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50)

216화.

갤러하드의 개인적인 고민까지 모두 들어주고 나서야 이든의 긴 하루도 끝이 날 수 있었다.

고단했던 걸까.

이든은 침대에 드러눕기 무섭게 코까지 골며 잠에 들고야 말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세상모르고 잠에 빠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단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쿵쿵.

동이 채 트기도 전인 새벽부터 누군가 이든의 집 문을 두드려 댔다. 그 소리에 이든이 눈살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비단 그뿐일까. 메리와 로즈 그리고 릴리까지 그 소리에 덩달아 잠에서 깨고야 말았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재차 들려왔다. 아무래도 누군가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보였다.

이든은 전날의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터덜터덜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와 문을 열었다.

끼익.

"누구시…."

"꾸!"

문밖에 서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쿠오락이었다.

‘꾸’ 소리를 듣던 이든의 얼굴이 한 차례 더 구겨졌다. 이든이 물었다.

"뭐야…. 쿠오락?"

"이든! 힘세고 좋은 아침!"

"……."

영문 모를 아침(?) 인사를 건네던 쿠오락이 피곤에 절어 있는 이든의 얼굴을 살피더니 고갤 갸웃거렸다.

"꾸?"

"……?"

"이든,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르다."

"…뭐가?"

"이든, 피곤해 보인다. 상남자다움 감소했다."

"……."

새벽부터 와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이든이 평소보다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든이 문밖의 기척을 살폈다. 기척을 살필 것도 없이 마을은 아직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곤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새벽인 것 같은데. 다짜고짜 무슨 일이야?"

"이든, 잊었나? 오늘. 쿠오락. 마을 구경시켜 주기로 하지 않았나."

"……."

다짜고짜 새벽부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마을 구경’을 시켜 달라니….

이 무슨 산책시켜 달라고 낑낑거리는 개소리란 말인가.

이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시간에?"

"꾸!"

"산책을?"

"꾸?"

아무래도 이든이 잠이 덜 깬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온 그였다.

이든이 정신 차리듯 고갤 젓고는 재차 입을 뗐다.

"아직 새벽이잖아. 뭔 마을 구경이야."

"이든. 게으른 소리 한다. 아직 새벽이라니. 벌써 새벽이다. 이 말 들어 보지 못했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쿠오락이 일순 말문이 막힌 듯 말끝을 흐리더니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그…. 일어나는 새가…."

수차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쿠오락이 고갤 갸웃거리더니, 되묻듯 입을 뗐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일찍 일어난다?"

"……."

이를 듣는 이든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그가 재차 한숨을 푹 내쉬곤 쿠오락을 향해 저리 가라는 듯 ‘훠이 훠이’ 손을 저었다.

"마을은 이따가 질리도록 구경시켜 줄게. 좀만 더 자자. 좀만."

이든이 매몰차게 문을 닫으려던 그때였다.

"꾸!"

이든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쿠오락이 성을 내듯 콧김을 쭉 뽑았다.

또 시작된 것이다. 상남자의 땡깡이….

문을 닫던 이든의 손이 덜컥 절로 멈추었다.

그사이, 쿠오락이 발을 동동 구르며 쩌렁쩌렁 외쳐 댔다.

"이든! 거짓말쟁이! 상남자는 거짓말 안 하는데! 이든은 거짓말 밥 먹듯이 한다! 상남자답지 못하다! 쿠오락 서운하다!"

"……."

저, 저기….

거짓말을 밥 먹듯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이든이 질린 얼굴로 쿠오락의 생떼를 듣던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더니 메리와 브라운 그리고 릴리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브라운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든을 불렀다.

"아들아…."

이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아,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강제로 깼단다."

이든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곧 조용히 시키겠습니…."

이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브라운이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산책시켜 주고 오렴."

…예?

"어려운 일 아니잖니?"

"하지만 아버지…."

"우리라도 잠 좀 자자…."

부모가 저리 솔직하게 말해 버리면 제아무리 이든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이든이 고갤 떨궜다.

