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병사들이 처음 언데드 군단을 맞닥뜨렸을 때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일전 산채 토벌 때, 산적들을 앞에 두었을 때와는 궤를 달리하는 공포가 병사들의 온몸을 엄습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단 두 눈으로 보이는 적의 규모 자체가 틀렸으니까.
그뿐인가.
저들의 안광에서 줄기줄기 나오는 흉흉한 살기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말인즉슨, 애초에 언데드와 일개 산적은 비교 자체가 불가한 것이었다.
하나.
지금 병사들은 줄곧 느껴온 두려움을 이겨 내고 한 가닥 희망을 보고 있었다.
저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미스릴 검이 바로 그것이었다.
휘이이이익!!!
"크오아아아악!!!"
미스릴 검의 효과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화살 세례를 받고도 멀쩡히 달려오던 언데드들이 휘두른 미스릴 검에는 추풍낙엽처럼 단칼에 쓰러지고 있었다.
미스릴로 된 장비들이 왜 무가지보의 보물이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희망은 쥐고 있는 이 무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옆에서 굳건히 버티며 함께 서주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은 그들이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희망이었다.
영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기 무섭게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와 준 드워프 장인들.
그들은 어떻게든 빈틈을 뚫고 들어오려는 언데드들을 사력을 다해 함께 막아 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본래는 산적들이었던 인부들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과 뜻을 함께해 주듯 등을 받쳐 주며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병사들은 찰나 생각했다.
이 기세 그대로라면 저 사특한 언데드 무리를 상대로 수성을 성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전쟁이란 언제나 변수를 불러오는 법 아니겠는가.
"……!"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며 언데드를 베어 넘기던 발리스타의 눈이 일순 부릅 뜨였다.
그의 옆에 있던 릴리 역시 어느새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별안간 꽥 소릴 질렀다.
"발리스타!!!"
"나도 알아!!!"
바득.
발리스타가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고는 곧바로 좌측 상단을 향해 미스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아아앙!!!
그가 검을 휘두르기 무섭게 귀청을 찢을 듯한 커다란 금속음이 사방팔방 가득 울려 퍼졌다.
발리스타의 시선이 검을 휘두른 방향을 향했다.
거기엔 어느새 성벽 위까지 단박에 뛰어 올라온 단테스가 휘둘러진 발리스타의 검과 자신의 검을 맞대고 있었다.
검을 쥔 발리스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손만 떨려 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 역시 사정없이 흔들려 댔다.
‘강하다…!’
발리스타가 손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정신이 반쯤 절로 나가던 그때였다.
그와 검을 맞댄 단테스의 백골 주둥아리에서 곧 흥미롭단 기색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오. 제법이군."
"이익!"
강하군도 아닌 제법이라니.
마치 평가받는 듯한 기분에 발리스타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발리스타가 버럭 고함을 쳤다.
"제법은 얼어 죽을! 개새끼가!!!"
느껴진 충격에 떨려 대던 발리스타의 손에 일순 핏줄이 가득 섰다.
온 힘을 쥐어짜 낸 발리스타가 단테스의 검을 밀어내고는 재차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강제로 빈틈을 만들어 내곤 이어진 우호법 장룡의 초식이 단테스를 향해 쏘아지는 그 순간.
단테스의 검에서 토해져 나오던 폭풍 같은 죽음의 기운이 방패처럼 넓게 퍼지며 막을 이루더니 이내 그의 전신을 둘러쌌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것은 마치 검막(劍幕)의 형태로 발리스타의 검을 막아 냈다.
속전속결로 끝을 보려던 발리스타의 회심이었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그 순간, 전신에 검막을 둘러싼 단테스가 그대로 몸을 날려 발리스타를 향해 돌진했다.
쿠르르르르르릉!!!
단테스의 우격다짐과도 같은 돌진에 발리스타의 신형이 성벽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커억!"
동시에 발리스타의 입에서 절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하나.
단테스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는 법이 없었다.
바닥을 구르던 발리스타를 향해 단테스의 검이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그어졌다.
휘이이이이이이익!!
"발리스타!!!"
전방의 적들을 막아 내던 릴리가 깜짝 놀라 대뜸 발리스타의 이름을 외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발리스타가 누운 자세 그대로 몸을 날리듯 굴렀다.
휘익!
콰아아아아아앙!
별안간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까지 발리스타의 몸이 뉘어 있던 곳에 깊은 검흔이 새겨진 것이다.
바닥 깊숙이 뚫어낸 제 검을 회수한 단테스가 서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쉽군. 두 동강 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몸을 날렸던 발리스타의 시선이 단테스로 인해 새겨진 지면의 검흔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기겁을 하듯 흔들렸다.
확실히 놈의 말대로 자칫 피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몸이 반으로 갈라질 뻔한 위력적인 검기(劍氣)였다.
발리스타가 지면에 손을 짚고는 튕겨 내듯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곧장 숨을 골랐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시선은 단테스에게서 떼어질 줄을 몰랐다.
‘미친! 뭐 저리 강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저 백골의 기사는 보통 언데드와는 궤를 달리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저 자신을 몰아붙이며 한 수 위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사이, 단테스는 바닥까지 검을 늘어뜨린 채 발리스타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키기긱.
늘어뜨린 단테스의 검이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과도 같았다.
발리스타의 목숨을 거두러 온 사신 말이다.
단테스가 입을 뗐다.
"어려 보이는데 제법이군. 경지는 어느 쯤이지? 소드 마스터, 그쯤 되는가?"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를 두고 그쯤이라니.
