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수도에 도착한 이든은 넋이 나간 유니콘 길드원들을 뒤로하고, 영지 내 식량 문제부터 의논하기 위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앞엔 카르엘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로 조금 앞장서 걸으며 이든을 안내하고 있었다.
카르엘이 안내하는 곳은 다름 아닌 그들이 준비 중인 행사 현장.
황금성 길드의 버핏 경을 포함한 수도의 거상들 모두가 며칠 뒤 있을 행사 준비를 위해 현장에서 진두지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 준비는 수도 광장에 자리한 커다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대관하여 진행 중인 상태였다.
보통 황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이 크고 넓은 건물을 상단이 통째로 장기 대관하다니, 레온하르트 영지와 연을 맺게 된 상단들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
가느스름해진 버핏의 눈이 한곳을 뚫어지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갤 저었다.
"아냐."
버핏의 반응에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서 있던 사무장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버핏이 탐탁지 못하단 얼굴로 답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나."
"…하, 하지만 엘프의 눈물이 전시될 장식대입니다. 이 정도는 화려해야 보다 더 많은 귀빈들의 시선을 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버핏이 한숨을 쉬곤 고갤 저었다.
"이 사람아, 이곳에 일한 지가 몇 년째인데 아직도 본질을 놓치고 있는 건가?"
자신을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는 버핏의 말에 사무장이 고갤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본질…. 이요?"
버핏이 고갤 끄덕였다.
"자, 내 자네에게 한 가지 묻겠네."
"아, 예…!"
"지금 우리가 준비 중인 행사의 주인공이 무언가?"
사무장이 당연하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그야, 엘프의 눈물 아니겠습니까."
"그래, 맞아. 엘프의 눈물이지. 그럼 응당 주인공이 가장 빛나 보여야겠지?"
"그렇지요?"
"한데, 자네가 가져온 이 장식대들을 다시 한번 보게."
사무장의 시선이 자신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온 장식대로 향했다.
군데군데 아름다운 문양과 보석이 박혀 있고, 도금까지 되어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대들의 모습이 재차 눈에 들어왔다.
"……!"
비로소 자신이 준비해 온 장식대의 문제가 무언지 깨달은 걸까.
사무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자, 장식대가 너무 화려하군요."
버핏이 고갤 끄덕였다.
"맞아, 바로 그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야 할 주인공은 엘프의 눈물인데, 장식대가 이렇게 화려해 버리면 시선이 분산되어 그만큼 집중도가 떨어지지 않겠나?"
"화, 확실히 그럴 것 같습니다."
"화려함에 화려함이 더해진다고 해서 더 대단한 화려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네. 때론 진흙 속의 진주나 허허벌판의 꽃 한 송이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법처럼 말이야."
사무장이 버핏에게 고갤 숙였다.
"오늘도 길드장님께 이렇게 한 가지 배웁니다. 속히 다른 장식대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으음."
버핏이 고갤 주억거리다가 몇 가지 첨언했다.
"그렇다고 싼 장식대를 가져오라는 말은 아니네. 재질 자체는 어두운 톤에 고급 목재로 만들되 아무런 무늬나 장식이 없는 것으로. 알겠는가?"
"예!"
대답한 사무장이 급히 새 장식대를 구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사이, 버핏의 시선이 재차 행사를 준비 중인 현장을 훑었다.
‘대단하군.’
황금성 길드가 배당받은 행사장의 풍경도 그렇지만, 다른 상단의 행사장 역시 만만치 않은 준비성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치열하게들 준비 중인지, 버핏은 중간중간 다른 상단의 길드장들과 눈이 몇 번씩 마주쳤음에도 그 분위기 탓에 말 한번 걸어 보지 못했다.
‘그만큼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겠지.’
황금성을 포함해 이들이 레온하르트 영지에 투자한 금액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엘프의 눈물에 관해서만 거래를 튼 것도 아니고, 레온하르트 영지 내의 지부를 세우기로 약조한 상태라서 더욱 그랬다.
지부를 세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돈이 들기 마련이지만, 그 외로 들어가는 추가적인 비용 역시 만만치 않게 부담이 되기 마련이었다.
황금성 길드야 대륙 제일가는 상단이고, 넘쳐나는 것이 돈이니 눈 한번 질끈 감고 투자를 강행했다지만, 모든 상단이 황금성 같지는 않다.
황금성을 제외한 다른 상단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투자를 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예상을 훨씬 웃돈 지출이 생긴 것이니, 이 행사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딱하다면 딱한 상황이지만, 이것이 황금성이 저들의 사정을 봐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상인이란 응당 이윤을 쫓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행사 현장이 각자 고군분투하는 상단들의 모습에 서로 자극마저 느끼던 그때였다.
"버핏 경, 오랜만입니다."
재차 길드원들을 독려하며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버핏이 문득 들려온 한목소리에 곧장 시선을 돌렸다.
"응? 이든 영주님!?"
버핏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 이든이 서 있었다.
***
황금성 길드. 버핏의 집무실.
버핏이 이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따로 연락도 없이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수도엔 언제 오셨고요?"
"오늘 왔습니다. 유니콘의 호송대와 함께 말이지요."
쪼르르. 뚝.
버핏이 차를 따르다 말고 놀라 물었다.
"예? 유니콘의 호송대가 벌써 도착했다고요?"
"예."
"아,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제가 듣기론 유니콘의 호송차는 오늘 레온하르트 영지를 출발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서두르게 됐습니다. 뭐, 일찍 도착하면 유니콘도 그렇고 길드장님들 입장에서도 좋은 것 아닙니까?"
"그, 그렇긴 하지요…."
"자자, 그 얘긴 됐고.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버핏 길드장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움 말씀입니까?"
