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250)

223화.

그간 바빴던 일정 탓에 피로가 쌓인 걸까.

"후우…."

꼬박 밤을 새운 유니콘의 길드장 게럴드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그의 입가에 절로 쓰디쓴 웃음이 지어졌다.

‘결국, 밤을 새워 버렸군.’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이, 어두컴컴하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동은 진작에 트였는지 아침의 햇살이 그의 집무실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일에 치여 사무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니, 남들이 들으면 괜찮냐고 경악할 일이지만, 최근 게럴드에겐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스윽스윽.

그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한숨 돌리기 위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진 잠시 뒤였다.

탁.

"…음?"

기척과 함께 자신이 자리한 탁자 위에 무언가 놓이는 소리가 들리자, 감겼던 게럴드의 눈이 살짝 떠졌다.

그의 시선이 탁자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우는 찻잔을 지나, 그 차를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이의 얼굴로 향했다.

일순 게럴드가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누군가 했더니만, 카르엘이었군."

카르엘이 마주 웃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신 것 같아서요. 차 한잔 어떠세요?"

"좋지. 그렇지 않아도 마침 숨 좀 돌리려던 참이었거든. 자네도 함께 한잔하지."

"그럴까요?"

쪼르르.

카르엘이 자신의 찻잔을 그의 맞은편에 놓고는 차를 따랐다.

그리고 마주 앉기 무섭게 둘은 숨을 고르듯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게럴드도 그렇지만, 카르엘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황금성 길드를 포함한 수도의 거상들과 ‘엘프의 눈물’을 선보일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 중인 탓에 그간 숨 돌릴 틈이라곤 없이 달려온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참 정적이 흐르던 그때였다.

탁.

안의 내용물을 모두 비운 뒤,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게럴드가 무안한 얼굴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현장의 행사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나?"

서로 숨 좀 돌리자고 마련된 자리건만, 입만 열면 나오는 것이 결국엔 일 얘기였다.

카르엘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네, 여전히 경쟁이 살벌하긴 했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행사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게럴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듯 숨을 내쉬었다.

"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정말 다행이야."

대체 얼마나 대단한 행사를 준비 중이길래 가슴까지 쓸어내리느냐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게럴드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엘 마저 게럴드의 말에 동의하듯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다들 칼을 간 듯한 분위기라 저러다 혹여 마찰이라도 생기면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을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어쩔 수 없지. 다들 이번 일을 계기로 레온하르트 영지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니 말이야. 투자 금액이 어디 보통이었나? 뿌린 만큼 거둬야 할 테니 이번 행사를 통해 뽕을 뽑으려고 아주 혈안이 되어 있겠지."

"하긴요…."

카르엘이 고갤 끄덕이던 그때였다.

행사와 관련된 얘길 나누던 중 문득 떠올랐는지 게럴드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지?"

주어라곤 없는 개떡 같은 물음이었지만, 카르엘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예, 지금쯤이라면 엘프의 눈물을 실은 호송대가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막 출발했을 겁니다."

"으음. 다른 것도 아니고 엘프의 눈물이야. 호송대가 이곳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와야 할 텐데 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유니콘에서 가장 뛰어난 정예들만으로 꾸려서 보냈잖아요. 별다른 문제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지."

"게다가."

그때였다.

카르엘이 오늘 막 급보로 날아온 한 통의 서신을 게럴드에게 건넸다.

서신을 건네받은 게럴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건 뭔가?"

"이든 영주님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이든한테서?"

카르엘의 말을 듣던 게럴드가 급히 서신을 뜯어 살폈다.

안의 내용엔 이든이 호송대와 함께 수도로 올 예정이라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카르엘이 웃으며 입을 뗐다.

"이든 영주님께서 호송대와 함께 수도로 올 예정이랍니다."

게럴드가 마주 웃어 보였다.

"과연 그렇군. 이든과 함께 오는 중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맞아요. 오히려 엘프의 눈물을 노리고 수작을 벌이려는 놈들을 걱정해야 할 판이죠. 이든 영주님이 어디 보통 분이세요?"

"으음. 그것도 맞는 말이야."

이든이 유니콘 길드의 호송 대원이었던 시절은 이젠 옛날 고릿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든은 여전히 유니콘에게 있어 신뢰의 상징이었다.

이든과 엘프의 눈물 호송대가 함께 오게 됐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절로 안심부터 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여기까지 아무리 늦어도 대략 칠 일 정도…. 행사 개최일은 십 일 뒤였지?"

카르엘이 고갤 끄덕였다.

"네. 행사는 십 일 뒤니까. 약속대로 개최일 전까지 배송을 끝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엘프의 눈물이야 당연히(?) 안전하겠다.

행사의 개최일까지 운송이 늦지도 않겠다.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 가는 것 같은 마음에 겔러드가 씩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랄까.

그때였다. 게럴드가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찻주전자를 쥐곤 비어 버린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넘치도록 찻물을 따르던 게럴드가 카르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침부터 술에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걸로라도 간단히 건배하겠나?"

