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알폰소가 다가온 아이를 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제크, 또 주제넘게 나서려고?"
제크가 얼굴을 구겼다.
"알폰소, 말조심해. 난 너보다 삼학년 위의 선배다."
"선배?"
알폰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고는 같잖다는 식으로 제크를 노려봤다.
흡사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하던 알폰소가 말을 이었다.
"이 천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선배 타령이야."
"……."
천한 놈.
이제는 귀가 닳을 만큼 익숙해진 말이었다.
하나, 익숙해졌다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제크의 두 주먹이 있는 대로 힘을 줬는지, 하얗게 질리며 부르르 떨려왔다.
제크는 유니콘 무관 학교 출신으로 사학년 중에선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우등생이었다.
하나.
아무리 잘난 것 같은 그라도 눈앞에 뺀질뺀질하게 생긴 저 일 학년 알폰소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폰소는 잘나가는 귀족 가문의 아들이었고, 반면에 제크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배움의 장인 이곳에서도 신분의 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넘을 수 없는, 넘어서는 안 될 신분이라는 거대한 장벽.
만약 제크가 이를 무시하고 홧김에 알폰소를 건드는 순간, 기사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히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스윽.
알폰소의 두 눈이 제크의 주먹을 바라보더니만,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주먹 봐라. 그러다 진짜 한 대 치겠다? 천한 놈아?"
놈이 재차 천한 놈이라 지껄여 대는 순간이었다.
제크의 머릿속에서 일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제크가 알폰소를 향해 들이받을 기세로 움직이던 그때였다.
"다들 뭐 하는 짓들이야!"
난데없이 들려온 호통에 제크의 움직임이 곧장 멈추었다.
제크가 당황한 얼굴로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교, 교수님…."
제크가 알폰소에게 한 대 날렸을 법한 일촉즉발 상황에 대뜸 나타나 상황을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트레버 교수였다.
제크와 알폰소 사이에 선 트레버가 스윽 주변을 훑었다.
대치하듯 서 있는 무관 학교 출신의 학생들과 귀족 출신 학생들만 봐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않아도 대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트레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싸운 거냐?"
"……."
오늘과 같은 일이 처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크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갤 푹 숙였다.
반면에 알폰소는 교수에게 딱히 대드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제크와는 다르게 고갤 빳빳이 들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트레버가 그런 알폰소를 흘겨보다가 곧장 제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 싸우지 말라고 일러 뒀거늘. 붙여만 놨다 하면 이리 싸워 대다니. 특히 제크 넌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거들어 싸우기까지 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못난 놈."
"……."
혀를 차 대며 말하는 교수의 질책에 억울함과 서러움이 한데 뒤엉켜 북받쳐 오른 탓일까.
제크의 눈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알폰소가 그런 제크의 꼴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키던 그때였다.
트레버가 알폰소 쪽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알폰소, 넌 어찌 가는 곳마다 말썽이냐.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적당히 하거라."
지금까지는 가문을 봐서 참았지만, 더는 문제를 일으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알폰소가 표정을 굳히곤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떨리는 제크의 등을 본 무관 학교 출신의 아이들이 침울해진 얼굴로 덩달아 고갤 푹 숙였다.
"……."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시비를 건 쪽은 늘 알폰소를 중심으로 한 저것들이었지만, 결국엔 한소릴 듣고 고갤 숙이는 것은 언제나 그 자신들이었다.
그 모습에 알폰소 일행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죽은 무관 학교 출신 아이들을 향해 소리 죽여 낄낄 웃던 그때였다.
트레버가 덩달아 키득거리던 알폰소를 불렀다.
"알폰소."
"네?"
"따라오거라."
알폰소가 살짝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앞서 나간 트레버 교수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물었다.
"왜, 왜요? 어디 가는데요. 교수님…?"
"……."
제아무리 그가 막 나가는 놈이더라도 교수 무서운 줄은 아는 모양이다.
트레버가 한껏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칼스테인 공작님께서 너를 대련 상대로 지목하셨다."
알폰소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말은 설마?"
"그래, 입학 희망생이 왔다더구나."
그 입학 희망생이 보나마나 유니콘 무관 학교 출신이라 여긴 걸까.
일순 알폰소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아 그래요?"
트레버가 그런 알폰소의 표정을 찰나 살피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알폰소."
"예, 교수님."
"너에게 거는 기대가 많다. 날 절대 실망시키지 말도록."
트레버 교수 역시 기사 아카데미가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지금의 현 아카데미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이 중 한 명이었다.
알폰소가 더없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물론이죠. 절대 교수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트레버 교수가 고갤 끄덕이곤 재차 앞장서 걸었다.
***
제이콥을 바라보는 칼스테인 공작의 눈빛은 묘했다.
제이콥이 기사단장 제라드의 혈육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도 있지만, 겉모습만 봐선 제이콥의 재능이 그리 뛰어난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칼라슈를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다 그 말이지….’
남들은 남의 자식이 제 자식보다 뛰어나면 시기하곤 하지만, 칼스테인 공작은 달랐다.
제 자식보다 뛰어나다면 응당 기뻐하는 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재가 많아진다는 것은 곧 제국의 미래가 그만큼 밝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한참 동안 제이콥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문득 어디론가 옮겨졌다.
스윽.
"왔소. 트레버 교수."
