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엘리아 숲 중앙엔 나름 성이라 부를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다.
과거엔 호랑이 수인족이 제왕으로 군림하며 머물던 거처였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고 그를 알현하고자 하는 수인족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길이 잘 정돈되어 있다시피 했건만….
뱀 수인족 콘다가 제왕이 된 이후론 지금은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는지 정돈되어 있던 길은 무성하게 자란 풀에 가려져 사라지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든과 함께 적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수인족들의 얼굴엔 공포에 질린 듯한 두려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든을 안내하며 곧장 걸음을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장에 느껴지는 두려움보다 제 새끼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탓이다.
모성애란 그런 것이다.
뛰어드는 곳이 불길 속임을 알면서도 새끼들을 구하러 가게 만드는 본능 말이다.
그때였다.
수인족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이든의 눈썹이 찰나 꿈틀거렸다.
그의 기감이 먼발치에 있던 성 쪽에 누군가를 콕 집어 향했다.
‘제법인데?’
데스 스타 끄나풀들의 기척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모여든 그곳에 유독 돋보이는 존재감을 보이는 한 놈이 있었다.
‘저놈이 우두머리겠군.’
그때였다.
기감으로 적의 우두머릴 살피던 이든이 일순 비릿하게 웃었다.
‘이놈 봐라? 저놈도 날 보고 있었구만, 아주 날 잡아먹을 듯이 보는 모양인데?’
끄나풀들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놈의 사특한 기운이 제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응수해서 오줌이라도 지리게 해 주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본래 이든의 성격이었다면 이를 가만두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놈의 시선이 느껴지기 무섭게 더욱더 존재감을 발산해 자신을 알렸을 터. 그럼 십중팔구는 잔뜩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행동에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향하는 저곳에 친구가 된 수인족들의 새끼들이 끄나풀들의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새끼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든은 곧장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더 지웠다.
마치 저 자신이 한낱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새끼들아. 삼촌이 구해 줄 테니.’
대체 인질로 잡힌 수인족들의 새끼들을 어찌 구할 생각인 걸까.
하나 이든에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이미 진즉에 계획을 세워 놨기 때문이다.
그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던 콘다가 비릿하게 웃더니만, 입을 뗐다.
"왔군. 스릅."
놈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인간 침입자 놈과 함께 바로 코앞까지 온 개, 고양이, 토끼 수인족들을 차례로 훑었다.
콘다의 시선을 느낀 걸까.
찾아온 수인족들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들을 했다.
저들이 바르르 떨며 눈치만 살피던 그때였다.
시닌이 꽥 소릴 질렀다.
"이놈들, 제왕을 앞에 두고 어찌 가만히 있느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하나, 악을 써 대며 꾸짖는 시닌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수인족들은 지레 겁먹을지언정 쉬이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고양이 수인족 나비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쥐어짜 내듯 목소릴 냈다.
"우, 우리 새끼들은 무사히 잘 있는 것이냥!!! 우리 새끼들부터 보여 달라냥!!!"
"이런 건방진 놈이,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되레 소릴 지르는 나비의 모습에 시닌이 핏발 선 눈알을 부라리며 나비를 향해 달려들 것같이 하던 그때였다.
별안간 콘다가 손을 들더니 그를 막아섰다.
시닌이 자신을 막아선 제왕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사이, 콘다가 입을 뗐다.
"새끼들을 보여 줘라."
"…아, 네! 알겠습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제왕인 콘다의 명령은 지엄한 법.
시닌이 곧장 제 수하들에게 눈짓하자 커다란 풀더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의 수하들 수백 마리가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푸드드덕!
그 순간.
둥지였던 것마냥 그들의 밑에 깔려 있던 수인족들의 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나비가 화들짝 놀라며 새끼들을 가리켰다.
"있다! 우리 새끼들이 저기 있다냥!!!"
"……!"
개와 고양이, 토끼 수인족들이 무사한 제 새끼들의 모습에 재차 눈물을 터트리며 통곡을 해 댔다.
하나, 가족 상봉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순 들려온 섬뜩한 음성에 수인족들의 울음이 일시에 뚝 그쳤다.
"더는 못 봐주겠군. 거기까지."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콘다였다.
눈물을 쏟던 수인족들의 눈이 일제히 놈을 향하는 사이, 콘다가 재차 입을 뗐다.
"그동안 누려온 평화로웠던 삶은 달콤하셨나. 다들?"
그때였다. 나비가 다시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우, 우릴…. 이제 어쩔 생각이냥…!?"
"글쎄….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어찌 처리할까 고민 중이었다."
"……."
콘다의 말을 듣던 수인족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들의 모습에 재차 비릿한 미소를 머금던 콘다가 곧장 생각에 잠겼다.
"너희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흐음…."
잔뜩 겁에 질린 수인족들을 앞에 두고, 이들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흡사 아이마냥 기대에 찬 얼굴을 하던 콘다가 대뜸 수인족들에게 물었다.
"새끼들을 되찾고 싶지?"
"……."
따로 대답은 없었지만, 말해 무엇 하겠나. 당연히 새끼들을 무사히 되찾고 싶었다.
콘다가 다 안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다.
"기회를 주지. 새끼들도 되찾고, 너희들의 목숨까지 보전해 줄 절호의 기회를 말이다."
"…그, 그게 무어냥…?"
뜻밖에 제안에 나비를 포함한 수인족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스윽.
콘다가 천천히 손을 뻗더니 대뜸 누군가를 가리켰다.
놈이 가리킨 이.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저놈을 죽여라."
"……!"
제힘은 아껴 둔 채 저들끼리 싸우게 만든다라.
