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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218/250)

218화.

이든의 말을 듣던 스왈로가 고갤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식량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군요.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듣기론 호송 일이란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영주님께서 괜한 고생은 하지 않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스왈로의 말에 이든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유니콘 길드 출신인 것 잊으셨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고생이랄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제 능력이면 거리가 얼마나 됐든 간에 한걸음에 갈 텐데요."

"아…!"

스왈로가 일전 몇 번 봤던 이든의 이공간 문을 떠올렸다.

참으로 편리하고 신기한 능력이지 않았던가.

확실히 그거라면 유니콘 길드 입장에서도 운송을 편하고,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스왈로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영지 내 식량 문제는 전적으로 영주님만 믿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이런 일은 본래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해야 하는데…."

이든이 정색했다.

"아랫것들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윗사람 아랫사람 할 일이 따로 있답니까? 각자가 할 줄 아는 일을 하면 그만이지요. 그리고 사실 제가 말이 좋아 영주지. 영주가 해야 할 일을 스왈로 촌장님께서 전부 다 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역시 몸 쓰는 일이 적성에 맞습니다."

"그래도…."

"자자,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괜한 걱정이 태산인 스왈로를 이든이 자리에 앉혔다.

스왈로가 멍한 얼굴로 강제로 앉혀지는 사이, 이든이 말을 이었다.

"제가 다녀오는 동안 촌장님께선 평소대로 저 대신 영지를 잘 살펴 주십시오. 식량 문제는 제가 알아서 잘 해결하고 올 테니까요. 아시겠죠?"

"아…. 예."

"자, 그럼 그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혹시 더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뇨. 이 외엔 딱히 보고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럼 영지 현황 보고는 여기서 마치는 것으로 하고, 오래간만에 함께 차라도 한잔하시죠. 그동안 이 일 저 일로 원체 바빴던 탓에 둘이서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제대로 없지 않았습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쪼르르.

이든이 찻주전자를 집어 들고는 능숙하게 스왈로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가 조금 식은 탓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의 맛이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이든이 별안간 이렇게 말했다.

"그간 저 대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이든의 말을 듣던 스왈로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폈다.

그간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영주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온 것이다.

"뭘요. 오히려 이 늙은이를 신임해 주시고, 일을 맡겨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신임할 수밖에요.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 관해선 저보다 선배 아닙니까?"

"하하…. 그래 봤자 겨우 마을의 촌장 일이었는걸요."

"촌장의 일과 영주의 일이 뭔 차이입니까. 그저 마을이 좀 더 커진 정도죠. 뭐."

"그런가요?"

"암요."

이든이 제 찻잔에도 마저 차를 따랐다. 이든과 스왈로가 오래간만에 마주 앉아 차 한 모금으로 서로 목을 축이던 그때였다.

별안간 이든이 조심히 입을 뗐다.

"저…. 근데 있잖습니까?"

"예, 영주님."

"제가 자릴 비우는 동안 촌장님께서 따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스왈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주가 이렇게까지 따로 언급할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일일 것이라 생각이 든 탓이었다.

스왈로가 입가에 가져다 댔던 찻잔을 놓고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어떤 일입니까?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그…."

이든이 말끝을 흐리다가 재차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스왈로 입장에선 대체 얼마나 중한 일이기에 영주가 저리도 뜸을 들일까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목을 축였던 이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있잖습니까. 쿠오락이라고."

스왈로가 고갤 갸웃거렸다.

"쿠오락?"

"그 왜 얼마 전에 제가 데려온 오크 말입니다."

"아! 누군지 압니다. 시키실 일이 혹시 쿠오락 님과 관계된 일입니까?"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예. 그…. 하…! 나 참, 제가 촌장님께 이런 부탁까지 드릴 줄은 정말 몰랐는데."

"……?"

"저 없는 동안 쿠오락 산책 좀 부탁드립니다."

"……."

…예?

스왈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두 귀로 제대로 듣고도 지금 본인이 뭘 들은 것이냐는 얼굴이었다.

스왈로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곧장 되물었다.

"저, 저기…. 영주님, 쿠오락 님 산책…. 이라 하셨습니까?"

"예."

"……."

"……."

스왈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 아니…. 쿠오락 님 산책이라니요. 쿠오락 님이 무슨 개도 아니고."

이든이 ‘옳거니!’ 손뼉을 쳤다.

"맞습니다. 개! 개라 생각하십시오. 그게 마음 편할 겁니다."

"…예?"

"사실 제가 쿠오락에게 영지 구경을 시켜 준다고 약속을 해서 오늘 새벽에 산책을 시켰었는데, 이놈이 그게 참 재미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앞으로 계속 영지 산책 좀 시켜 달라네요?"

"……."

"근데 촌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체 바쁘지 않습니까? 이틀 뒤엔 식량 문제도 해결하러 수도에 가야 하기도 하고요."

스왈로는 뒤늦게 깨달았다.

조금 전, 이든이 말한 영주의 일과 촌장의 일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에 숨겨져 있던 함정을 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인 것이다. 하나, 이제 와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이든이 스왈로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쿠오락에게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아, 참고로 이놈이 밤잠이 없습니다. 아마 매일 꼭두새벽에 촌장님 집 앞을 찾아가서 산책시켜 달라 조를 텐데… 이, 일종의 알람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새벽 알람."

