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술은 조금 전 그 한잔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로가 각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에, 대낮부터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한시가 바쁜 사람들이다.
한가로이 술이나 퍼마실 사람들이 아니었….
"꾸!"
뿌우우.
쿠오락이 성을 내듯 콧김을 쭈욱 뽑았다.
"아쉽다. 조금 전 한잔. 그걸로 마무리라니!"
쿠오락은 이왕 시작된 술자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든이 쿠오락을 달랬다.
"자자, 쿠오락. 진정한 상남자는 일의 순서가 무언지 알고 눈앞에 즐거움도 절제할 줄 아는 법이다."
…일의 순서를 아는 것은 상남자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부족들이 앞으로 살아갈 땅을 살필 때는 계산적이고, 깐깐했던 이 오크는 이런 면에선 또 멍청한 상남자였다.
이 멍청한 쿠오락을 달래기 위해서 상남자 언급은 필수였다.
이든의 말에 쿠오락이 그를 흘긋 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가. 일의 순서 아는 것. 상남자의 덕목인가…?"
"물론이다. 나, 이든 상남자. 일의 순서를 아는 진또배기 상남자다. 쿠오락은 상남자 아닌가?"
"무슨 소리! 쿠오락. 쿠훌락 족장도 인정한 상남자 중의 상남자다. 쿠오락. 일의 순서 잘 알고 있다!"
"과연 쿠오락. 상남자답다."
이든이 대견하다는 듯 쿠오락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흡사 코흘리개 애를 달래는 모습이다.
아무튼, 어려움 없이 쿠오락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이든은 곧바로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우선 몰린 장인을 드워프 도시로 보내 이 사실을 알리게 했고, 그다음엔 곧장 쿠오락을 드워프 왕국으로 보내 이사 준비를 서둘러 마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을 이공간 문을 통해 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한 이든이 따라 들어오는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에게 말했다.
"우선 대신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내일로 미뤄 주십시오."
칼스테인 공작이 되물었다.
"내일 말이오?"
"예. 내일쯤이면 오크들의 이주가 이미 끝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반대하려는 대신들도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 겁니다. 이미 그들이 이주까지 끝낸 마당에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물론 일방적인 통보인 만큼 욕먹을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칼스테인 공작이 피식 웃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욕으로 끝난다면야 싸게 치르는 셈이니 감내할 만하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마주 웃던 이든이 이번엔 황제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이든이 황제를 향해 입을 뗐다.
"폐하."
"말씀하세요. 이든 공작."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겁니다. 데스 스타를 막는 것도 그렇지만, 놈에게 대비하는 과정에 대신들의 온갖 반발이 들끓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
"칼스테인 공작께서 그런 것처럼. 저 이든 역시 폐하의 편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혹여 폐하께서 곤경에 처하시는 일이 생긴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올 것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고갤 주억거렸다.
"고맙습니다. 그 말만으로도 제겐 큰 힘이 됩니다."
사실이었다.
이로써 황제의 곁엔 좌우로 칼스테인 공작과 이든 공작이 있는 셈이었다.
든든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든은 곧바로 이공간 문으로 걸음을 뗐다.
만 명이 훌쩍 넘는 쿠훌락 부족의 대규모 이사를 도우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던 이든이 이공간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서 입을 뗐다.
"그럼, 모두 무운을 빌겠습니다."
꼭 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투는 아니다.
어린 황제와 칼스테인 공작은 적잖은 반발이 예상되는 대신들의 아우성을 마주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들에게도 이들 나름대로 큰 전투가 남은 셈이었다.
***
쿠오락의 말대로 쿠훌락 부족은 달리 준비랄 것이 없었다.
가족들을 챙기고, 전사들은 각자 무기를 챙긴 것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야인(野人)이란 말이 더 없이 어울리는 상남자다운 종족이었다.
만 명이 넘는 대규모 이동인 만큼 이든은 이공간 문의 크기를 평소보다 크게 늘려야만 했다.
휘익! 휘이익!
이든이 허공에 대고 검을 십자 모양으로 있는 대로 크게 휘두르자, 트럼프 영지 인근 산채로 통하는 평소보다 훨씬 큰 이공간 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웅.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공간 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었다.
쿠훌락 부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상남자 집단이었다.
이공간 문을 이미 경험했던 쿠오락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남은 쿠훌락 부족들이 과연 상남자답게 성큼성큼 이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입이 절로 쩌억 벌어질 만큼, 만 명이 훌쩍 넘는 대단한 수의 무리였지만, 이공간 문의 거대한 크기와 맞물려 쿠훌락 부족의 상남자다운 거침없는 걸음 덕에 대규모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 있었다.
혹여 마지막까지 들어가지 못한 오크가 남아 있는지 꼼꼼히 살피던 세심한 상남자 쿠훌락까지 들어서고 나서야 이공간 문이 닫혔다.
쿠훌락과 함께 가장 나중에 들어선 이든이 그에게 물었다.
"쿠훌락."
"꾸?"
"산채는 마음에 드나?"
쿠훌락이 오윈이 머물던 대산채를 쭉 훑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 이러한 산채 오십 개라면 충분하다. 부족한 산채는 더 만들면 된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이든은 내심 걱정했었다.
드워프들의 손재주라면 필시, 이들이 이전에 거주하던 왕국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을 터였다.
반면에 산채라고 해 봐야 산적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눈으로 미리 판단할 수 있었더라면 좋겠지만, 이든에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쿠오락이 마음에 들어 하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쿠오락만의 생각이었다.
다른 오크들의 의견까지 쿠오락과 같을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이든은 간절히 바랐다.
