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250)

222화.

날은 금세 저물었다.

병사들은 이미 진즉에 해산한 상황.

반면에 온종일 쉬지 않고 대련을 거듭한 제이콥은 기진맥진한지 아예 연무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발리스타가 난감해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막내가 완전히 뻗었소."

듣던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뻗을 만하지. 쉬지 않고 대련을 이어 간다는 게 보통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깐."

"하긴…."

"그건 그렇고 어때? 다들 녀석의 대련 감상한 총평 좀 읊어 봐."

이든의 물음에 발리스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거두절미하고 심각했소. 대련 내내 잔뜩 겁먹어선 움츠러들기 일쑤였고."

릴리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주억거렸다.

"맞아요. 제이콥이 선공할 때는 기세가 제법 날카롭다가도 막상 병사들이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반격이 날아오는 순간 처음의 그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달까요?"

발리스타가 재차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 내용이 매번 대련마다 똑같았소. 이만큼 했으면 뭔가 깨달은 게 있어야 할 듯싶은데, 그게 전혀 없었달까. 한마디로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소. "

"음."

하나같이 똑같은 두 교관의 총평에 이든이 절로 나오는 침음성을 삼키던 그때였다.

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기사 아카데미 시험, 뒤로 물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차피 무도 대회도 사라지고 상시 모집으로 바뀌었으니 조금 늦게 입학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릴리도 그렇고 발리스타도 한때는 기사 아카데미 입시를 목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니콘 무관 학교의 교관이었다. 이쪽 방면으론 빠삭하게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당장은 무리인가.’

이든 역시 릴리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갤 주억거리던 그때였다.

"할 수 있어요…."

대뜸 연무장 쪽에서 제이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리스타와 릴리의 시선이, 그리고 이든의 관심이 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지친 듯 내내 드러누워 있던 제이콥이 어느새 목검을 역수로 쥐고는 의지한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맥아리라곤 전혀 없이 일어선 제이콥이 말을 이었다.

"시험…. 미룰 필요 없어요. 저, 훈련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에 발리스타가 혀를 차듯 입을 뗐다.

"아서라. 너 그러다가 진짜 쓰러진다."

"…계속할 겁니다. 대련…. 속히 진행해 주십시오."

성치 않은 몸으로 막무가내다시피 한 제이콥의 말에 발리스타가 이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얀마, 그 상태로 무슨 대련을 계속하겠다고. 그리고 넌 시간 감각도 없냐. 이 오밤중에 너 하나 때문에 병사들까지 잠을 포기하란 소리야?"

"……."

발리스타의 쓴소리에 검을 쥔 제이콥의 손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의 쓴소리에 화가 나서라기보단 이만큼 했음에도 발전이라곤 없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분통이 터져서였다.

"하아…."

그 모습에 발리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이콥의 심경이 얼마나 답답하고 분한지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발리스타뿐일까.

사질인 릴리도.

그리고 스승인 이든조차 제이콥의 마음을 더 없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이콥이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자 발리스타가 이를 어쩌면 좋겠냐는 듯 이든을 불렀다.

"이든 형…."

이든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고갤 주억거리고는 곧장 대답했다.

"녀석이 저토록 원하는데 스승인 내가 감수해야지. 발리스타."

"응?"

"목검을."

"목검? 목검은 왜…. 설마, 이든 형이 직접 대련하려고?"

"병사들은 쉬어야 하는데, 그럼 내가 하지, 누구에게 시키겠냐. 너희들도 이만 들어가 봐."

발리스타가 이든에게 목검을 내밀다가 곧장 회수했다.

"에헤이! 뭔 이든 형이 직접이야. 그리고 이든 형은 내일 당장 수도에 가야 하지 않소. 큰일을 앞둔 사람이 무슨! 됐고. 이든 형은 들어가 쉬쇼. 막내는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까."

"네가?"

