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든은 영지로 돌아오기 무섭게 몰린에게 쿠오락의 거처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쿠오락은 인간들이 머무는 장소처럼 그럴듯한 집은 불편하다며 쿠훌락 부족에서 지내던 것처럼 바람 잘 통하는 나무로 된 집과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만 만들어 달라 말했다.
몰린은 알았다고 하며 작업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든은 쿠오락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 너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영지민들이 많아. 그러니까 괜히 이곳저곳 싸돌아다니지 마라."
쿠오락이 고갤 갸웃거렸다.
"꾸? 난 이곳 구경하고 싶다!"
이든이 식겁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내일 내가 구경시켜 줄 테니까. 오늘은 참아라."
"꾸!"
삐지기라도 한 걸까. 쿠오락이 성을 내듯 콧김을 쭉 뽑아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애들이 떼라도 쓰는 듯한 모양새였다.
"난 구경하고 싶다. 이든. 갑자기 상남자답지 못하다!"
이든이 검지를 쫙 피며 아니라는 듯 휘휘 저었다.
"쿠오락, 그건 오해다."
"오해?"
"진정한 상남자라면 마음 한쪽엔 자상함을 품고 있어야 한다."
"꾸? 자상함…?"
"그래, 난 쿠오락이 걱정되는 마음에 함부로 영지 안을 돌아다니지 말란 뜻이었다."
"그게 자상함과 무슨 상관인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
"꾸?"
"쿠오락, 너 처음에 나 만났을 때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나?"
"이든, 처음 만났을 때?"
쿠오락이 볼을 긁적였다.
"기억 안 난다!"
"……."
이든이 인상을 썼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이든이 버럭 소리쳤다.
"나한테 화살 쐈잖아. 인마!"
쿠오락 역시 마주 보며 인상을 썼다.
"이든, 나한테 화낸다! 자상함과 거리 멀다!"
"……."
이든은 찰나 생각했다.
쿠오락.
이놈은 치밀할 정도로 영특한 놈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 불리한 기억은 쏙 빼놓고, 조금 전 대화는 귀신같이 생각해 뒀다가 이리도 적재적소에 써먹는단 말인가.
이든이 한숨을 푹 쉬곤 쿠오락을 달랬다.
"쿠오락, 자넨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긴 하지만, 아직 영지민들의 친구는 되지 못했다. 만약 영지민들이 쿠오락 자네에게 지레 겁먹고 활을 쏘거나 해를 끼치려 한다면 큰일 아닌가? 이렇게 친구를 걱정하는 이 마음. 이게 바로 상남자의 자상함이다. 알겠나. 쿠오락?"
"……."
쿠오락이 턱을 매만졌다.
아둔한 머리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쿠오락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다. 이든의 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럼 쿠오락, 이든 걱정하지 않게 조용히 있겠다."
"……."
이든, 그 역시 예상은 했지만, 정말 코흘리개 애를 키우는 심정이 이것인가 싶었다.
새삼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위대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심심하겠지만, 오늘은 최대한 푹 쉬는 데 집중하자고. 영지 구경은 내일 질리게 시켜 줄 테니까. 알았지?"
"알겠다! 쿠오락 말 잘 듣는다!"
"그래그래. 착하지. 쿠오락."
"꾸!"
그렇게 쿠오락이 영지 내에서 말썽을 피우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러둔 그는 마을 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스왈로 촌장으로부터 그간 영지 내 상황에 대해 보고받기 위해서였다.
***
끼익.
"왔는가."
"……?"
이든은 고갤 갸웃거렸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스왈로가 아닌 엉뚱한 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든이 곧장 입을 떼 물었다.
"갤러하드 님, 다들 집 간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안 가시고 뭐 하십니까?"
갤러하드의 눈썹이 찰나 꿈틀댔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어째 나까지 상대하기 귀찮다 싶은 목소리구만."
"귀찮지요. 드워프, 오크, 인간들 문제까지 전부 해결해 주느라 종일 싸돌아다녔으니까요."
"그럼, 이왕 고생한 것 엘프의 문제도 해결해 주는 것이 어떻겠나?"
"……."
강요나 다름없는 갤러하드의 말에 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든이 팔짱을 끼곤 물었다.
"그래서 엘프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뭡니까?"
삐딱하기 짝이 없는 자세지만, 쫑긋거리는 이든의 귀를 보아하니, 어쨌든 해결해 주려는 의지는 엿보였다. 갤러하드가 웃으며 고갤 저었다.
"엘프들의 문제가 아닐세."
"응?"
"한 엘프의 문제지."
"……."
이든이 삐딱하던 자세를 풀었다.
"그 말은 즉 갤러하드 님의 개인적인 문제란 겁니까?"
"그런 셈이지."
"흠."
갤러하드의 개인적인 문제라면 사실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든이 예측한 것에 대해 슬쩍 말을 꺼냈다.
"왼손으로 전향한 것에 대한 문제겠군요."
갤러하드가 짐짓 놀란 표정을 하다가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정확히 맞혔네…."
대답하는 갤러하드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음성에 실린 감정만 봐도 얼마나 참담하고, 고뇌에 차 있는지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갤러하드가 한숨을 길게 푹 내쉬곤 재차 말을 이었다.
"데스 스타와의 전투에서 오른손을 잃고 왼손으로 전향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문제가 닥치니 막막하더군. 내가 정확히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 예상이 가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오른손을 잃기 전 본능을 버리지 못한 것 아닙니까?"
