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간혹 그런 이들이 있다.
평소엔 한없이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하나에 빠지면 고도의 집중을 하는 이들이.
대개 한 분야에 일대 종사를 이룬 장인들이 이러한데, 세상 모든 장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주변을 잊고 오직 관심을 둔 것에만 집중하는 것.
언뜻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도 잊은 채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건, 긴 세월 동안 불도의 몸을 담은 노승들조차 쉬이 이뤄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무아지경은 천재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무아지경의 영역은 무인(武人)의 길을 걷는 이들이 가장 바라는 능력이지만, 동시에 쉬이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재능을 갖지 못한 이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노력뿐이 답이 없었다.
그리고 알폰소는 그 노력을 밥 먹듯이 해 온 아이였다.
자신은 천재가 아님을 알기에, 천재를 따라잡기 위해 그들이 하는 것에 수십, 수백 배 노력하는 이.
그것이 알폰소였다.
그런데.
그런 알폰소의 눈앞에 진짜 천재가 나타났다.
제이콥이란 천재가 말이다.
"……."
착 가라앉은 눈으로 찰나 무아지경에 빠졌던 제이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이콥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알폰소를 보곤 황급히 자세를 잡았다.
"휴…."
제이콥이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에 알폰소는 인상을 쓰곤 고갤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응?"
대뜸 알폰소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제이콥이 고갤 갸웃거리는 사이, 알폰소는 제이콥을 내내 노려본 채 휘둘렀던 목검을 회수하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네놈 같은 얼빵한 놈이, 내가 그토록 바라고,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천재일 리 없다 그 말이다…!"
스산하게 가라앉은 알폰소의 눈을 마주한 제이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알폰소의 기세가 너무도 위협적으로 변한 탓이었다.
제이콥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무, 무슨 당연한 소리야. 나 같은 게 천재라니. 하하…!"
제이콥 딴에는 알폰소를 진정시키겠다고 한 소리였지만,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차라리 ‘맞다. 내가 네놈이 말한 그 천재다.’ 라고 말했다면 열이 받긴커녕 어처구니없어했을 테지만, 조금 전 그의 말이 도리어 알폰소를 자극해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콰득.
알폰소가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곧장 제이콥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의 그 바보같이 웃는 면상부터 날려 주지…!!!"
"……!"
휘이이이이익!!!
알폰소가 내내 보이던 검술을 재차 펼쳤다.
제이콥이 눈을 부릅떴다.
위협적인 기세를 발산하던 알폰소의 기세가 그대로 목검에 실리며 어느 때보다 빠르고 날카롭게 제이콥을 향해 날아들고 있던 것이다.
동시에 제이콥 역시 저도 모르게 재차 무아지경에 빠져들며 알폰소의 검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바뀐 제이콥의 눈빛을 확인한 알폰소가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누굴 바보로 알고.’
그때였다.
쏜살같이 쏘아지던 알폰소의 목검이 일순 궤도를 바꾸며 제이콥에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
착 가라앉던 제이콥의 눈에 찰나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
‘위험하군. 정도를 넘어섰어.’
도무지 비무 대련이라 보기 힘든 위협적인 알폰소의 손속에 지켜보던 교수가 대련을 중단시키기 위해 곧장 달려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움찔하던 교수의 몸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응?’
교수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제이콥의 몸이 별안간 지면을 밟고 뛰어오르며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던 알폰소의 검을 그대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대련을 중단시키려던 교수도, 제이콥에게 변칙적인 공격을 가했던 알폰소 조차 그의 말도 안 되는 임기응변에 말을 잇지 못하며 넋을 놓았다.
"……."
넋을 놓은 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칼스테인 공작 옆에 신기라도 본 것처럼 트레버 교수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을 쳐 댔다.
‘조, 조금 전 움직임은 대체…!’
조금 전 제이콥이란 아이가 보인 움직임은 필시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흡사 춤을 보는 듯했던 그 검술은 그의 모든 삶을 통틀어 생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세상에 저런 검술도 있던가…?’
검술의 근본은 중단이다.
마나가 쌓이는 배꼽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그 위치에 둔 검을 쥔 자세가 가장 안정적이다.
그리고 그 검이 중단에서 멀어질수록 공격은 변칙적일 수 있되, 그만큼 안정성이 낮아진다.
자신의 온몸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얼굴을 노렸던 알폰소의 검술이 중단에서 도중에 궤도를 바꾼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약점을 최소화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
하나,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알폰소의 한 수는 또 하나의 변칙을 두고 있었다.
혹 제이콥의 검이 얼굴을 노렸던 그 일수를 막아 낸 순간, 상단으로 간 그의 검이 중단에서 멀어지는 틈을 타 다시 변칙을 섞어 중단을 노릴 수도 있는 묘리가 담겨 있던 것이다.
한마디로 피해야만 살 수 있는 필살의 공격이었던 셈이다.
트레버 교수 본인이 직접 가르쳤으니, 알폰소의 의도는 진작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대련이 끝나는가 싶더니만, 조금 전 제이콥이란 아이의 움직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몸을 띄어 얼굴로 날아들던 검술의 궤도를 강제적으로 자신의 중심으로 바꾸어 흘린다.
이론적으론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트레버 교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제이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때였다.
칼스테인 공작이 입을 뗐다.
"대단하군."
"……."
"정말 대단해. 저런 식으로 공격을 무위를 돌릴 줄이야. 아이답지 않은 임기응변이었어."
