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250)

215화.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이든의 검을 바라보는 순간, 갤러하드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나,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걸까. 다가오는 이든의 검이 일순 느리게 보였다.

갤러하드는 이것이 검수들이 간혹 가다 느낀다는 찰나의 시간을 쪼갠 듯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가오는 이든의 검을 정확히 응시하며 갤러하드가 이를 맞받아치기 위해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갤러하드가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향했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이든의 검을 받아치기 위해 본능적으로 비어 있는 오른팔을 움직이려 했던 듯, 그의 오른쪽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정작 검을 쥔 왼손은 검을 휘두르는 방법을 까먹기라도 한 듯 여전히 부동의 상태.

그사이, 느리게 보였던 이든의 검은 점차 빨라지더니 어느새 그의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갤러하드는 황급히 자세를 낮췄다. 검을 쥔 왼손을 움직여서 다가오는 검을 맞받아치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단은 정확했다.

휘이이이이이이익!

이든의 검이 검풍을 일으키며 자세를 낮춘 갤러하드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각.

붕 떴던 그의 머리카락이 지나간 이든의 검에 무참히 잘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갤러하드의 머리 위로 이든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금, 칼을 맞받아치시지 않았는데, 혹 본능적으로 오른팔이 나왔고, 받아치기엔 늦었다고 판단하여 급히 자세를 숙이신 것 아닙니까?"

"……."

질문은 두 눈으로 본 것처럼 꿰뚫어 보듯 정확했고, 갤러하드는 시인하듯 침묵할 뿐이었다.

그의 반응에 이든이 난감하다는 듯 침음성을 내뱉고는 중얼거렸다.

"흠…. 이 정도로 했는데도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움직이려 했다라… 더 강하게 몰아붙여야 하나?"

이든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갤러하드의 안색이 일순 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 몰아붙인 것만 해도 목숨이 위태로웠거늘, 이보다 더 강하게 나온다니. 절로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든의 결단은 무척이나 빨랐다. 자세를 낮춰 검을 피한 갤러하드를 향해 경고도 없이 곧장 검을 휘두른 것이다.

갤러하드가 질린 얼굴로 몸을 날리듯 옆으로 굴렀다.

휘이이이이익!

콰아아아아앙!

이든의 검격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갤러하드가 서 있던 자릴 날려 버렸다. 연무장 바닥이 폭음과 함께 휘두른 검격을 따라 움푹 패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몸을 피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연무장 바닥이 아니라, 그의 몸이 세로로 두 동강이 날 뻔한 순간이었다.

몸을 날렸던 갤러하드가 벼락같이 서둘러 일어나곤 자세를 잡았다.

그사이.

파아아아앗!

피어오른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든의 신형 역시 갤러하드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지며 날아오고 있었다.

저만한 속도의 움직임이라면 필시 검을 휘두르는 속도 역시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를 터.

갤러하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곤 검을 쥔 자신의 왼손에 신경을 집중했다.

카아아아앙!!!

이든의 검과 갤러하드의 검이 맞부딪치자 연무장에 재차 커다란 금속음이 가득 울렸다.

그리고.

주륵.

힘에서 밀린 갤러하드의 몸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든이 이를 못 알아챌 리가 없다.

갤러하드의 검이 뒤로 살짝 물러난 것을 검을 쥔 손에 감각으로 느낀 이든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재차 검격을 연달아 쏟아붓기 시작했다.

카앙! 카아아앙! 카아아아아앙!!!

더 강해진 힘과 더 빨라진 검에서 나오는 이든의 연격(聯格)에 더해 의식적으로 왼손에 신경을 집중한 탓에 절로 둔해진 반응에 갤러하드는 그야말로 막기에 급급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이든의 일방적인 공격과 정반대로 갤러하드의 일방적인 방어만이 연달아 지속되던 그때였다.

파앗!

이든의 눈썹이 찰나 꿈틀거리더니 그의 신형이 갤러하드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라진 이든이 재차 모습을 드러낸 곳은 갤러하드의 등 뒤였다.

등 뒤를 점한 이든이 재차 갤러하드의 오른쪽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이익!!!