"예…."

***

결국, 이든은 새벽부터 쿠오락을 끌고 산책에 나섰다.

걷는 내내 이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어 댔다.

‘오늘은 늘어지게 잠이나 푹 자려 했더니만…. 난데없이 새벽부터 강아지(?) 산책이라니.’

쿠오락이 ‘코흘리개 아이’에서 ‘개’로 하향 조정되는 순간이었다.

쿠오락이나 이든이나 참으로 개 같은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산책에 나선 쿠오락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훙! 훙훙!"

어찌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흥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든의 입장에선 주인(?)의 심정도 모르고 흥얼대는 쿠오락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던 쿠오락이 무언가를 가리키며 종알댔다.

"이든, 이든. 저기 봐라."

"보긴 뭘 봐. 안 보이는데."

"저기, 내 친구 몰린. 일하고 있다."

"…그래?"

쿠오락의 말대로 몰린은 새벽같이 일어나 무언가 골똘히 작업 중이었다.

쿠오락이 말했다.

"몰린은 일찍 일어난 새다!"

이든은 귀찮은지 어영부영 답했다.

"그래그래…."

"그리고 이든은. 게으른 새다!"

"……?"

…이놈이!?

이든은 자칫 쿠오락을 진짜로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몰린을 가리켰던 쿠오락의 손가락이 스윽 움직이더니 또 다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번에 가리킨 것은 순찰을 도는 불침번의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저들도 일찍 일어난 새다!"

"…쟤들은 그냥 불침번…."

"그리고 이든은. 게으른 새다!"

아놔….

이든의 머릿속에서 난데없이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빠직’ 소리가 났다.

이든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따 아이가…."

"꾸!"

쿠오락은 계산적이고, 깐깐하지만, 제 불리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뻔뻔한 상남자이면서 동시에 뒤끝이 참으로 긴 상남자였다.

이쯤 되면 쿠오락을 과연 상남자라 부를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쿠오락의 뒤끝을 전부 다 받아 주고, 간간히 만나는 병사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쿠오락을 소개해 주던 그때였다.

앞으로 영지 내 시장이 들어설 중심 거리에 도착했을 때, 쿠오락이 재차 무언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든!"

"왜."

"거리에 뜬금없이 비석이 있다. 이거 뭔가."

"아…. 그거?"

이든의 표정이 일순 무거워졌다.

한때는 마을 중앙 거리였던 이 자리. 거기엔 데스 스타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제라드 장군과 레온하르트 영지의 병사들을 기리는 비석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각종 길드와 상인들이 찾아올 커다란 시장이 들어설 곳이지만, 이든은 이 비석을 치우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한때는 아픔의 상징이었던 그것이, 지금은 레온하르트의 자긍심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세에 이곳을 이끌어 나갈 영지민들이 그 자긍심을 끝까지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또한 있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자신과 함께 용감무쌍히 데스 스타와 싸워 준 영웅들을 떠올리던 이든의 무겁던 입이 천천히 떼어졌다.

"그 비석은 삼 년 전 데스 스타에게 대항해 싸운 레온하르트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거야. 우리 영지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이면서 동시에 자긍심이랄까."

"그랬군."

이든의 말을 듣던 쿠오락의 얼굴이 심통 부리던 아까와 다르게 어느새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쿵쿵.

쿠오락이 비석 앞에 서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콧김을 길게 쭈욱 뽑아냈다.

오크의 예를 갖춘 쿠오락이 입을 뗐다.

"나. 쿠오락. 상남자 존중한다. 여기에 잠든 영웅들. 상남자들이다!"

"훗."

오크에게 있어 ‘상남자’란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칭찬이었다.

근데….

여기에 잠든 영웅들이 그것을 알리는 모르겠다.

아마 쿠오락의 조금 전 말을 듣고는 얼떨떨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든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곤 피식 웃자, 쿠오락이 고갤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꾸? 왜 웃나. 이든."

이든이 고갤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툭툭.

