인 공작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했던 말이나 다시 합시다. 여기 자리한 그러니까…."

칼스테인 공작이 쿠오락을 바라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쿠오락이 입을 뗐다.

"나. 쿠훌락 부족 대표. 쿠오락이다."

칼스테인 공작이 이를 듣고는 고갤 숙여 보였다.

"미안합니다. 앞으론 제대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쿠훌락 부족 대표의 말씀은 트럼프 영지 인근에 있는 빈 산채들을 본인들의 거주지로 사용하고 싶다. 그 말씀입니까?"

쿠오락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다. 거기 산채들 마음에 든다. 산채 넓고. 넓은 산채 많다. 만 명의 쿠훌락 오크 수용할 수 있다."

칼슬테인 공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 만 명…. 이라 했습니까?"

쿠오락이 고갤 끄덕였다.

"산채가 수용할 수 있는 오크 수. 총 만 명. 하지만 우리 쿠훌락. 만 명 넘는다. 산채 몇 개 더 지어야 한다!"

"……."

칼스테인 공작이 식겁한 얼굴을 했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크 부족이라 해서 많아 봤자 이삼백 정도 될 줄 알았건만, 만 명이라니. 이건 규모가 흡사 하나의 대 도시 영지 수준을 방불케 하지 않는가.

다시 찾아온 정적 속.

스윽. 도르르.

칼스테인 공작의 눈알이 옆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모르쇠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칼스테인 공작이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듯 휘휘 고갤 저었다. 그가 물었다.

"만 명이 넘는 규모라면 그동안 거주하던 곳 역시 만만치 않게 넓었다는 뜻인데, 어째서 거주지를 옮기려 하는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번 질문에 답한 것은 드워프 몰린이었다.

"그게 사실…. 저희 드워프로 인해 생긴 문제입니다."

"예? 드워프분들로 인해 생긴 문제라니요?"

영문을 모르겠단 칼스테인 공작의 물음에 몰린이 답했다.

"사실 현재 쿠훌락 오크 부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과거 저희 드워프들이 세운 왕국이었습니다."

"드워프 종족의 왕국이라 하셨습니까?"

"예. 아주 먼 옛날 일이지요. 아마 오백 년도 더 됐을 겁니다."

"……."

오백 년.

아슬란 제국의 역사가 고작 수십 년이다. 백배가 훨씬 넘는 까마득한 세월이다.

칼스테인 공작이 재차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한데, 과거 드워프 왕국을 왜 현재는 쿠훌락 부족들이 사용 중인 겁니까?"

"도망쳤습니다…."

"도망이요?"

몰린이 씁슬히 미소지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드워프들은 재주가 참 많습니다. 미스릴과 더불어 엘프의 눈물도 가공할 줄 아는 유일한 종족이고, 저희가 만든 장비들 대부분은 천금을 주고도 내놓기 아까운 값에 거래되곤 하죠."

칼스테인 공작이 고갤 끄덕였다.

몰린의 말대로 과거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는 장비들은 돈 주고도 구할 수가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몰린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드워프 왕국은 미스릴을 포함해 값비싼 귀금속 자원이 풍족한 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저희는 왕국에서 살아가는 내내 다른 종족들의 숱한 침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도망쳤다는 몰린이 했던 말의 의미를 비로소 파악한 칼스테인 공작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갤 주억거렸다.

"아, 그래서…."

"예, 그래서 떠났습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 싸우는 동료들의 모습을 더는 보기 싫어서 저희 드워프들은 그 번듯했던 왕국마저 버리고 땅속에 도시를 짓고 그곳에 숨어 지내 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세상 밖에 나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더군요."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때론 목숨을 걸고 싸울 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선 말이지요."

"……."

"해서 이든 영주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영주님의 그 힘으로 저희 왕국을 되찾아 달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곳에 쿠훌락 부족이 있었다."

칼스테인 공작의 말에 이번엔 이든이 입을 뗐다.

"드워프 왕국에 오크가 거주하고 있단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해서 몰린 님의 부탁을 받고 담판을 짓기 위해 가 보니, 생각보다 많은 오크들이 오랫동안 문명을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문명이란 것은… 단지 누군가의 독단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으로만 해결해선 안 된다는 판단에 지금에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고요."

이든의 말은 더없이 맞는 말이었다. 다만, 여전히 의문인 것은 이든이 어째서 몰린의 부탁이 쉬운 것이 아님을 알고서도 이토록 애를 써 주냐는 것이다.

칼스테인 공작이 물었다.

"그런데… 제 생각엔 이든 공작이 몰린 님의 부탁을 공짜로 들어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든 공작이 몰린 님께 왕국을 되찾아 주기로 약속했다면 몰린 님은 이든 공작께 무엇을 주기로 약조했던 겁니까?"

칼스테인 공작의 질문은 참으로 예리했다. 몰린이 답했다.

"드워프 왕국에 있는 미스릴 자원 채취해서 훗날 있을 데스 스타와의 전쟁을 대비해 모든 병사들이 착용할 수 있는 미스릴 갑옷과 미스릴 검을 만들어 주기로 약조했었습니다."

듣던 칼스테인 공작과 황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가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지,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모든 병사들에게… 미스릴 갑옷과 검을 만들어 준다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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