넋 나간 표정을 하던 버핏의 얼굴이 일순 평소 보이던 사업가의 그것처럼 변했다. 버핏이 물었다.
"정확히 어느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식량이 필요합니다."
"식량? 어디에 쓸 얼마큼의 식량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저희 영지민 전체가 먹을 일 년 치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버핏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상당한 양에 놀란 것이다.
"…영지민 전체가 먹을 일 년 치의 식량이라 하셨습니까!?"
"예."
"아니, 그 많은 식량은 대체 왜…. 올해 수확된 곡물도 있으실 것 아닙니까?"
"그것조차 다 먹고, 이제 한 달 치분만 남은 상황입니다."
"예에!?"
"저희 영지민들이 생각보다 식성이 대단해서…. 하하…."
‘…아니 아무리 식성이 대단해도 그렇지.’ 작년 수확된 곡물도 아니고, 올해 수확된 곡물조차 다 먹고 한 달 치만 남은 상황이라니 영지민 전체가 걸신이 들리지 않고서야 이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버핏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고갤 휘휘 젓고는 정신을 차렸다.
"올해 수확된 것조차 한 달 치밖에 남지 않았다면 사실상 최소 이 년 치분의 식량이 필요하신 상황 아닙니까?"
듣던 이든이 고갤 주억거렸다.
"음.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그럼 이 년 치분의 식량이 필요합니다."
"……."
버핏은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지민 전체가 먹을 이 년 치분의 식량이다.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군량미라 해도 믿을 이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이 하루아침에 구해질 리가 없었다.
버핏이 말이 없자 이든이 불안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어렵겠습니까?"
"아뇨,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이 상당한 만큼 조금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어떻게든 한 달 안에만 구해 주시면 됩니다."
버핏이 너털 웃었다.
"하하. 그렇다고 한 달까진 걸리지 않을 거고요. 저희 쪽 행사 준비 기간이기도 하니, 넉넉 잡고 일주일이면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단…."
그때였다.
버핏이 말끝을 흐리자 일순 그의 집무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버핏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영지의 이 년 치 식량분을 구해드리는 대가로 영주님께선 저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는 게 있으니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 그 말이시군요?"
"그런 셈이지요. 영지민 전체가 먹을 이 년 치 식량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상당한 연줄 역시 동원되어야 하는 법이죠. 게다가 저희는 엘프의 눈물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 행사까지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행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 그만한 식량을 수소문해서 찾는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이든이 인정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영주님께서 필요하신 그만한 식량. 저희 황금성이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영주님께선 저에게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까?"
과연 이윤을 쫓는 상인답다고 해야 할까.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인 이든을 앞에 두고도 버핏은 그냥 해 주는 법이 없었다.
이든이 턱을 매만지며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대뜸 이든이 물었다.
"버핏 경."
"예."
"혹 황금성 길드 창고에 여분의 미스릴로 된 보물도 있으십니까?"
"……."
버핏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고민이 많아진 탓이었다.
버핏이 솔직히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얼마나 있으십니까?"
"웬만한 영지의 병사들 모두에게 지급해 줄 수 있을 만한 보물이 창고에 널려 있는 상황입니다만, 헌데 그것은 왜 물으시는지?"
"모두 처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듣던 버핏이 일순 고갤 갸웃거렸다.
"…예? 미스릴로 된 보물을 전부 말입니까?"
"예."
재차 들려온 이든의 대답에 버핏이 웃었다.
"하하, 영주님. 농담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미스릴 보물들을 모두 처분하라니요. 영주님께서 모르셔서 하시는 소리 같은데, 미스릴 장비들은 하나같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들입니다. 특히 드워프들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뒤론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갔지요. 물론, 현재 영주님의 영지에 드워프들이 거주 중인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 드워프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고 해서 미스릴 보물들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
주절주덜 떠들어 대던 버핏의 말을 자르고 이든이 단호히 입을 뗐다.
"떨어집니다."
"……."
"정말로."
"……."
버핏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그가 아는 이든이란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버핏이 물었다.
"…저어…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가치가 떨어진다니 대체 어째서 말입니까?"
"현재 드워프 왕국에 대장간이 재가동되고, 그곳에 모든 생산이 미스릴 검과 갑옷으로 초점이 맞춰진 상황입니다."
"모든 생산이…. 미스릴 장비로 말입니까?"
"네."
"얼마나 많은 양의 장비이길래…."
"레온하르트 영지의 병사들. 황궁의 정예병들.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 마지막으로 오크 종족 정예들 까지. 이 모두가 충분히 착용할 수 있는 만한 수준의 장비들이 세상에 풀릴 겁니다. 한마디로 강철로 된 장비만큼이나 흔해 빠진 장비가 될 거다. 그 말입니다.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중에 가면 정말 똥값 될지도 모르니까요."
"…자, 자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버핏이 얘길 듣기 무섭게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을 때우던 이든이 그의 기척을 느끼곤 넌지시 물었다.
"창고에 있던 보물들을 전부 처분하라 명하신 모양이군요."
"예, 지금 당장 수도 광장 곳곳에 구매자를 찾을 공지를 붙여 놓으라 명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때였다.
버핏이 그랬던 것처럼 이든이 일순 분위기를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이만한 정보면 식량을 구해 주시는 데 드는 값은 충분히 치른 셈 아닙니까?"
버핏이 고갤 끄덕였다.
"치르시고도 남지요. 말씀하신 그 식량 역시 조금 전 다녀오는 길에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 놓으라 언질을 해 놨습니다."
"빠르시군요."
"상인의 생명은 시간 아니겠습니까?"
"암요."
이든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식량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예정이겠다. 이제는 제이콥의 기사 아카데미 입학 문제만이 남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