과연 모략의 능통한 뱀 수인족다웠다.
콘다의 제안을 듣던 수인족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내내 대표로 목소릴 내던 나비조차 당혹스런 기색을 지우지 못하였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못 하겠어?"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냥. 그는 우리 친구다냥!"
"친구라. 그 친구란 것이 과연 너희들 가족보다 소중할까? 시닌."
"예!"
콘다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닌이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그리곤 상공에서 날갯짓하며 주위를 빙글 돌고 있던 제 수하들을 향해 새끼들이 포로로 잡혀 있던 둥지를 가리켰다.
시닌의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곧장 둥지로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새끼를 겨누기 시작했다.
흡사 검을 연상시키는 저들의 부리가 제 새끼들을 향하자 수인족들의 얼굴이 금세 흙빛이 되었다.
수인족들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제 새끼와 이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콘다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으흐흐흐! 크하하하하!!! 시닌, 보고 있나!?"
"예, 덕분에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제왕이시여."
"이보라지. 친구니 뭐니 떠들어 대더니만, 고민하는 저 꼴을 보라고!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것이지 야생에서 친구라니 말이야. 잘 들어라. 멍청이들!"
콘다가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고함에 숲이 한차례 부르르 떨어 대는 사이, 모든 수인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샛노란 안광을 터트리는 콘다를 향했다.
집중된 이목 속 콘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야생은 오로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강한 자만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다! 종을 초월한 우정? 시답지 않은 우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집어치워라! 수인족이면 수인족답게 본능대로 행동하란 말이다!!! 자, 뭣들 하는가. 어서 저 맹인 놈을 죽여 너희들 본래의 본능을 꺼내 보이지 않고! 어서! 어서어서어서!!!"
줄곧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콘다가 터트린 광기는 흡사 터진 둑에서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강물처럼 주체가 안 되는 듯 보였다.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네."
새끼들을 인질로 잡힌 수인족들이 콘다의 광기에 잔뜩 겁에 질린 얼굴들을 하던 그때, 줄곧 듣고만 있던 이든이 느닷없이 입을 뗐다.
"…응?"
"……!?"
대뜸 들려온 이든의 걸쭉한 욕설에 콘다는 고갤 갸웃거렸고, 그의 주변에 있던 수하들은 기겁을 해 댔다.
콘다가 확인하듯 물었다.
"…또라이? 날 두고 하는 소린가?"
콘다의 물음에 이든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너지 누구냐. 병신아."
"허…."
조금 전 광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콘다는 일순 헛웃음을 터드렸다.
"병신이라. 이 뭔…."
엘리아 숲에 제왕으로 군림해 온 이후로 그가 언제 한번 병신이란 걸쭉한 욕설을 들어 보기야 했겠는가.
아마 수인족이 인간에게 핍박받던 그 시절을 제외하곤 정말 간만에 들어 보는 욕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콘다는 대뜸 화가 난다기보단 그냥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살짝 넋이 나간 그사이, 퍼뜩 정신을 차린 시닌이 핏발 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저, 저어…. 인간 놈이 주제도 모르고…! 뭣들 하느냐. 제왕을 모욕한 저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지 않고…!"
시닌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데스 스타의 기운이 느껴지는 수인족들과 새끼들을 향해 부리를 겨누던 까마귀들마저 이든을 향해 일시에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이든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콘다는 찰나의 순간, 웃고 있는 이든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웃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수많은 제 수하들을 앞에 두고 저리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니 말이다.
하나.
콘다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이든이 일시에 제힘을 폭발시킨 것이다.
동시에 그의 양손이 번개와 같이 휘둘러지며 달려들던 콘다의 수하들을 향해 ‘수라마참조아격’이 쏘아졌다.
파아아아아아아앗!
비명도, 싸우는 소리도 그 무엇도 없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그저 그를 향해 달려들던 수인족들이 한낱 찢긴 살가죽으로 변하여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뿐이었다.
시닌, 그리고 콘다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 많고 많던 제 수하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사이, 콘다의 샛노란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흔들려 댔다.
쩍 벌어진 그의 입이 중얼댔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콘다 그 역시 돋보이는 일신무력으로 이 숲을 지배한 이지만, 이든의 힘에는 감히 견줄 수가 없던 것이다.
찰나 넋을 놓았던 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 시닌! 이, 인질을 잡아라 어서…!"
시닌 역시 콘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새끼들을 인질로 잡기 위해 둥지로 달려들려던 그때였다.
시닌의 몸이 일순 석상처럼 굳었다.
"제, 제왕이시여. 인질이… 인질이 사라졌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콘다가 둥지를 향해 고갤 홱 돌렸다.
과연 시닌의 말대로였다.
둥지에 있던 새끼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콘다의 얼굴이 시닌의 그것처럼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사이, 이든은 어느새 콘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가온 이든이 팔을 뻗어 콘다의 목을 틀어쥐었다.
콘다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갔다.
이든이 사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숲의 제왕이니 뭐니 떠들어 대길래 대단한 놈인줄 알았더니만, 이건 뭐…. 병신도 상병신이 따로 없었군."
그때였다.
이든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콘다가 뭔가 느낀 걸까.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 위, 위대한… 존재…이십니까…!?"
"위대한 존재라…."
나비에게도 듣던 물음이었다.
이든이 콘다의 목을 움켜쥐었던 제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몰라 이 새끼야. 나도 내가 누군지."
쥐어짜다시피 하던 콘다의 목이 일순 펑 하고 터졌다.
콘다의 대가리가 찰나 하늘로 솟구치다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샛노랗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