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드워프 도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과거 드워프 왕국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한번.
난데없이 나타난 쿠오락의 등장에 또 한 번 말이다.
쿠오락이 기겁한 얼굴로 한곳에 모인 드워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꾸! 반갑다! 나 이든의 친구. 쿠오락이다!"
교류 좀 몇 번 해 봤다고, 이제는 먼저 나서서 인사까지 건넬 수 있게 된 쿠오락이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성장이었으니, 이든의 입장에선 기특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물론 정작 쿠오락의 인사를 받는 드워프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대장 장인 멀린이 쿠오락 옆에 선 이든을 알아보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이든 영주님!!!"
일전 이곳에 들렸던 이후로 오래간만의 만남이었지만, 멀린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이든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멀린 대장."
"영주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예, 무탈히 잘 지냈습니다. 그보다 몰린 님으로부터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이든은 짧은 몇 마디 인사 이후,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멀린이 고갤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옛 왕국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제가 드워프와 오크 사이에 중재자로 나서 왕국을 되찾는 일에 도움을 드렸는지도 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 또한 빠짐없이 전부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데스 스타와의 전쟁을 대비해 병사들이 입을 미스릴 갑옷과 미스릴 검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조하셨다고요."
"맞습니다. 해서 말인데, 최대한 이사를 서둘러서 바로 작업에 착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떠날 채비를 모두 끝낸 참입니다."
"벌써 말입니까?"
"예, 바로 작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중요 장비들만 챙겼고, 남은 장비들은 현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쓸 생각입니다. 일단 왕국 같은 경우엔 이곳보다 장소가 잘 마련되어 있다 보니, 달리 챙길 것이 없습니다."
"잘됐군요."
멀린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드워프들을 이끌고 이공간 문을 통해 드워프 왕국으로 돌아가면 문제는 모두 해결되는 셈이었다.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당장 이동하시죠."
이든이 이공간 문을 열기 위해 검을 꺼내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잠시만요, 영주님."
"……?"
"잠시….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멀린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이해 못 할 이든이 아니었다.
이든이 고갤 끄덕인 후,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철컥.
그사이, 멀린의 시선은 한곳에 모인 드워프들을 넘어 그 뒤로 펼쳐진 자신들의 도시를 향했다.
‘이 땅속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
드워프들이 세상에 등을 지고 땅속으로 숨어든 세월은 참으로 길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저 땅속 도시가 그 증거였다.
드워프들은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그토록 좋아하던 맑은 하늘 아래 내리쬐는 햇빛조차 잊은 채 이곳에서 숨죽여 살아왔다.
이곳에서 숨죽여 산 한동안은 행복했다.
더는 자신들이 가진 재주와 자원을 노리는 침략이 없어서였다.
그렇게 이곳에서 평화를 만끽하며 평생을 행복하게 살 줄 알았건만, 그런 시간이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넘어 십 년이 되고, 십 년이 쌓이고 쌓여 백 년이 되어 간 순간엔 문득 이곳으로 도망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게 더 쌓이고 쌓여 수백 년이 되었을 땐 후회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후회가 사라진 자리엔 두려움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더는 세상 밖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 말이다.
과거의 그 자신들의 왕국은 이미 오크들이 점거한 상태였고.
거대 개미들로부터 터전을 빼앗기기 직전이었을 때도 워낙에 커진 두려움 탓에 다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엄두조차 내질 못하였다.
그 사면초가의 상황에 이든이 나타났다.
이든은 거대 개미로부터 그들을 구했고, 이제는 그들을 세상 밖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멀린은 한참을 그렇게 자신들의 땅속 도시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세상에 배신감을 느끼고 도망쳐 오다시피 한 피난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론 자신들의 나약함과 세상 밖을 향한 두려움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 도시를 말이다.
하나.
더는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두려움을 떨쳐 내고, 다시 세상 밖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 모진 풍파가 기다리고 있다 한들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깨달은 바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말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을 쳤던 그간 자신들의 삶을 보라.
결국엔 땅속과 어둠이라는 끝에까지 떨어지지 않았던가.
도태 끝엔 결국엔 죽음뿐이다.
영위하는 삶이란 끝없는 발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때론 밀려오는 태풍과 파도에 의기투합하여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진정한 평화란 그런 것이다.
피 흘린 이들의 값진 승리에서 오는 결과 말이다.
물론 고통의 길이겠지.
하지만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이 어딨겠는가.
멀린은 씁쓸히 웃었다.
이를 깨닫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던 탓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하여 계속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노릇.
다짐하듯 멀린의 양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더는 피하거나, 도망치며, 숨죽여 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우릴 끝없이 괴롭힌다 해도 상관없다. 맞서 싸울 것이다. 이젠 우리도…. 밖으로 나갈 것이다!’
멀린이 마지막으로 이 도시를 두 눈에 새긴 이유.
그간 이곳에 들었던 정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더는 도망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고, 되이며 가슴에 다짐을 새기던 멀린이 일순 고갤 끄덕였다. 멀린의 무겁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영주님, 됐습니다. 이만 가시죠."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말없이 검집에서 보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이든의 손에 쥐어진 보검의 새하얀 검신이 허공을 십자(十字) 모양으로 베었다.
그 순간.
베어진 허공의 모양 그대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빛이 새어 나오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장 드워프 왕국으로 통하는 이공간 문이 개화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워프들의 시선은 이공간 문 반대쪽에 보이는 드워프 왕국의 모습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면 지하 도시에서 드워프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후회하고 망설이고 두려움을 느꼈던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하나.
이것이 비단 이공간 문 때문에 가깝게만 느껴지는 걸까.