"……."

"참고로 산책 안 시켜 주면 어떤 난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영지의 평화를 위해 쿠오락 산책. 꼭 좀 부탁드립니다."

"……."

…저, 저기 영주님? 영지의 평화도 평화지만, 제 평화는요?

가슴에서 메아리치는 이 말이 목구멍 바깥으로까지 나오려다 말았다. 어차피 철회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미 본인 입으로 맡겨만 달라고 말했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스왈로가 울상을 짓고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차 맛이 짜다.

눈물이라도 떨어져 한 방울 섞인 걸까. 모를 일이다.

***

쿠오락이란 짐을 떠넘기는 데 성공한 이든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가 늘 수련하던 공터를 향해 걸었다.

가벼워진 마음에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진 탓일까. 평소보다 공터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휘익!

공터에 도착하자 난데없이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든의 걸음도 별안간 덜컥 멈추었다.

‘누가 수련 중인 건가?’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하러 오던 이곳에 먼저 온 이가 있던 것이다. 그런데 기척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이든의 기감이 전방에 수련 중이던 기척을 향해 쏘아지며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휘익.

이든이 온 것도 모르는지, 무언가 휘두르는 소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기척을 살피던 이든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지어졌다.

‘제이콥이었군.’

먼저 와 수련 중이던 이는 다름 아닌 이든의 세 번째 제자 제이콥이었다.

그가 수련 중인 검법에서 천마심공의 마기가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누군지 알아내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던 것이다.

제이콥이 휘두르던 목검이 마지막 초식을 막 끝낼 무렵이었다.

"훌륭하군."

대뜸 들려온 이든의 목소리에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스승님!"

제 스승을 발견한 제이콥이 반갑게 웃으며 외치더니, 어느새 이든의 코앞까지 달려와서는 곧장 기립했다.

‘허, 빠르네?’

이든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 제이콥의 검술 수련에서 그 정교함에 한 번 놀랐건만, 제자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에 또 한 번 제대로 놀란 것이다.

제이콥이 목검을 휘두르던 장소는 이든이 서 있던 곳과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저 이든조차 놀랄 만큼 단숨에 거리를 좁힌 것이다.

검술뿐만 아니라, 보법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제이콥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스승을 바라보는 사이, 이든이 만족스러운 얼굴빛을 하며 고갤 주억거리곤 입을 뗐다.

"그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구나. 너의 성장에 잠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든의 칭찬에 제이콥이 얼굴을 붉혔다.

"헤….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인걸요."

"음."

제이콥의 빠른 성장은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이뤄 낼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제이콥은 천재였다.

남다른 오성과 영특함 자체가 일반 사람과는 궤를 달리했는데, 그런 아이가 노력까지 해 버리니 말도 안 되는 눈부신 성장을 보이는 것이었다.

재능과 끈기를 동시에 갖춘 이들은 흔치 않다.

이든 역시 그런 제이콥의 그릇을 일찍부터 알아보고는, 자신의 무공을 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승시킨 것이었고.

물론 제이콥은 자신이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는데, 이든은 이 사실을 계속 함구할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자만으로 이어져 제이콥의 성장에 방해될 수도 있다는 그의 배려였다.

이든이 시치미 뚝 떼며 물었다.

"그래, 수련하는 동안 달리 궁금한 것은 없었고?"

"네!"

"……."

당돌한 것 보소?

이든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했다. 그의 반응은 당연하였다.

보통은 물어보면 자신의 수련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질문이 날아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첫 제자였던 릴리도 그랬지만, 무(武)에 관해 문외한이 아닌 두 번째 제자였던 발리스타조차도 자신이 올바른 수행법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비단 저 둘뿐일까.

천하의 이든조차 전생의 소교주였던 시절에 자신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기회가 될 때마다 선대 교주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제이콥은 달랐다.

자신이 행하는 행동에 일체의 의심조차 안 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두 가지 경우다.

의심조차 안 하는 게으른 멍청이거나, 아니면 정말 자신의 수련법에 자신이 있거나 말이다.

제이콥은 똘똘한 녀석이었다.

전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가 확실하다면 응당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간 성과를 제대로 확인해 볼 겸 대련 한번 해볼까?"

"…예!?"

제이콥이 놀라며 곧장 되물었다.

"제가 스승님하고 대련을요…?"

이든이 피식 웃었다.

"왜, 겁나느냐?"

"…겁난다기보단 당연히 저는 당연히 스승님의 상대가 안 될 텐데요?"

"원 녀석, 내가 언제 너보고 나를 이겨 보라고 했느냐? 그냥 가볍게 검을 주고받잔 얘기다. 잔말 말고 따라오거라."

"예…."

이든은 제이콥을 이끌고 공터 한가운데로 왔다.

제이콥이 그의 주변에서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이든이 보검의 검집만 따로 빼서 살짝 쥐어 보였다.

"난 지금 당장 목검이 없으니, 이것으로 하마."

"예…!"

이든이 별다른 자세도 잡지 않고 검집을 축 늘어뜨렸다.

이든이 제이콥에게 손짓했다.

"자, 최선을 다해 그간 배운 것을 마음껏 펼쳐 보아라."

"마음껏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래,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써도 좋다. 자, 들어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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