이든이 고갤 갸웃하며 묻던 그때였다. 릴리 역시 한몫 거들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어여쁜 막내를 가르치는데, 이 이쁜 누님이 빠질 수야 없지. 나도 도와줄게."

발리스타가 일순 인상을 썼다.

"…너는 왜?"

"너? 너어? 이 곰탱이가 그새 못 참고 기어오르지 아주. 얼굴 펴. 안 펴? 진짜 날 잡고 제대로 굴러 봐야 정신 차리지. 엉? 억울하면 나보다 일찍 제자로 들어오든가."

"……."

발리스타의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저 정신 나간 년이 내 사질이라니. 늦게 들어온 내 탓이지! 내 탓이야…!!!’

발리스타가 울상을 지으며 아무런 반박도 못 하던 그때였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한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발리스타와 릴리의 시선이 자연히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하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너희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마을의 병사들이 어느새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저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나왔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취침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릴리까지 자원해서 나서겠단 마당에 병사들의 오지랖까지 더해지자 발리스타가 노발대발하며 따지듯 물었다.

"너희들 취침시간인데, 안 자고 왜들 나와 있어?"

병사들 중 한 명이 대표로 입을 뗐다.

"저희 역시 제이콥을 그냥 볼 수만은 없으니까요."

"뭐…?"

"제이콥은 제라드 기사 단장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에게 받은 은혜가 있는 데 저희가 어찌 가만 볼 수만 있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희들까지 그렇게 나서면 당장 불침번은 어떻게 하고, 내일 훈련은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어서 안 들어가?"

발리스타가 훠이훠이 손을 저으며 쫓아내려 하자 병사들이 반항하듯 일제히 한목소리를 냈다.

"저희도 돕게 해 주십쇼!"

"맞습니다! 저희도 제이콥을 돕고 싶습니다."

"제이콥이 무엇이 문제인지는 저희도 잘 압니다. 교관님들이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얼추 실력이 비슷한 저희와 하면서 대련에 익숙해지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이것들이 좋게 말하니까. 어서 안 들어가!?"

발리스타가 신경질적으로 달려들 듯이 말하던 그때였다.

이든이 손을 뻗어 발리스타를 제지했다.

"발리스타, 잠깐."

"응?"

흥분한 곰 한 마리를 진정시킨 이든이 병사들에게 물었다.

"제이콥의 대련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어. 그런데도 정말 괜찮겠나?"

듣던 병사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답했다.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밤을 새우도록 대련하는 건 제이콥이고, 어차피 저희들은 돌아가면서 대련 할 텐데. 잠자는 시간 조금씩만 포기하면 대련과 불침번 모두 어렵지 않게 가능합니다."

"음."

이든이 짐짓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갤 끄덕였다.

"좋아. 다들 이렇게 나서 준다니 고맙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제이콥을 부탁한다. 릴리, 발리스타."

"네."

"말씀하쇼."

"제이콥에게 확실한 조언을 해 주려면 병사들만으론 안 돼. 너희들이 계속 지켜봐 줘야 해. 병사들이야 돌아가면서 제이콥과 대련을 진행한다지만, 너희 둘은 진짜로 함께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어. 괜찮겠어?"

발리스타와 릴리가 코웃음 치며 답했다.

"이를 말이요. 이든 형한테 훈련받았던 때 생각하면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요. 까짓거 밤새워 보지 뭐."

"우리 곰 사제가 간만에 옳은 말 하네. 맞아요. 밤새우는 게 뭐 별거라고."

"아 진짜 또 곰이라 하네!?"

"훗."

저마다 한몫 거들겠단 제자들의 반응에 이든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든이 평소대로 표정을 굳히곤 제이콥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콥."

서로 돕겠단 형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이콥이 스승이 부르는 소리에 바짝 기강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보다시피 널 돕겠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그러니까…. 기사 아카데미 시험 날짜가 잡히기 전까진 죽었다고 생각하고 대련하고, 또 대련해라. 지금의 네가 기사 아카데미 시험을 통과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할 수 있겠지?"

