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237/250)

237화.

시닌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놈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이든을 향해 고갤 조아려 댔다. 곧이어 당연하다는 듯 변명까지 터져 나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는 그저 콘다 저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

하나.

시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별안간 놈의 목소리가 도중에 뚝 끊겼다.

이든이 한쪽 다릴 크게 들더니 엎드려 있던 시닌의 머릴 짓밟고는 그대로 터트린 것이다.

참으로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늑대 수인족 우두머리였던 울프와 똑같은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입을 놀려 대던 시닌까지 처리하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든을 포함해 토끼와 개, 고양이 수인족만 이곳에 남게 된 것이다.

하나.

고요할지언정 보이는 참상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참상만 봐도 이든의 손속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놈들의 피와 살가죽들이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끔찍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광경에 함께 온 수인족들마저 이든에게 묘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수인족들이 저마다 마른침만 꼴깍 삼켜댔다.

침묵과 참상 속.

그 가운데에 선 이든의 모습은 얼핏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고독함이 한참간 이어졌을 무렵.

"이, 이든…!"

"……?"

별안간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비 역시 다른 수인족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떨던 수인족 중의 하나였지만, 그녀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나비가 이든에게 물었다.

"이, 이든! 우, 우리 새끼들은 어딨는 거냥?"

"기다려 봐. 곧 나타날 테니."

"……?"

이든의 말을 이해 못 한 나비가 고갤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우우웅.

난데없이 그들이 있던 곳에 이공간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열린 이공간 틈 사이로 사라졌던 수인족의 새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새끼들과의 재회에 줄곧 얼어붙어 있던 수인족들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저마다 제 새끼를 부둥켜 안으며 가족 간의 상봉이 연달아 이어지던 중, 이공간에서 누군가 뒤이어 걸어 나오더니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 나이에 보모 노릇이라니."

이를 듣던 이든이 씩 웃어 보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온하르트 님."

이공간에서 걸어 나온 이.

그는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였다.

이든이 콘다와 놈의 수하들로부터 시선을 끌었던 사이, 레온하르트가 인질로 잡혀 있던 새끼들을 전부 빼돌렸던 것이다.

그때였다.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란 이름을 듣던 나비가 화들짝 놀라더니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레온하르트가 한 손을 들어 반갑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다들."

나비의 반응에 남은 수인족마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을 했다.

이든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다들 아는 사이였어요?"

"알다마다. 인간들에게 핍박받던 수인족들을 엘리아 숲으로 데려온 것이 나였으니까."

"…예?"

***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이었을 것이다.

수인족들은 그 생김새 탓에 문명 속에서 짐승도 인간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취급을 받아 왔다.

그리고 인간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용도는 참으로 다양했다.

일부는 힘쓰는 용도, 또 일부는 애완동물, 또 다른 일부는 성노예까지….

당시 수인족들은 인간들의 핍박에 아무런 반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문명 속에 자신들 역시 어떻게든 남고 싶다는 한 가닥 소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사이, 인간들의 핍박은 더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끝끝내 참고 참아 왔던 것이 비로소 폭발한 걸까.

한 수인족이 제 주인이었던 인간을 물어뜯어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본래 형체는 무엇이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수인족이 위험하다고 판단된 인간들이 그들이 보이는 족족 사냥을 해 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수많은 수인족들이 비명을 질러 대며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태워져 죽어 갔다.

당시 이를 보면서 수인족들이 딱하다 여긴 레온하르트는 이들을 갖은 핍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그들이 정착할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어 주었다.

엘리아 숲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이후로 레온하르트는 생각날 때마다 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틈틈이 확인하였다.

나비와 다른 수인족들이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알아본 것과 이든에게 났던 드래곤 냄새를 알아차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터였다.

물론 이 모든 얘기는 레온하르트가 데스 스타에게 당하기 전 이야기였다.

따라서 수인족과 레온하르트의 만남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사이.

콘다와 놈의 수하들이 이 숲을 장악했던 것이고.

레온하르트가 들려준 얘길 듣던 이든이 입을 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무튼,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놀랐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나도 놀랐네.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엘리아 숲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니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참담한 심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숲이 이리된 것이 자신 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이든이 고갤 저었다.