이든도 쿠오락이 그랬던 것처럼 비석을 향해 가슴을 두들겼다.

이든 역시 상남자였기 때문이다.

"쿠오락, 너의 말이 맞다. 여기 있는 영웅들은 상남자 중의 상남자였다."

쿠오락이 고갤 끄덕였다.

"꾸! 이든이 그렇게 봤다면 맞는 거다. 상남자는 상남자 알아본다. 이든. 게으른 새지만, 내가 인정한 상남자다."

"……."

미소 짓던 이든의 입이 정색하듯 꾹 다물어졌다.

다 좋았는데, 저놈의 게으른 새가 문제다.

쿠오락은 뒤끝이 긴 상남자였다.

아무래도 게으른 새가 영영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 이든이었다.

***

꼭두새벽에 시작했던 쿠오락 산책은 동이 트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계속됐다. 뭔 놈의 산책을 그리 오래도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쿠오락은 뒤끝도 길지만, 말도 많은 상남자였다. 산책 내내 뭐가 그리 궁금한 것도 많은지, 입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이든에게 이것저것 물어 대기 바빴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든도 쿠오락의 물음에 답해 주기 바빴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저 뒤끝 긴 상남자에게 게으른 새로 낙인찍혔는데, 불친절한 새로 낙인찍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자 영지민들도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하나둘씩 밖을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히 이목이 쿠오락에게 몰렸으나,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영지민들은 그다지 쿠오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엘프도 봤고.

드워프도 봤고.

삼 년 전에는 데스 스타와 언데드까지 목도한 그들이다.

오크쯤이야 웃으면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영지민들의 열렬한 환영에 쿠오락은 연신 싱글벙글 콧노래를 불렀다.

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리도 좋냐?"

"꾸! 인간들 환영 아주 좋다! 기쁘다! 나 관심받는 것 좋아한다!"

"그, 그래? 좋다니 다행이네."

이게 그 흔히 말하는 관심 종자인가…?’

이로써 쿠오락은 계산적이고, 깐깐하며, 자기 불리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치밀함에 뒤끝까지 길고 말까지 많은 관심종자 상남자가 되었다.

세상엔 다양한 인간상이 있다.

그리고 쿠오락은 점차 다양한 인간상을 집대성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은 어떤 존재가 될까.

문득 기대부터 되는 이든이었다.

***

쿠오락의 산책을 무사히 끝내고, 이든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했다.

우선 그는 스왈로 촌장을 찾기 전, 몰린의 대장간부터 들렀다.

꼭두새벽에 쿠오락을 산책시킬 때, 몰린 역시 깨어 있던 상태로 무언가 한창 작업 중이었다.

그 무언가가 대체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땅땅땅!

대장간 근처에 다가가기 무섭게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든이 대장간 안에 들어섰지만, 몰린은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담금질과 사투 중이었다.

이든은 천천히 몰린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출 때였다.

잠시 숨을 돌리던 몰린이 주변을 살피다가 이든을 보더니 화들짝 놀랬다.

"영주님!"

몰린이 부르는 소리에 이든이 웃어 보였다.

"이제야 몰린 님 목소리를 듣는군요."

몰린이 안절부절못한 얼굴을 했다.

"언제부터 와 계셨던 겁니까. 부르지 않으시고요…!"

"그럴 수야 없죠. 몰린 장인님의 역작이 탄생할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나저나 아까 새벽에 돌아다니다 보니 몰린 님도 그때부터 깨어 계시던 것 같던데요?"

"아…! 깬 게 아니라. 밤을 새웠습니다."

이든이 놀란 얼굴을 했다.

"밤을 새우셨다고요?"

몰린이 웃으며 머릴 긁적였다.

"하하… 예."

"아니… 대체 무엇을 만드시고 계셨길래 밤을 새우신 겁니까?"

"아 그게 말이지요…."

말끝을 흐리던 몰린의 시선이 이든에게서 다시 작업 중이던 것으로 옮겨졌다.

그것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몰린이 천천히 입을 떼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레온하르트 님의 의족과 의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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