갤러하드의 목을 노리며 이든의 검이 맹렬한 속도로 떨어지는 그 순간. 갤러하드는 찰나의 순간을 쪼갠 듯한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사이, 고갤 돌린 갤러하드의 눈동자에 자신의 숨통을 끊을 듯한 기세로 가까워져 오는 이든의 검신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이지만, 다가오는 검은 어째 조금도 느려 보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신경을 집중하던 왼손의 감각도 무뎌지고, 머릿속마저 하얘지던 그 순간.

갤러하드는 피가 배어 나올 듯이 이를 악물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팔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때였다.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 살기 위한 본능이 갤러하드의 전신의 감각을 지배한 그 순간.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난데없이 커다란 금속음이 울리며 그의 고막을 때려 댔다.

카아아아아아아앙!!!!

"……."

"……."

이명이 귓가에 맴돌다가 사라지고,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숨조차 죽인 듯 일순 찾아온 정적 속.

갤러하드의 부릅 뜨인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 댔다.

그의 시선이 조금 전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자신의 팔을 향했다.

비어 있는 오른팔을 움직이려 했던 조금 전과 달리, 검을 쥔 그의 왼손이 정확히 움직이며 반대편에서 날아와 목 근처까지 다가온 이든의 검을 있는 힘껏 막아 내고 있던 것이다.

"……."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기적 같은 상황.

갤러하드가 말을 잇지 못하며 넋을 놓은 채 검을 쥔 자신의 왼팔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때였다.

스윽.

갤러하드의 검 앞에 막혔던 이든의 검이 떼어지더니 연무장 바닥을 향해 축 늘어졌다.

넋을 놓다시피 하던 갤러하드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이든을 향했다.

대련하는 내내 섬뜩할 정도였던 무미건조한 얼굴과 중간중간 드러냈던 광기 넘치던 살벌한 미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작은 미소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미소 짓던 이든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성공하셨군요."

"……."

성공이란 말 앞에 갤러하드는 저도 모르게 감격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갤러하드가 인상을 쓰며 별안간 이든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자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자칫하면 정말 죽을 뻔했지 않은가!!!"

생사결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던 대련 내내 매 순간이 죽을 고비였던 것이 떠오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미소 짓던 이든의 얼굴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홱 돌변했다.

"뭐, 결과적으론 안 죽지 않았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럼 어쩝니까. 다른 방도가 없는데.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려 했던 갤러하드 님의 오른팔. 그건 필시 그간 몸에 밴 습관에서 비롯된 본능이었습니다. 습관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어서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마련이죠. 특히나 삶의 대부분을 검에 미쳐 살며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른 갤러하드 님이라면 남아 있는 습관의 영향이 무섭도록 컸을 겁니다. 아마 남은 생 동안 죽자 살자 왼손 수련에 매달려도 이를 없애기 힘들었겠죠. 해서 고민해서 나온 답이 조금 전 그 대련이었습니다. 습관처럼 나오는 갤러하드 님의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선 다른 본능을 깨울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더군요. 죽음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듣던 갤러하드는 그야말로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무식한 짓을…."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예, 습관보다 무서운 본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결론입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론 제 판단이 정확하지 않았습니까?"

"……."

…허허, 정확했지. 너무 정확해서 자칫 뒈질 뻔하기까지 했지.

갤러하드의 눈이 악에 받친 것마냥 핏발이 가득 섰고, 볼은 어디서 진동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푸들푸들 떨려 댔다. 그의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시뻘게진 그 순간, 갤러하드의 입에서 죽음의 문턱을 왔다 갔다 하며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쌍욕으로 터져 나왔다.

"야이! 미친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련에서 그렇게 죽자 사자 검을 휘두르는 새끼가 어딨어. 인마!!!"

가는 말이 이따윈데, 들려오는 말이 고울 리 없다.

듣던 이든도 응당 쌍욕으로 응수했다.

"뭐요!? 미친 새끼!? 이 아저씨가 미쳤나, 기껏 버릇 고쳐 줬더니 갑자기 쌍욕을 날리고 지랄이야. 지랄은!"

"뭐!? 지랄!? 지라알!?"

"그래. 그럼 그게 지랄이지 그럼 뭐야 이 양반아!"