"레온하르트 님 탓이 아닙니다."

"…응?"

"솔직히 말해서 저들이 레온하르트 님의 친자식도 아니고, 언제까지 신경 써 줄 생각입니까? 제 자식도 장성하면 독립하는 마당에 말입니다. 물론 이번 일은 데스 스타라는 변수가 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이들만의 문명을 이뤘고, 모든 문명은 시간이 지나면 크고 작은 문제를 겪는 법입니다. 어쨌든 이곳도 사람 사는 곳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듣던 레온하르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하긴."

"다만, 지금이라도 이따금 저들이 생각날 때 한번 보러나 와 주십시오. 보니까 저들도 레온하르트 님을 퍽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니까요."

"응. 그래야겠어…."

레온하르트가 고갤 주억거리며 새끼들과 옹기종기 모인 수인족들을 쭉 훑던 그때였다.

별안간 이든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아, 한데 말입니다."

"응?"

"제가 죽인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 그것들한테도 분명 새끼들이 있지 않을까요?"

레온하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새끼들에게도 데스 스타의 손길이 미쳤을까요?"

"음. 확인해 봐야겠지만, 새끼들에게까지 데스 스타의 기운이 미치진 않았을 거야."

"휴. 다행이군요."

자칫 새끼들의 피마저 손에 묻힐 뻔했다고 생각한 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레온하르트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뭐가 말입니까?"

"새끼들만 남았다면 이제 그 새끼들을 보살필 부모는 더는 없는 셈 아닌가? 이대로 두면 어차피 오래 못 가 죽지 않겠나?"

"……."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이곳에 있던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 모두는 이미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새끼들을 보살필 부모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나비가 되찾은 제 새끼를 안고는 레온하르트와 이든 곁으로 다가왔다.

"그것에 관해선 나에게 생각이 있다냥!"

"…응?"

"……?"

이든과 레온하르트가 고갤 갸웃거렸다.

나비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보살피면 된다냥!"

레온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이든 역시 표현은 안 했지만,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자네들이…. 놈들의 새끼를 키우겠다고…?"

"냥!"

"……."

제아무리 어린 새끼라지만, 그게 누구의 새끼들인가.

마지막 피난처였던 엘리아 숲에서 마저 자신들을 핍박했던 원수의 새끼들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대뜸 자신들 손으로 키우겠다니….

이든과 레온하르트가 놀랄 만도 했다.

하나, 이는 비단 나비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수인족들이 입을 모아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우리가 키우면 돼요!"

"어린 것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죄는 어른들이 지은 것이지요!"

이것을 미련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착해 빠졌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어찌 생각하나?"

이든이 어깰 으쓱여 보였다.

"뭐, 저들 뜻이 저러니….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잘된 일이라?"

되묻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옛날엔 이곳의 우두머리가 호랑이 수인족이었다 하더군요."

"아아… 심바 말이로군. 음. 있었지. 아주 괜찮은 친구였어."

"나비가 그러더군요. 호랑이 수인족이 있을 땐 종에 상관없이 모든 수인족들이 사이좋게 지냈었다고요."

"그랬지."

"혹시 압니까? 저들이…. 호랑이 수인족과 같은 또 다른 성군을 만들어 낼지 말입니다."

"…그런가."

물론 이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있기에 때때로 새로운 미래가 개척되는 법 아니겠는가.

나비와 친구들은 저들끼리 살아가기보단 모두가 종을 초월하여 한데 어울려 살 수 있는 희망을 택했다.

이든과 레온하르트는 그들이 그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것만이 둘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일단 숲이 안정화될 때까진 이곳에 남기로 했다.

이든은 마저 허기진 배를 채우곤  곧장 수인족들과 작별했다.

아직 대륙에 곳곳엔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것이다.

"조심히 가라냥!!!"

신법을 써서 어느새 저만치 날아간 이든을 향해 수인족들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든 역시 보이건 말건 상관없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데스 스타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이동하던 와중 이든은 돌연 생각에 잠겼다.