이공간 문을 통해 비치는 과거 자신들의 왕국을 바라보는 드워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이공간 문이 아니더라도 세상 밖은 이처럼 생각보다 가까웠을지 모른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이공간 문에 비치는 드워프 왕국을 넋 놓고 바라보던 멀린이 정신을 차리곤 뒤돌아서선 늘어선 드워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비친 드워프들의 모습은 세상 밖을 향한 기대와 두려움이 한데 뒤엉킨 묘한 모습이었다.
멀린이 입을 떼곤 드워프들을 향해 외쳤다.
"형제들이여!"
"……."
드워프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멀린을 바라봤다.
"이젠 우리도…. 세상 밖으로 나갈 때다!!!
"……!"
멀린의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드워프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우아아아아아아!!!!"
늘어선 드워프들 역시 떠나가라 소릴 질렀다.
제각기 다른 음성들이 한데 뒤섞인 외침이었지만, 거기에 어려 있는 것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밖으로 나가자고.
이제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자고.
그리고.
다가올 세찬 풍파에 맞서 싸우자고 말이다.
함성은 길었으나.
이공간 문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신속했다.
저벅저벅.
드워프들이 하나둘씩 이공간 문 안으로 보무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쿠훌락 못지않은 인원수와 기나긴 행렬.
하지만.
당당한 걸음만큼이나, 행렬은 금방 줄어들어 갔다.
모두 이공간 안으로 들어서고.
이젠 멀린과 이든 그리고 쿠오락만이 남은 상황.
쿠오락이 평소답지 않게 눈치 빠르게 이공간 안으로 먼저 들어섰고, 이든이 마지막까지 남은 멀린에게 말했다.
"가시죠. 멀린 대장."
"예, 그전에 잠시만…."
"……?"
그때였다.
멀린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줄곧 해 보고 싶던 것이었습니다."
"……?"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성냥이었다.
촤학!
성냥을 바닥에 부딪쳐 마찰을 일으킨 다음 불을 피운 그는 도시 사방과 연결된 기다란 줄에 불을 붙였다.
그 순간.
줄 끝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길게 연결된 줄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속도가 붙으며 도시 사방팔방에 연결된 줄을 따라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이든은 멀린이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뒤늦게 이해했다.
‘기름 냄새가 난다더니만 이것이었군.’
그리고 잠시 뒤.
도시 사방에 퍼졌던 불꽃은 이내 굉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명이 울리며 귀가 먹먹해졌다.
멀린이 이든의 손을 잡아끌며 외쳤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곧 전부 터질 겁니다!"
조금 전 불꽃의 종착지는 도시에 곳곳에 연결된 화약이었다.
화약이 사방에서 터지며 거대한 불꽃을 일으켰고, 도시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든이 고갤 끄덕이며 멀린을 따라 이공간 문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뗐다.
그사이, 멀린은 찰나 화염에 휩싸인 자신들의 지하 도시를 뒤돌아 바라보았다.
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래도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이곳.
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그 도시를 바라보며 멀린은 미소 지었다.
‘잘 가라. 그리고… 편히 쉬어라. 우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멀린과 이든이 이공간 안에 완전히 들어선 순간. 이공간 문도 닫혔다. 그사이에 도시는 더욱더 큰 화염과 폭발을 일으키며 한 줌 잔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
과거 자신들의 왕국에 도착한 드워프들은 오백 년 만에 발을 들인 그곳에 서서 한참이나 넋을 놓고 사방 천지 풍경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간 반대쪽에서 이곳을 바라보던 것과 직접 땅을 밟고, 그 위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는 것은 다가오는 감회가 천지 차이였다.
이는 뒤늦게 도착한 멀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간만에 돌아온 고향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자, 이제 다들 일들 시작하세!"
"예!!!"
멀린이 소리치고, 드워프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드워프 왕국은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주인들 품에 되돌아왔다.
차디찬 한기마저 느껴졌던 왕국에 자리한 대장간에 재차 뜨거운 불이 지펴지는 순간이었다.
이든은 곧장 영지로 통하는 이공간 문을 열었다.
이든 곁엔 다시 영지로 돌아가려는 몰린과 쿠오락이 함께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멀린이 어느새 달려와 그들 앞에 섰다.
어느새 까뭇해진 얼굴로 멀린이 밝게 웃으며 입을 뗐다.
"일부 드워프는 곧장 미스릴이 나오는 광산으로 향했고, 일부는 그간 창고에 쌓여 있던 미스릴 자원으로 벌써부터 무기들을 제련 중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작업이 완료되면 서신을 보내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그동안 수고해 주십시오. 멀린 대장… 아니, 이젠… 멀린 왕이라 불러야 하나요?"
왕국을 되찾았으니, 대장 장인보단 왕이란 표현이 더 맞지 않나 싶어 물었으나, 멀린은 고갤 저었다.
"과거엔 그리 불렸으나, 이제는 대장 장인이 더 편합니다. 그냥 평소대로 불러 주십시오."
이든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예, 멀린 대장."
"훗."
멀린의 시선이 이든에게서 몰린에게로 옮겨졌다.
몰린이 고갤 주억거리며 멀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수고해 주시오. 대장. 나 역시 영주님의 영지에서 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겠소."
"예, 아버지."
부자간의 살가운 대화라 할 순 없으나, 그들에겐 이것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이든이 웃으며 인사와 함께 이공간 안으로 들어섰고, 쿠오락도 제 나름에 인사를 남기며 이든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멀린을 바라보던 몰린 역시 시선을 거두곤 이공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앗.
모두 들어서자 언제 있었냐는 듯 이공간 문이 닫혔다.
이공간 문이 사라진 빈자릴 한참이나 바라보던 멀린의 시선이 귓가에 울리는 쇠질 소리에 비로소 대장간으로 옮겨졌다.
감상에 젖어 있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