"네, 부탁드려요."

쪼르르.

카르엘의 찻잔에까지 마저 찻물을 따른 게럴드가 가득 든 자신의 잔을 들곤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자, 그럼 호송 대원들과 엘프의 눈물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그리고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감하기 바라며, 맞죠?"

"맞아."

챙.

유리로 된 잔이 맞부딪치며 맑은 소릴 냈다.

찻잔으로 건배를 할 날이 올 줄이야.

물론, 술이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마셨던 차에 불과한 만큼 분위기는 살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이런 건배사도 딱히 나쁘진 않았다.

게럴드와 카르엘이 따랐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켜지는 못하고 호호 불며 홀짝이던 그때였다.

콰앙!

무언가 게럴드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차를 마시던 게럴드와 카르엘은 난데없는 소란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옷에 차를 쏟은 게럴드가 얼굴을 구기며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휴, 아침부터 대체 웬 소란인가?"

게럴드의 물음에 조금 전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인 사무관이 연신 숨을 헐떡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아하아…. 길드장님, 지금 어서, 하아하아…. 어서 밖으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보통 사무관들은 하는 일이 일인 만큼 침착하기 그지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침착한 것을 넘어서 재미없는 이들이 다분했다.

조금 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한데, 평소 그러던 놈이 난데없이 소란을 일으키곤 진정조차 못 하는 저 모습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때였다. 게럴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준비 중인 행사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게럴드의 말을 듣던 카르엘마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서두르다시피 사무관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사무관이 거칠게 고갤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일단 나와 보세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단 말입니다!!!"

"……?"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사무관의 반응에 카르엘과 게럴드가 일순 마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사이, 사무관은 발을 동동거리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이참!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빨리 나와 보시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급기야 길드장과 비서장에게 큰소리까지 내는 사무관이었다.

이게 웬 하극상인가 싶지만, 어쩌겠는가.

평소 저러지 않은 이가 저러는 것이었으니 응당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럴드와 카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무관이 재차 서두르라는 듯이 손짓했다.

"어서어서, 빨리요!!!"

게럴드가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 참, 알았네. 알았어. 내 가네. 가! 사람 참, 왜 그리 서두르는가. 누가 보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줄 알겠어."

***

"……."

게럴드의 입이 턱이라도 빠진 것마냥 쩌억 벌어졌다.

"……."

카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반응이 비단 이 둘뿐만은 아니었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사무관들 역시 하나같이 비슷한 얼굴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래도 개중에 우두머리라고 게럴드가 나서서 천천히 입을 뗐다.

"그, 그러니까…."

게럴드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던 중 바르르 떨리는 그의 손이 시선이 향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저, 저게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어떻게…?"

게럴드의 손가락 끝과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

거기엔 오늘 막 레온하르트 영지에서 출발했을 호송대가 길드 앞에 떡하니 나타나 있었다.

호들갑을 떨어 대는 사무관의 모습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졌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더니만, 이건 정말이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닌가.

게럴드가 호송 대원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 이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오늘 출발했을 자네들이 어떻게 벌써 여기에 와 있는 건가…!?"

하나,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은 비단 게럴드와 사무관들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왜 수도에 있다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온하르트 영지 아니었어…?"

"……."

호송 대원들 역시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게럴드의 눈에 케인 대장이 들어왔다. 그가 케인을 붙잡고 흔들다시피 하며 물었다.

"이, 이보게. 케인 대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다들 다친 데는 없어 보이고, 수레도 말짱하고 어떻게 벌써 온 건가? 응!? 말 좀 해 보게!"

케인이 입을 뗐다.

"그게. 이든이 달리자고 해서 달렸는데 갑자기 이든이 칼을 휘두르더니만, 이곳으로 뿅 하고 왔습니다…."

…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침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저 케인조차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하나같이 정신들을 차리지 못하는 호송 대원들 속에서 대뜸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럴드 길드장님, 잘 지내셨죠?"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이든의 것이었다.

그런데…. 뭐지?

다들 넋을 놓은 가운데 저놈의 목소리만 유달리 밝고 말짱해 보이는 이유는…?

이 해괴한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군지 절로 유추가 되는 순간이었다.

게럴드가 당연하다는 듯 이든에게 시선을 돌리곤 물었다.

"자네, 대체 뭔 짓을 벌인 겐가? 오늘 출발한 것 아니었나? 어떻게 벌써 수도에 와 있는 건가. 어떻게!?"

다친 이도 없고, 엘프의 눈물도 문제없이 도착했겠다.

경사나 다름없는 일이건만, 게럴드에게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

저들이 어떻게 벌써 수도에 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든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긴요. 제가 아는 가장 빠른 지름길로 달려왔지요."

하지만 가장 말짱해 보이는 이든 역시 이해 못 할 말만 내뱉긴 마찬가지였다.

이공간 문에 대해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게럴드는 아무도 속 시원히 대답을 안 해 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대체 어떻게 온 거냐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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