불현듯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재차 고민이 몰려온 것이다.

‘난 인간인가. 드래곤인가.’

드래곤 하트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죽거나. 혹은 폐인이 될 뻔한 자신을 구해 준 동아줄 말이다.

하나.

이것은 동시에 그의 몸을 변화시켰다.

육체와 정신의 드래곤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이든의 몸은 반쪽은 인간이되 나머지 반은 드래곤이 되었다.

그럼 그는 인간인가.

아니면 드래곤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에 자신을 무어라 정의할 순 없다고 해도, 그가 바라는 바는 분명히 있었다.

‘인간으로서 정점에 닿고 싶다.’

나약한 인간으로 태어나 등선에 올라 정점이 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그 꿈에서 멀어진 기분이었다.

‘궁상맞게 이 무슨.’

이든이 일순 휘휘 고갤 저었다.

자신이 인간이건 뭐건 간에 당장에 중요한 것은 이런 시답지 않은 고민 따위가 아니었다.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이 아직 대륙 전역에 걸쳐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었다.

놈들을 모두 처리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신법을 쓴 그의 움직임이 좀 더 빨라졌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소리가 한층 더 강해지고, 그의 얼굴로 몰아치던 바람 역시 더욱 차가워졌다.

그 때문일까.

줄곧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매여 있던 상념이 비워지듯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는 일시적일 것이다.

언젠가 지금의 고민이 재차 그를 괴롭힐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든은 어떤 결론을 내릴까.

그는 인간인가.

아니면 드래곤인가.

***

이든이 대륙 전역을 돌아다닌 지 어느덧 석 달이나 흘렀다.

엘리아 숲이 그랬던 것처럼.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이 있던 모든 곳엔 당연하다는 듯 저마다의 문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든은 혈안이 된 듯 데스 스타의 끄나풀들을 발견하는 족족 그들을 찢어 죽이고,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리다 보니, 차츰 사라지던 끄나풀들의 기운도 어느덧 티끌만큼 남게 되었다.

여기까지 해 놨으면 어느 정도는 행동이 굼떠질 만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재차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남은 끄나풀의 기운이 느껴지는 마지막 행선지를 향해서 말이다.

***

어둠 외엔 아무것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끝없는 무저갱 속.

바득.

그곳에 별안간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든…. 참으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닌가."

북풍의 한설과도 같은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데스 스타였다.

지금 그녀는 퍽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화륵.

별안간 데스 스타의 푸른 안광이 요동치는 마음을 대변하듯 찰나 흔들거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대륙 곳곳에 숨겨둔 내 수하들의 위치를….’

그녀에게 복종을 맹세한 수하들의 정체와 위치는 오직 그녀와 그녀의 수하인 단테스만이 아는 것이었다.

외부로 유출될 건덕지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해서 이든이 곤도르 협곡과 엘리아 숲을 건들 때만 해도 그저 우연히 알아낸 줄로만 알았다.

하나.

이든의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우연이 아니란 것마냥 그녀의 아귀가 뻗쳤던 모든 곳을 지우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석 달이나 흘렀다.

대륙 전역에 분포되어 있던 그녀의 수하들은 이젠 티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와신상담의 각오로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이든이란 한 놈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나.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지금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켜보는 데 그쳤으나, 데스 스타는 이제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난 전쟁 때 당한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까지 몸 상태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주인님."

때마침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데스 스타의 푸른 안광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데스 스타가 마침 잘 왔다는 듯 입을 뗐다.

"단테스,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구나."

"하명하십시오."

"날파리 같은 놈이 우리의 계획을 헤집고 다니는구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명령을."

"올리아 왕국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 국왕에게 나의 뜻을 전하거라. 시기가 앞당겨졌음을 말이다."

단테스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 말은."

"그들을 이끌고, 레온하르트 영지에 모든 것을 지워 버리거라."

"명령을 받듭니다."

단테스의 신형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데스 스타의 푸른 안광이 명멸을 반복하며 섬뜩한 빛을 토해 냈다.

데스 스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든, 네놈이 그리 나온다면 나 역시 네놈이 아끼는 것을 지워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