"…맞아. 지난 3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줄곧 왼손으로 수련을 거듭해 왔네. 수련 초기에는 별생각이 없었어. 그냥 반복해서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다 보면 자연히 왼손의 감각이 늘어날 것이라 여겼지. 한데…. 막상 지금까지 수련을 이어 오며 느낀 바는 그게 뜻대로 되지 않더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갤러하드는 본래 오른손잡이의 검수였다. 평생을 오른손으로 검을 잡아 온 그가 모든 감각과 본능을 전향한 왼손에 맞춘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검을 수련하는 내내 저도 모르게 검을 쥔 왼손이 아닌 비어 있는 오른팔을 내밀려 했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휘두른 손은 왼손이지만, 검로(劍路)는 오른손으로 썼던 시절의 것이 나왔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주로 쓰던 손을 잃은 검수에게 있어 본능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항상 의지보다 앞서가며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를 어쩐다….’
이든은 말을 아끼며 연신 턱을 매만졌다.
갤러하드가 겪는 문제점이 뭔지는 알고 있으나, 그 역시 마땅히 해결법을 제시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팔을 잃는 검수의 고민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고, 그 험난한 길을 먼저 걸어 본 선배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든은 전생을 포함해 그런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갤러하드를 돌려보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이든이 난데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갤러하드가 의아한 얼굴로 이든에게 시선을 던지던 그때였다. 이든이 씩 웃으며 입을 뗐다.
"몸을 쓰는 데 있어서 고민이면 머리로 고민할 게 아니라 응당 몸을 움직여야 하는 법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
갤러하드가 멍한 얼굴을 하다가 함께 웃었다.
"맞는 말이야."
갤러하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
밤이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기에 연무장은 함성이 쩌렁쩌렁 울리던 낮과는 달리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비단 연무장뿐일까. 마을 전체가 잠자리에 든 것처럼 조용했다.
이따금 번을 도는 엘프 병사들과 청년 병사들만이 함께 짝을 이뤄 마을 내부를 순찰하듯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든과 갤러하드는 그렇게 고요한 연무장을 밟고 끝과 끝에 마주 섰다.
찰나의 정적 속.
갤러하드가 먼저 입을 뗐다.
"기대되는군. 데스 스타와 일기토를 벌였던 자네가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지 말이야."
"……."
어색한 정적을 환기하기 위해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이를 듣던 이든은 그저 여전히 무표정을 일관할 뿐이었다.
다시 찾아온 정적이 한참이나 흘렀을 때였다.
내내 묵묵부답으로 서 있던 이든의 무겁던 입이 비로소 떼어졌다.
"무언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여기 연무장에 설 때까지 줄곧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갤러하드 님의 고민을 덜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갤러하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셨는가."
"찾았지요."
이든이 대답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검집에서 보검을 빼내 들었다.
스릉.
미스릴로 만들어진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며 달빛과 별빛만으론 부족했던 연무장을 반사된 빛으로 환하게 비추는 듯했지만, 정작 빛을 내는 검을 빼내 든 이든에게선 진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던 이든이 어느새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갤러하드 님도 의식하지 못한 새에 무심코 움직이는 오른손의 본능. 그것을 다른 본능으로 잠재우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이런!!!"
이든의 급변한 분위기를 살피던 갤러하드가 당황한 듯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되묻던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아앗!!!
맞은편에 서 있던 이든이 무서운 기세로 난데없이 갤러하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갤러하드가 저도 모르게 벼락같이 검을 빼내 들고는 이든의 검을 곧장 맞받아쳤다.
카아아아아앙!!!
고요했던 연무장에 커다란 금속음이 울리며 한차례 소란이 일자, 번을 서던 병사들이 소릴 듣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연무장 주변에 모여들었다.
단둘만 있던 이 장소에 연무장 주변으로 병사들이 속속들이 모여든 상황. 개중엔 우연히도 실비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간만에 보는 딸의 모습이지만, 갤러하드는 그녀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든이 재차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카아앙!
갤러하드가 재차 이를 막으며 버럭 소릴 질렀다.
"이든,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하나.
검을 맞댄 채 들려온 이든의 대답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비무 따윈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할 겁니다. 전 정말로 갤러하드 님을 죽이겠단 마음가짐으로 이 대련에 임하는 중이니까요."
"그 무슨…!"
갤러하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그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든의 검이 다시 사납게 휘둘러졌다.
카앙!
카아앙!
카아아아앙!
그의 검이 조금 전 말했던 대로 갤러하드의 숨통을 노리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갤러하드는 악을 쓰며 이든의 검을 맞받아쳤다.
모여든 병사들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빠!"
실비아가 당황한 얼굴로 둘을 말리려 다가오려던 그때였다.
이든의 공세를 막아 내던 갤러하드 실비아를 향해 외치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오지 마!"
"……!"
고수 간의 전투는 그 일대에까지 큰 여파를 미치는 법이다.
이든의 기세라면 괜히 다가오는 실비아까지 뜻하지 않게 다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실비아의 걸음이 덜컥 멈췄다.
이든의 공세를 막기 바쁘던 갤러하드의 왼손에 쥔 검에서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활활 타오르며 즉각 이든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나, 이든은 귀신같이 이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갤러하드의 검로를 무위로 돌린 이든의 검이 갤러하드의 목 오른쪽 방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