전생의 녹림 왕이 살던 곳까지 바라진 않더라도 어느 수준까진 산채가 그럴듯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든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조금 전 쿠훌락도 그렇고, 먼저 이곳에 도착해 산채를 둘러보던 오크들의 분위기를 들어보니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쿠훌락의 큼지막한 손이 이든의 등을 연신 두들겼다.
"이든 덕분에 우리 새 거주지 얻었다. 드워프 역시 고향 되찾았다. 이든이 평화를 가져왔다. 진심으로 고맙다!"
이든이 웃어 보였다.
"오히려 고마운 건 나지. 쿠훌락, 자네의 결단 덕분에 데스 스타와의 앞둔 결전을 보다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게 됐으니까."
"우리 쿠훌락, 이든의 친구다. 우리 힘 필요한 순간 오면. 언제든 불러라. 데스 스타와 싸울 때 우리 역시 힘 보태겠다. 우린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맙다. 용감한 쿠훌락 부족이 함께해 준다면야 분명 아주 큰 힘이 되겠지. 그럼, 난 이만 슬슬 가 보도록 하…."
그때였다.
동족들에게 산채를 구경시켜 주던 쿠오락이 이든의 이름을 부르며 후다닥 달려왔다.
"이든!"
"쿠오락."
달려온 쿠오락이 쿠훌락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쿠훌락 족장!"
"뭔가."
"나. 이든 따라가고 싶다!"
"꾸!?"
"…으, 응?"
쿠훌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든 역시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다.
쿠훌락이 되물었다.
"이든을 따라가고 싶다?"
"그렇다!"
"이유가 뭔가."
"이든과 함께 세상 구경하고 싶다!"
"세상 구경?"
"쿠오락. 이든과 함께 다니며 수많은 사람 봤다. 다른 종족도 봤다. 그들과 술잔을 나눴다. 색다른 경험. 또 해 보고 싶다. 세상을 경험한 후. 다시 돌아오겠다."
쿠훌락이 고갤 주억거렸다.
쿠오락의 말을 듣더니 평소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크는 지금껏 배척받아 온 종족이었다.
생김새 탓에 다른 종족이라기보단 괴물 취급이 먼저였고.
자신들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칼부터 뽑고 덤벼들기 바빴다.
하나, 쿠오락의 말대로라면 그는 지금껏 없던 경험을 해 온 것이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교류라는 것을 말이다.
오크도 이젠 변해야 할 때였다.
다른 종족과 교류를 통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숨어서 지내기보단 이제는 세상 밖에 자신들의 모습을 과감히 드러내야 할 때였다.
쿠오락이 그 변화의 시발점이 되어 줄 것이라 여긴 걸까.
쿠훌락이 이내 결심한 듯 이든에게 물었다.
"이든의 생각은 어떤가. 쿠오락. 데려가도 괜찮겠나?"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뭐, 쿠오락 생각이 그렇다면야 나야 상관없지."
이든의 허락이 떨어지자 쿠훌락이 쿠오락을 향해 힘차게 고갤 끄덕였다.
"좋다. 쿠오락. 이든과 함께 더 넓은 세상 구경해라. 그리고 우리 오크도 하나의 문명이라는 것을 알리고 와라!"
"알겠다. 나, 쿠오락. 오크의 명예 세상에 드높이고 오겠다!"
"꾸!"
"꾸우!"
쿠오락과 쿠훌락이 서로 결의에 찬 눈으로 마주 보며 콧김을 쭉 뽑아내던 그 사이,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이든 역시 쿠오락의 동행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드워프나 엘프와 달리 오크는 인간들에게 아직까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인식을 조금은 바꿔 줄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쿠오락이 세상 밖에 완전히 적응하기 전까진 보모(?) 노릇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지만 말이다.
쿠오락이 주변에 있던 다른 오크들에게 잠시 떠난다며 인사를 나누던 그때였다.
이든이 쿠오락을 불렀다.
"쿠오락, 이만 가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
"꾸! 알겠다!"
쿠오락이 재차 이든 곁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사이, 이든의 음성이 이번엔 쿠훌락을 향했다.
"아쉽지만,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쿠오락은 내가 잘 보살피겠네."
쿠훌락이 아쉬운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쿠오락을 잘 부탁한다. 그리고 나중에 함께 술잔을 나누자. 그땐 다른 종족의 친구들도 함께!
"좋지."
쿠오락이 이든과 함께 떠난다는 소식은 몇몇 오크들에게만 전해졌다. 대부분은 새로 이사 온 집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든과 쿠오락은 쿠훌락과 몇몇 오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곤 이공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둘이 이공간 안에 들어서자 문은 곧장 닫혔다.
이든과 쿠오락이 떠난 자릴 한참이나 바라보던 쿠훌락의 눈동자가 문득 하늘을 향했다.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하늘.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별을 바라보는 쿠훌락의 눈동자도 그 빛들을 담아내듯 맑은 빛을 내고 있었다.
언제가 됐든 간에 데스 스타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지만, 두려움이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쿠훌락이 중얼거렸다.
‘별은 작다….’
하지만.
‘모이고 모여 어둠을 밝힌다.’
작은 별 하나가 발하는 빛은 미세하리만큼 보잘것없다.
하나, 쿠훌락의 말처럼 저 작은 별들이 모이고 모여 무수히 많아지면 짙게 깔린 어둠마저 밝히는 찬란한 빛이 된다.
평소와 다름없는 고작 밤하늘이지만, 쿠훌락이 이를 보며 떠올리는 것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망했다.
그 자신들 역시 저 무수히 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쿠훌락은 평소보다 유독 밝게 느껴지는 밤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에 담던 빛을 가슴에 새기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