갤러하드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오냐! 오늘 어디 한번 내 지랄 좀 받아 봐라. 이놈아!"

이든도 양팔을 걷어붙였다.

"드루와! 이 아저씨야. 내 오늘 그 지랄 맞은 버릇도 함께 고쳐 주지!"

쌍욕이 오고 가기 무섭게 사이좋게 주먹도 오고 갔다.

각자의 주먹이 상대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빠아아아아악!!!

조금 전, 수준 높던 전투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동네 애들 싸움을 방불케 하는 우격다짐은 서로가 연무장에 지쳐 쓰러질 동안 계속됐다.

병사들이 이 한심한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가운데 턱 돌아가는 소리만이 무심히 울려 댔다.

빠아아아악!

병사들은 더는 이 한심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번을 서기 위해 자릴 옮겼다. 실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동안 주고받은 주먹질 끝에 연무장에 대자로 뻗은 두 사람.

누운 채 밤하늘을 응시하던 갤러하드가 정적 끝에 먼저 입을 뗐다.

"정말 고맙네. 이든, 자네 덕분에 내내 날 괴롭힌 골치 아팠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네…. 물론 여전히 열이 받는 건 사실이지만."

"뭘요. 갤러하드 님께서 도움이 됐다니 저 또한 기쁩니다…. 근데 이왕 칭찬하는 거 칭찬만 하시죠? 뒤끝 진짜 기네."

"……."

"……."

"해 보자는 건가?"

"해 볼까요? 후회하실 텐데, 그러다 진짜 골로 가시면 제가 실비아님을 볼 낯이 없습니다."

"……."

"……."

"…풉."

"훗."

갤러하드와 이든이 일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들 생각에도 본인들 모습이 꽤나 유치했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중 이든이 별안간 입을 뗐다.

"…하지만 조금 전 그것으로 완전히 습관을 고쳤다 볼 순 없습니다. 단지 살기 위한 본능으로 억제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알고 있네. 이 한 번의 대련만으로 내 습관이 완전히 고쳐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평소에도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면 이 같은 짓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해야겠지."

"맞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고생 좀 하셔야겠습니다."

갤러하드가 씁쓸히 웃었다.

"고생길이 훤하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네. 해결책을 알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니."

"종종 찾아오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갤러하드가 고갤 저었다.

"…그럼 안 돼."

"……?"

"진짜 골로 갈 수도 있어."

"풉."

"하하하!"

갤러하드와 이든이 박장대소했다.

다시 한참을 웃던 중 이번엔 갤러하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떤가?"

"……?"

"자네야말로 요즘 성과는 있나?"

웃음을 터트리던 이든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의 입에서 맥 빠진 듯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과가 있다면 있는데…."

"한데?"

"목표로 두었던 것이 워낙에 높은 곳이라 성에 차지 않습니다."

"…자네 정도 되는 이가 성에 안찰 정도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을 바라보고 있길래?"

"글쎄요…. 워낙 말도 안 되게 높은 곳이라 뭐라 말해야 할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흠…."

갤러하드가 턱을 매만졌다.

자신보다 하수라면 경험에 비추어 조언이라도 해 줄 수 있겠지만, 이든은 갤러하드보다 까마득한 고수였다. 딱히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갤러하드가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그가 씩 웃으며 입을 뗐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

"초조해하면 서두르기 마련이고, 서두르면 그르치기 마련이네."

"하지만 데스 스타로부터 세상을 지키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자로 드러누웠던 갤러하드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갤러하드는 고갤 저었다.

"그리 생각하지 말게."

"……?"

"데스 스타와 싸우는 것은 비단 자네 혼자만이 아니야. 명심하게. 자네 곁엔 우리도 있다는 것을. 자네가 부족한 만큼 우리가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꿔 줄 힘이 되어 주겠네."

"……."

듣던 이든의 얼굴이 찰나 벙찐 듯한 표정을 했다.

잠시 뒤.

씨익.

이든의 입가에 더없이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갤러하드의 한마디로 그의 어깨에 있던 모든 짐이 내려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힘이 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밝게 미소 짓던 이든이 입을 뗐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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