"공작님, 먼저 와 계셨군요."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트레버 교수와 일 학년 알폰소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알폰소가 칼스테인 공작을 보기 무섭게 곧장 고갤 숙여 보였다.
제아무리 자신이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 한들 칼스테인 가문만 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공작 각하!"
"음."
칼스테인이 가볍게 고갤 끄덕이고는 알폰소의 인사를 받았다.
알폰소의 표정이 찰나 시무룩해졌다.
인사를 받는 칼스테인 공작의 모습이 자신은 달리 신경 쓰지 않는 듯해서였다.
그때였다.
알폰소의 시선이 칼스테인 공작을 지나 그의 근처에 있던 제이콥을 향했다.
‘저놈이 내 대련 상대인가.’
알폰소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제이콥을 흘겨보던 그때였다.
알폰소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 커졌다.
‘…어?’
알폰소의 시선이 향한 곳.
다름 아닌 칼스테인 공작이었다.
제이콥을 바라보는 칼스테인 공작 표정이 조금 전 그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관심을 보이는 눈빛이었다.
알폰소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칼스테인 공작이 평소 흔히 보이지 않던 표정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알폰소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트레버 교수의 관심은 물론이고, 칼스테인의 공작의 관심까지 응당 자신에게 향해야 하건만, 어쩐지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알폰소의 서슬이 퍼런 눈빛이 제이콥을 향해 쏘아졌다.
‘저딴 놈이 뭐라고…!’
그 따가운 시선을 느낀 것일까.
제이콥이 알폰소의 눈을 마주하곤 고갤 갸웃거렸다.
알폰소가 음성은 내뱉지 않은 채로 입만 뻐금거리며 제이콥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뭘 꼬라봐. 띱때야. 눈 안 깔아?’
"……."
제이콥이 볼을 긁적였다.
***
트레버 교수의 눈이 힐끗 옆을 향하더니, 이내 누군가를 빤히 바라본다.
트레버 교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 이.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이든을 바라보던 트레버 교수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저자가…. 그 소문 자자한 심안의 무사, 이든 공작이라고….’
제국에서 이든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를 향한 수식어는 다양했다.
제일 널리 알려진 심안의 무사부터 해서, 반역자 심판자, 언데드 학살자, 제국의 수호자까지.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며 칼스테인 공작만큼이나 유명했던 이든이지만, 최근 레온하르트 영지의 영주가 된 이후론 그 유명세가 더욱 대단해졌다.
그렇게 이든을 한참이나 살피던 트레버 교수는 일순 고갤 갸웃거렸다.
‘저자도 칼스테인 공작과 마찬가지로 소드 마스터라 들었는데…. 어째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트레버 교수가 이든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곤 칼스테인 공작을 향했다. 과연 제국 제일의 검이라는 칭호답게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고.’
트레버 교수의 시선이 재차 이든을 향했다.
바다와 같았던 칼스테인 공작의 어마어마한 기운과 달리, 이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공허하기까지 해서 그가 정녕 소드 마스터가 맞는지 의심이 들게까지 했다.
이든을 향한 트레버 교수의 눈빛이 경외에서 의심으로 변하던 그때였다.
칼스테인 공작이 대뜸 트레버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엔 어떤가?"
"예!?"
"저 제이콥이란 아이 말일세."
난데없이 들려온 물음에 화들짝 놀랐던 트레버 교수의 시선이 곧장 제이콥이란 아이를 향했다.
‘…음.’
제이콥을 한참이나 살피던 트레버 교수가 고갤 갸웃했다.
"글쎄요…."
트레버 교수는 제이콥에 관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느낀 바 그대로 말했다.
"달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칼스테인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예…."
"어째서?"
"우선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얕습니다. 체내에 마나를 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음. 그리고?"
"그리고…."
트레버 교수가 안력(眼力)을 키웠다. 그의 눈이 제이콥이란 아이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손바닥이 매끈합니다. 굳은살이 생기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는즉슨 훈련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음. 그 외 자세나 나머지는?"
"자세는…."
트레버의 시선이 제이콥의 자세를 살폈다.
"자세는 처음 보는 형태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보이는 느낌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조금 엉성한 듯싶은데요?"
"…훗."
듣던 칼스테인 공작이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응?’
난데없는 칼스테인 공작의 반응에 트레버 교수가 눈썹을 꿈틀거리던 그때였다.
칼스테인 공작이 무안한 얼굴로 해명하듯 입을 뗐다.
"아아…. 미안하네. 사실 저 제이콥이란 아이 말이세. 여기 함께 자리하신 이든 공작님의 제자일세."
"…예!?"
트레버 교수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이든이 웃으며 맞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일순 트레버 교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소문 자자한 이든 공작의 제자를 두고 조금 전과 같은 평가를 내리다니….
밀려오는 낯부끄러움에 그가 고갤 들지 못하던 그때였다.
칼스테인이 웃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사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트레버가 놀라 되물었다.
"예…?"
"내가 봐도 제이콥이란 아이가 자네와 같이 보인단 말이세."
"그, 그렇습니까?"
트레버 교수가 안도의 숨을 내뱉던 그때였다. 대뜸 칼스테인 공작으로부터 도무지 믿기 힘든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말일세. 이든 공작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제이콥이란 아이가 칼라슈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시더군."
트레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