자신을 돕겠단 이 많은 사람의 관심이 부담이 될 법하다.

하나.

그것이 훈련에 방해가 될 이유는 없다.

제이콥이 고갤 끄덕이며 힘 있게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연이은 대련에 지쳐서 맥아리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저들이 자신의 등을 떠받쳐 주는 만큼 그 역시 앞으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제자의 대답을 듣던 이든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시간 끌 필요 없지. 그럼 다들 훈련 시작하도록."

이든의 최종 허락이 떨어지고, 제이콥을 성장시키기 위한 이들의 맹훈련이 밤새도록 지속됐다.

이든은 그런 제자들을 뒤로하고, 내일 일과를 위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절로 노곤해질 만큼 긴 하루를 보냈지만, 침대에 누웠음에도 곧장 잠에 들지는 못했다.

이를 악물며 노력하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한가로이 잠이 들 만큼 그는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든은 한참을 깬 상태로 제자들의 기합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새벽이 깊어질 무렵에야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중간중간 기합성이 울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도중에 잠에서 깨거나 그러진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장가라도 되는 것마냥 기분 좋은 얼굴로 잘만 자 댔다.

***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레온하르트 영지엔 수도에서 온 유니콘 길드가 도착해 있었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었는데, 다름 아닌 케인 대장의 일행들이었다.

중간에 휴식도 없이 곧장 수도로 떠나야 하는 바쁜 일정이지만, 이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간만에 함께하게 된 동료 때문이었다.

별안간 로즈가 뛰어들며 이든의 팔을 와락 껴안았다.

"이든, 정말이야!?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가게 됐다는 게!?"

로즈의 돌발 행동에 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수도에 볼일이 있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로즈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됐다.

"이게 얼마 만의 동행이야… 정말 옛날 생각 난다…!"

옆에서 로즈의 말을 듣던 톰슨이 낄낄 웃어 대더니 입을 뗐다.

"이든, 너 없는 동안 로즈 쟤가 너 보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러 댔는지 너는 모를 거다. 잠꼬대하는 소리까지 하면 하루에 수백 번도 널 찾아댔을걸?"

가뜩이나 상기됐던 로즈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내가 무슨 잠꼬대하면서까지 이든을 불러댔다고…!"

일순 로즈의 시선이 동료들을 훑었다.

동료들이 저마다 그녀를 보며 고갤 끄덕이고 있었다.

톰슨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마냥.

로즈가 이젠 김까지 나려 하는 빨개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갤 푹 숙이던 그때였다.

이든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입을 뗐다.

"여러분들과 간만에 제대로 나누는 인사라 정말 기쁘지만, 아쉽게도 저희 호송 일정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음?"

듣던 케인과 그의 일행들이 고갤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수도까지는 넉넉히 일주일 이상 기간을 잡아야 할 만큼 거리가 제법 상당했다.

때문에 식량도 넉넉하게 챙겨 왔건만, 일정이 그다지 길지 않을 거라니…. 쉬이 이해가 가지 않을 말이었다.

케인이 대표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일정이 그다지 길지 않을 거라니. 혹 서둘러야 할 만큼 수도에 급한 용무라도 있는 겐가? 엘프의 눈물을 전달해 주기로 한 상단의 행사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네만."

이공간 문을 이들에게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이든이 웃으며 고갤 저었다.

"이게 참, 어찌 설명해 드리기 힘든 부분이라. 이따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음?"

여전히 알 수 없는 이든의 대답에 케인이 재차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하던 그때였다.

수레에 엘프의 눈물이 담긴 상자를 싣던 드워프 중 하나가 외쳤다.

"영주님, 엘프의 눈물을 모두 실었습니다!"

호송 물품은 엘프의 눈물이 전부였기에 싣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든이 씩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자, 그럼 다들 출발하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