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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화. (242/250)

242화.

발리스타의 검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흑색의 검기(劍氣)는 그야말로 흑룡의 모습을 빼닮아 있었다.

크오오오오오!

토해 내듯 울리는 검명(劍鳴) 역시 용오름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발리스타의 성명절기.

흑룡멸마아참격(黑龍滅魔牙斬激)이 전방의 언데드 병사들을 휩쓸고, 연달아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려 공성 전차까지 씹어 먹듯 깨물어 부수기 시작했다.

쾅!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공성 전차 네 대가 흑룡의 이빨에 산산조각이 나며 잔해로 허물어져 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나.

용의 분노는 고작 여기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여섯 대의 전차 모두를 씹어 먹어 치울 심산인 양 흑룡이 재차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던 그때였다.

피이이이이잉!

난데없이 십자(十) 모양의 짙은 푸른색의 검기가 날아오더니 그대로 흑룡의 아가리 속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흑룡의 몸속을 휘젓는가 싶더니.

콰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흑룡이 조각나듯 터져 나갔다. 온 힘을 쏟아 냈던 발리스타의 성명절기를 모양 그대로 베어 버린 것이다. 절기가 뿔뿔이 흩어지며 사라지는 사이, 발리스타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의 시선이 자연히 검기가 쏘아졌던 곳으로 향했다.

‘…뭐야. 저 새끼는!’

발리스타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올리아 국왕이 조금 전 검기가 자신의 것이었단 것처럼 말에 올라탄 자세로 사특한 검기를 줄줄이 흘리고 있었다.

바득.

발리스타의 이가 절로 갈렸다.

마르코까지 희생해 가며 어렵게 단테스를 쓰러뜨렸건만, 그 못지않은 괴물 녀석이 하나 더 있던 것이다.

‘미치겠군. 조금 전 절기로 모든 힘을 쏟아 냈는데, 저런 놈이 하나 더 있을 줄이야.’

산을 넘었더니, 또 하나의 큰 산이 있던 격이었다.

하나.

올리아 국왕을 향하던 그의 시선은 금세 거두어졌다.

달려들던 남은 공성 전차가 레온하르트 병사들의 발악과도 같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성벽을 연달아 들이받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공성 전차만 성벽을 들이받는 것이 아니다.

공성 전차를 밀던 트롤 역시 젖 먹던 힘을 다해 금이 간 성벽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쿠우우우우우웅!!!

공성 전차의 이어 트롤의 무데뽀와 같은 돌격까지 더해지니,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성벽은 금세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무너져 내린 성벽 위에 있던 병사 일부가 그대로 잔해에 깔리기 무섭게, 이때다 싶었는지 언데드 병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토록 많은 언데드 병사들을 막아 냈음에도 여전히 대단한 물량이 남아있었다.

남은 산적들과 병사들, 드워프들까지 합세하여 고군분투했지만, 놈들의 침투를 막기란 어려워 보였다. 성벽이 무너지고 정상적인 수성이 불가한 이상, 물량 공세 앞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금세 혼란스러워졌다.

기력이 바닥난 발리스타가 숨을 고르며 서둘러 마기를 모으고 있었고, 그사이에 릴리가 사력을 다해 얼마 남지 않은 마기로 연달아 초식을 펼쳐 댔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적들의 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한 발악일 뿐이었다.

성안에서 끝없이 울려 오는 비명.

탁월한 전략으로 레온하르트라는 고지를 넘은 올리아 국왕이 낮은 웃음을 흘려 댔다.

"흐흐흐…."

그리고 혼란 속에 공포를 더하듯 그마저 합세할 심산인 양 올리아 국왕이 영지를 향해 말을 내달리던 그때였다.

뿌우우우우우.

별안간 들려온 뿔 피리 소리에 달리던 그의 말이 덜컥 멈추어 섰다.

"응?"

올리아 국왕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서둘러 옮겨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대체 무엇을 봤길래 표정이 저토록 심기가 불편한 모양새일까.

올리아 국왕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영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동쪽 숲. 그곳에서 난데없이 소수의 엘프족 수호 정예병과 엘프족 장로들이 쏟아져 나오며 언데드 군단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엘프 놈들이…!"