어이가 없던 모양인지 발리스타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뭐, 그쯤?"
"천재로군."
"그런 얘길 많이 듣는 편이지."
"그럼 자네가 그 소문의 칼라슈인가? 실력은 소문대로인데 생김새는 듣던 것과 다르군. 귀공자 타입이라던데, 아무리 봐도 자네는 그쪽 계열로 생기진 않았는데 말이야."
단테스의 말을 듣던 발리스타가 발끈하고는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이 새끼가!"
자신을 두고 칼라슈라는 것도 충분히 열 받을 만한 상황이건만, 외모 비하까지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던 단테스의 움직임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사이에 성문을 두고 삼 장 이상 거리를 벌린 채 말이다.
단테스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아쉽군. 간만에 상대다운 상대를 만났는데 말이야."
"…무슨 말이야?"
"별것 아니야. 그저 한가로이 자네와 검을 나눌 시간은 없다. 그 말이지."
"뭐…?"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단테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이해가 되기도 전에 성문이 폭발하는 것처럼 굉음이 울려 대더니 일순 와르르 쪼개졌다.
발리스타가 화들짝 놀라며 성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차마 믿기 싫은 광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의 공성 전차가 성문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린 것인지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을 부순 채로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비집고 나온 틈 사이로 성벽 밖에 있던 언데드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발리스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던 그 순간이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릴리의 고함이 재차 그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멍청아, 어딜 보는 거야!!!"
릴리의 고함을 듣던 발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카아아아아아앙!
단테스의 검이 그의 목전까지 왔다가 발리스타의 검에 막혀 있었다.
검과 검을 맞댄 채 코앞까지 다가온 단테스를 노려보며 발리스타가 이를 갈았다.
"비겁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비겁? 착각이 심한 것 아닌가. 지금 우리가 정정당당한 대결 중인 줄 아나? 현실을 직시해라. 우린 전쟁 중이다."
"……!"
단테스가 검을 맞댄 채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날려 한 바퀴 돌더니, 발리스타의 뒤를 점하기 무섭게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발리스타 역시 황급히 몸을 돌리곤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단테스의 검을 막기 시작했다.
그사이, 뚫린 성문 쪽에선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만약을 대비해 마르코가 성문 앞에서 대기시켜 뒀던 산적들의 비명이었다.
산적들은 영지의 정규 병사나 드워프들과 달리 미스릴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들의 무력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비명은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젠장…!"
그 소리에 발리스타는 이를 갈았다.
발리스타에게 있어 눈앞의 단테스는 오로지 그에게만 집중을 해도 승부를 장담키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 와중에 성문에서 들려오는 아군의 비명 탓에 신경이 분산되니 단테스의 검을 막아 내는 것이 점차 힘에 부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 단테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리스타를 더욱 압박해 나가고 있었다.
카앙! 카아앙! 카앙!
단테스의 검을 막아 내는 발리스타의 손이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움직임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단테스의 검에, 신경은 들려오는 비명으로 자꾸만 향하니 검의 움직임이 점차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발리스타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며 단테스의 공격에 무너지던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산적들을 진두지휘하던 마르코가 별안간 단테스를 향해 뛰어내렸다.
발리스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단테스의 검이 자연히 멈추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크로의 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금속음이 재차 귀를 때렸다. 동시에 마르코의 신형도 뒤로 저만치 날아갔다.
날아간 마르코의 목구멍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단지 일격을 교환한 것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뒤로 날아가던 움직임을 강제로 멈추곤, 검을 역수로 쥔 채 일어서려던 마르코의 눈이 부릅 떠졌다.
발리스타 근처에 있던 단테스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것이다. 그러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마르코를 향해 냅다 검을 휘둘렀다.
마르코 역시 역수로 쥐었던 검을 서둘러 고쳐 쥐었다.
하나 역부족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그의 몸이 단테스의 검을 버텨 내지 못하고 성벽까지 날아가 처박힌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조금 전 제대로 된 검을 휘둘렀을 때도 힘의 격차에 공격을 가한 그의 몸이 도리어 날아갈 정도였는데, 이번엔 서둘러 막아 대는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마크로가 먼지를 피우며 성벽에 처박힌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때였다.
발리스타의 신형이 단테스를 향해 쏘아졌다.
"뒈져어어어어!!!"
악을 지르며 달려드는 발리스타의 검에 검은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터져 나왔다.
이를 본 단테스가 내내 한 손으로 쥐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지금 발리스타의 일격만큼은 그조차 쉬이 막아 낼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때였다.
단테스의 신경이 온전히 발리스타를 향하던 그 순간, 찰나 정신을 잃었던 마르코가 단테스를 향해 달려드는 발리스타를 보곤 저 역시 단테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곤 반으로 쪼개진 제 검에 오러를 잔뜩 피우곤 이를 단테스의 후미를 향해 비수처럼 날렸다.
휘이이이익!!!
"쓸데없는 짓을."
단테스가 중얼거리며 제 뒤통수를 향해 암기처럼 날아오던 마르코의 검을 서둘러 쳐 냈다.
그리곤 재차 발리스타를 향해 신경을 돌리려던 그 순간.
마르코가 조금 전 기세 그대로 멈추지 않으며 맨손으로 계속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단테스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곤 움직임이 굼떠진 그때였다.
단테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마르코가 별안간 양손을 깍지 낀 채 단테스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마르코가 발리스타를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지금이다! 이대로 베어라. 발리스타!!!!!!!"
"뭐어!?"
단테스를 향해 달려들던 발리스타의 눈동자가 찰나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거칠게 흔들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