"……."
트레버 교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트레버 교수의 머릿속이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새하얘졌다.
그의 머릿속을 관통했던 벼락이 전신으로 퍼지며 부르르 떨렸다.
트레버 교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아이다. 저 아이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천재다…!’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이콥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완전히 반전된 순간이었다.
***
검이 비껴 나간 자세 그대로 멈춰서 있던 알폰소가 천천히 고갤 저었다.
"마, 말도 안 돼…. 조금 전 그건…. 내 최선의 일격이었어. 헌데…. 그걸…. 막아 냈다고…?"
알폰소의 눈알이 천천히 움직이며 제이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 재차 보였던 무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얼빵한 얼굴로 얼떨떨해하고 있는 제이콥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너 같은 얼빵한 놈이…. 어떻게 그걸 막아 낸 거지? 대체…. 어떻게…!"
하나, 제이콥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조금 전, 그 움직임은 제이콥 역시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이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알폰소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
얼빵한 표정에 여리디여린 마음.
무인으로서는 최악의 표본이지만, 재능만큼은 남다르다는 걸까.
알폰소가 강하게 고갤 저었다.
"아니야."
"…응?"
"아니라고. 너 같은 놈이 그런 천재일 리가 없어."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알폰소의 모습은 어쩐지 위태해 보였다.
"이, 이봐…!"
제이콥이 손을 뻗어 알폰소를 진정시키려던 그때.
"…이이…! 그런 얼빵한 얼굴 따위 집어 치우라고!!!"
알폰소가 버럭 외치며 목검을 휘둘러 제이콥의 손을 향해 휘둘렀다.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며 제 손을 급히 회수했다.
씩씩거리던 알폰소의 시선이 일순 제이콥을 넘어 이 대련을 지켜보는 교수들로 향했다.
대련 전, 자신을 향하던 관심이 어느새 다들 제이콥을 뚫어지라 향해 있었다. 칼스테인 공작도.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자신을 아끼던 트레버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폰소의 눈에 핏발이 가득하게 섰다.
‘난 천재를 뛰어넘는 천재다. 저들의 관심은…. 오로지 나를 향해야 한단 말이다…!!!’
한서린 눈으로 교수들을 바라보던 알폰소의 고개가 홱 돌아가 다시 제이콥을 향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흡사 광기 어린 알폰소의 모습을 마주한 제이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분노는 길었으나, 행동은 빨랐다. 알폰소의 신형이 제이콥을 향해 번개와 같이 튀어 나간 것이다.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지금껏 어느 때와 비교 불가한 흉흉한 기세가 알폰소의 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이이익!
대련용으로 제작된 목검이라지만, 목검도 결국엔 검인 셈이다.
상대를 죽일 수는 없을지언정 사용하는 이에 따라 분명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셈이었다.
이번엔 진짜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된 걸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심판 겸 교수가 곧장 뛰쳐 들었다.
"알폰소, 거기까지다!"
하나, 알폰소의 움직임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제이콥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기세로 더욱더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뛰어들었던 교수가 서둘러 알폰소의 검을 쳐 내려던 그때였다.
"…어?"
척.
알폰소와 제이콥 사이에 멈추어 선 교수가 일순 얼어붙었다.
달려들던 알폰소 역시 당황한 나머지 흉흉했던 기세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황.
알폰소의 시선이 힐끗 밑으로 향하더니, 자신의 목전에 멈추어 선 제이콥의 검을 향했다.
"……."
일순 연무장에 어느 때보다 더한 정적이 일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칼스테인 공작의 음성이었다.
"…조금 전 제이콥의 저 움직임. 분명 알폰소가 내내 펼치던 트레버 교수의 검술 아니오?"
누구의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으나, 답은 들려왔다.
검술의 창시자인 트레버 교수 본인에게 직접 말이다.
"예… 맞습니다. 분명… 제 검술이 맞습니다."
"…허."
칼스테인 공작이 이번엔 헛바람마저 집어삼켰다.
"한번 본 검술은 귀신같이 자신 것으로 만든다더니. 이든 공작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제아무리 칼라슈라도 저것은 무리지요. 정말 엄청난 재능입니다."
듣던 트레버 교수가 놀란 얼굴로 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정말 그런 얘길 했었느냐?’라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든이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
"어떻습니까? 제이콥 저 아이."
칼스테인 공작이 곧장 대답했다.
"더 볼 것도 없소이다. 합격입니다."
칼스테인 공작이 연무장 중앙에 뛰어들었던 교수를 향해 고갤 끄덕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교수가 마주 고갤 끄덕여 보이고는 내내 위협적인 검술을 펼쳤던 알폰소의 목검을 홱 뺏었다.
"대련은 끝났다. 제자리로 복귀하도록."
"……."
알폰소가 대답이 없자. 교수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알폰소, 듣고 있나? 제자리로 복귀하도록!"
"…네, 네…!"
맥아리 없이 대답한 알폰소가 고갤 떨구며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찰나 트레버 교수를 향했다.
하나, 이내 트레버 교수를 향했던 알폰소의 시선은 금세 다시 땅바닥으로 향했다.
바라본 트레버 교수가 자신이 아닌 제이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
조금 전 번개와도 같던 경쾌한 움직임은 한 줌 보이지 않는, 터덜터덜 맥아리 없는 알폰소의 걸음이 족쇄라도 찬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노력으로 천재를 뛰어넘으려 했던 독한 이가 좌절에 빠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