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이든이 레온하르트 영지를 떠난 지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그사이, 이든을 대신해 영주가 해야 할 업무를 문제없이 해 오던 스왈로는 별안간 영지에 손님이 찾아왔단 소식에 허둥지둥 그들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외성 문까지 한걸음에 달려 나간 스왈로는 찾아온 손님들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들은!?"
찾아온 손님이란 것이 다름 아닌 드워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백에 달하는 아주 많은 수의 드워프들이 말이다.
"드워프들이 저렇게나 많이…. 이게 다 무슨 일이래?"
"그러니까. 저들 뒤에 있는 수레들은 또 뭐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도 어느새 몰려와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곤 저마다 한마디씩 꺼내며 떠드는 사이, 가장 선두에 있던 드워프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이든 영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 드워프에게서 영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넋을 놓다시피 하던 스왈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영주님께선 업무차 출타 중이십니다. 해서 그분을 대신해 제가 대리 책임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한데, 드워프분들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이신지…?"
스왈로의 물음에 드워프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러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드워프 왕국의 대장 장인 멀린이라고 합니다."
"대, 대장 장인이시라고요?"
대장 장인이 드워프들의 우두머리를 뜻함을 모를 스왈로가 아니었다.
스왈로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묻는 사이, 멀린이 고갤 끄덕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일전 이든 영주님께서 부탁하셨던 것이 있는데, 그것이 완성되어 가져오는 길입니다."
"영주님께서…. 부탁하셨던 거라니요?"
스왈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멀린 뒤로 끝없이 펼쳐진 수레들을 향했다.
그사이, 멀린이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영지 병사들에게 지급할 미스릴로 만들어진 갑옷과 검입니다."
듣던 스왈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가 줄지어 선 수레들을 가리키곤 더듬대며 물었다.
"저, 저 수레들이…. 전부…. 다 말입니까?"
"예."
멀린이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어찌, 바로 물건들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
병사들이 저마다 갑옷을 착용하곤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 댔다.
"와…. 이 갑옷이 그러니까…. 미스릴로 만든 거라고!?"
"내가 살다 살다 미스릴 갑옷까지 입을 날이 다 오네."
"…야야!"
"응?"
"나 어때? 영주님 같아?"
"…병신."
"뒤질래?"
오가는 정 넘치는 대화 속에 병사들은 하나같이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그사이, 엘프들 역시 착용한 갑옷을 세밀히 살피며 진중한 얼굴로 감평을 늘어놓았다.
"이것이 미스릴 갑옷이군요."
"과연 드워프 장인들입니다."
"갑옷을 입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엘프들은 마을 청년들과는 정반대로 무미건조하다시피 한 반응들이었지만, 저들의 눈동자에서 쏟아져나오는 눈빛을 보면 필시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갑옷을 착용한 병사들이 이번엔 지급된 미스릴 검을 시험해 보듯 휘두르기 시작했다.
"뭐, 뭣이여 이게!? 내가 지금 검을 들고 있는겨 아니면 깃털을 들고 있는겨!?"
"와…. 이게 말이 돼!?"
반응은 즉각적으로 터져 나왔다.
미스릴 검의 무게가 줄곧 사용하던 강철로 된 검보다 한없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엘프들 역시 미스릴 검을 휘둘러보곤 놀라다 못해 넋까지 놓아 버렸다.
육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저마다 갑옷과 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멀린의 곁으로 어느새 그 아비인 몰린이 다가와 있었다.
몰린이 입을 뗐다.
"고생이 많았겠소."
"고생은요. 늘 하던 일을 한 것뿐인걸요."
"그래도 어찌 고생이 아니라 할 수 있겠소? 본래 예정된 날짜보다 훨씬 앞당겨 가져온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요."
멀린은 지난 석 달간의 시간을 떠올렸다.
드워프 왕국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시작된 미스릴 갑옷과 검 생산.
모든 드워프들이 간만에 돌아온 고향에 기운이 넘치기라도 한 것인지, 다들 잠까지 포기해 가며 그간의 작업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치열했던 시간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덕분일까.
작업은 속도에 속도가 붙어 본래 예정된 날보다 수개월이나 앞당겨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완벽히 만들어 냈느냐는 것이다.
몰린이 물었다.
"품질은 어떻습니까?"
"이만한 작업 속도에 나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합니다."
"그래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몰린이 고갤 끄덕이곤 가져온 물건 중 남는 것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검처럼 예리한 장인의 눈이 드워프들이 만들어 온 갑옷과 검을 쭉 한번 훑더니,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갑옷과 검의 표면을 연달아 두드려 댔다.
팅팅.
"음."
고갤 주억거리던 몰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훌륭합니다."
더 말해 무엇할까.
별것 없어 보이는 한마디지만, 이를 말한 이가 전설의 대장 장인 몰린이라면 그 말이 가지는 가치는 한없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멀린이 상기된 얼굴로 고갤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몰린이 고갤 휘휘 저었다.
"내게 감사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저 솔직한 감상을 말했을 뿐, 노력이 수반된 과정과 이 결과는 멀린 대장께서 오롯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한 것은… 다름 아닌 나이지요."
그때였다.
일순 멀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의 아비인 몰린이 어느새 멀린을 향해 고갤 숙이고 있던 것이다.
멀린이 서둘러 그의 아비를 일으켰다.
"아, 아버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허둥대며 황급히 자신을 일으키는 멀린을 향해 몰린이 인자한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몰린의 투박한 손이 아들 멀린의 어깨를 쓸듯이 천천히 두드렸다.
몰린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천천히 입을 뗐다.
"훌륭히 커 줘서…. 정말 고맙소."
"…아버지?"
"훌륭한 장인이 되어 줘서…. 정말 고맙소."
멀린에게 있어 몰린은 아버지이기 이전에 선배 장인으로서의 느낌이 강했다.
그를 보고 자라며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보단 단단한 강철 같은 장인의 모습을 봐 온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언제나 냉정했고, 쉬이 칭찬을 해 주는 법이 없었던 선배 장인 같던 아버지.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배 장인의 모습이 아닌 훌륭히 자라 준 아들을 보는 아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멀린의 입이 일순 앙다물어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북받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듯이 말이다.
하나, 눈가를 비집고 나오는 눈물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멀린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
미스릴 갑옷과 검에 정신이 팔려 하나같이 들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발리스타와 릴리의 얼굴에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 참, 저리도 좋나?"
하나.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나오는 말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발리스타를 릴리가 힐끗 바라보더니 풉 하고 웃어 댔다.
발리스타가 병사들에게 시선을 떼곤 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웃어 대?"
"표정하고 말 좀 일치 좀 시키시지? 누구 닮아 가냐?"
"…닮다니. 누굴?"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스승님이지."
"아…."
이해한 발리스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 하긴…. 이든 형이 딱 이랬지."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론 쌀쌀맞은 말만 골라서 하는 이. 그게 평소 그들이 알던 이든의 모습이었으니까.
"……."
찰나 떠오른 이든 생각에 다시 찾아온 정적 속.
다시 한참이 흐른 뒤에 릴리가 먼저 입을 뗐다.
"…그나저나 스승님이 늦으시네."
"그러게. 벌써 석 달째지?"
"응."
"밥은 잘 먹고 다니실까."
"설마 굶어 죽기야 하실까."
"하긴."
이든 걱정은 사실 안 하는 것만 못했다. 어디다 던져 놓아도 살아남을 양반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발리스타의 시선이 일순 병사들을 넘어 영지 전체를 훑었다.
그가 떠나고 석 달 새에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성벽이 이젠 제법 올라왔네. 마을도 제법 그럴듯해지고."
"그러게 말이야. 몰린 아저씨가 그러시더라고. 이젠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고."
"시간 빠르구나."
"…시간보단 인부들 작업 속도가 빠른 것 아닐까?"
"그것도 그렇고."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조금 비정상적으로 빠르긴 했다.
단 몇 개월 사이에 촌구석 동네에서 영지로 탈바꿈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해?"
발리스타가 난데없는 말을 꺼내자 릴리가 곧장 되물었다.
"뭐가?"
"이든 형 말이야. 참 뭐랄까.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바쁘게 달리면서 살 수 있는지 말이야. 이 모든 것을 이뤄 낸 와중에 쉬지 않고 개인 수련에도 매달리셨잖아. 보통은 여유가 되면 중간에 쉬기 마련인데. 이든 형은 그런 게 전혀 없단 말이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말이야."
"……."
릴리 역시 그 점에 동의하듯 고갤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의 스승은 무리이겠다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대뜸 고갤 들었다.
그리곤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별안간 그에 대한 답을 꺼냈다.
"스승님께서 한결같이 쉬지 않고 수련에 매달리시는 이유 말이야."
"응?"
"높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닐까?"
"높은 곳?"
"스승님께서 항상 그러셨잖아. 경지에는 끝이 없다고. 너만 해도 알고 있는 거 아냐? 소드 마스터가 끝이 아니라는 것 말이야."
발리스타가 고갤 끄덕였다.
"맞아. 막상 여기에 와 보니까.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생각하니까. 아찔하네. 대체 소드 마스터 위에 뭐가 더 있는 거야? 거기까지 가는 데는 또 얼마나 걸릴 테고?"
"…어쩌면 말이야. 스승님도 너랑 같은 마음 아닐까?"
"응?"
"자신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까.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불안하신 게 아닐까?"
발리스타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곧장 되물었다.
"불안? 이든 형이? 에이 설마…."
"…너같이 곰 같은 놈도 그러는데, 스승님이라고 안 그러겠어?"
"…진짜 그런가?"
물론 이에 대한 답은 이든 본인만 알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만도 아니었다.
이게 아니라면 이든이 그토록 쉼 없이 달리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고 말이다.
그때였다.
"훗."
발리스타가 별안간 웃었다.
릴리가 물었다.
"뭐야? 왜 혼자 웃어?"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뭐, 우리 추측이 맞다 해도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거 아냐? 그만큼 실천이 몸에 배어 있다는 거니까."
"하긴."
"근데."
"……?"
"우리 참 뜬금없다. 평소 하지도 이든 형 걱정까지 하고 말이야."
"훗. 그러게."
발리스타와 릴리가 이번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신들 모습이 지금에 와 보니 참 새삼스러웠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간 이어지던 웃음이 뚝 그치고 다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발리스타와 릴리의 눈이 동시에 부릅 떠졌다.
대체 무엇을 봤길래 저리도 놀라는 것일까.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던 하늘에 일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단순한 먹구름이 아니었다.
영지를 중심으로 사방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도사려 왔다.
발리스타와 릴리의 기감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리가 없다. 그 둘이 곧장 눈을 마주쳤다.
"설마…."
입을 뗀 릴리의 안색이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발리스타 역시 기겁을 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온다고…?"
"그, 그런…. 지금은 스승님도 안 계신데…?"
대체 무엇을 느꼈길래 그럴까.
그들의 시선과 기감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성벽 넘어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