다 된 밥에 재 뿌려지는 심정으로 올리아 국왕이 이를 바득바득 갈던 그 순간, 올리아 국왕을 향해 푸른 섬광이 난데없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올리아 국왕이 화들짝 놀라며 곧장 검을 휘둘러 이를 맞받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앙!

하나.

맞받아쳤음에도 충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큿!"

올리아 국왕의 몸이 휘청대더니 말안장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의 몸이 바닥을 몇 번 구르다가 착지해 멈춰 섰다. 그러곤 잔뜩 열이 올랐는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조금 전 섬광이 날아왔던 곳을 주시했다.

정확히 올리아 국왕을 노리며 빛을 쏘아 낸 이의 정체.

그는 다름 아닌 엘프의 왕 갤러하드였다.

***

갤러하드는 곧장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레온하르트 영지의 무너진 성벽으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언데드 병력의 이동 경로를 끊어 내라고 말이다.

왕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엘프족 수호 정예병들과 장로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가기 무섭게 성벽 근처까지 금방 도착해서는 언데드 군단의 이동 경로를 끊기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도움을 와준 엘프족의 수는 고작 수십에 불과할지라도 한 명, 한 명이 일기당천의 기세로 적들의 경로를 휘저으니 성 내부에서 울리던 비명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나.

갤러하드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성 내부에 있을 딸 걱정에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던 갤러하드가 일순 화들짝 놀라더니 말안장에서 몸을 날렸다.

뜬금없이 웬 검기가 갤러하드를 노리며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것이다.

스윽.

미처 피하지 못한 갤러하드의 말이 검기 모양을 따라 수직으로 분해되며 비명횡사한 사이, 몸을 구른 갤러하드가 튕기듯 서둘러 일어나 검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갤러하드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올리아 국왕이 조금 전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뜻이 담긴 표정으로 갤러하드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올리아가 입을 뗐다.

"그대가 엘프의 왕이오?"

매섭게 날아온 검기치곤 질문은 제법 정중했다.

갤러하드 역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고갤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엘프의 왕 갤러하드요. 들어 본 적 있소?"

올리아 국왕이 고갤 저었다.

"잘은 모르오. 다만 과거엔 제법 유명한 기사였다고 들었소. 맞소?"

"지금도 제법 뛰어나오만."

"그렇소?"

올리아의 시선이 문득 갤러하드의 좌수(左手)에 쥔 검을 지나, 비어 있는 오른팔 쪽을 향했다.

올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본래는 오른손잡이였던 모양이요?"

"그랬지요."

"왼손으로 전향한 지는 얼마나 되었소?"

"삼 년 좀 넘었소."

"삼 년이라. 생각보다 짧구려."

"그런 셈이지."

"괜찮겠소?"

"무엇이 말이오?"

"나 올리아는 대륙에 이름은 떨친 적은 없으나, 패도를 꿈꾸는 만큼 제법 강한 축에 속했다고 자부하는 편이오. 데스 스타 님에게 힘을 하사받은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이오?"

"그대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내 엘프족 숲은 아니 건드릴 테니. 병사들을 물리시오."

"내가 무어라 답할 것 같소?"

"…뭐, 그리 묻는 것을 보니, 보나 마나 거절할 것 같소만."

"맞소."

그때였다.

치이이잉.

갤러하드가 쥔 검에서 일순 검명이(劍鳴) 울렸다. 그의 의지가 무언지 마치 알려 주듯 말이다.

스윽.

갤러하드가 검을 치켜세우곤 재차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우리 둘 다 너무 잡소리가 길었던 것 같소."

"그런 것 같소."

올리아 역시 내내 늘어뜨리던 검을 세웠다.

그 순간.

화르륵.

그의 검에서 사이한 기운이 줄줄이 토해져 나왔다.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대화는 뚝 멈췄다.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해 겨눠진 채 오고 갈 검만이 둘이 나눴어야 할 진짜 대화였다고 말이다.

정적은 찰나에 불과했고, 두 힘이 격돌하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순 갤러하드의 신형과 올리아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거친 금속음이 사방팔방에 날카롭게 울려 댔다.

카아아아아아앙!!!

갤러하드의 좌수와 올리아의 검을 쥔 양손이 격돌로 부르르 떨려 댔다.

두 검수의 눈빛도 찰나 흔들렸다.

서로의 실력에 상당히들 놀란 눈치였다.

거칠었던 소음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맞댄 검이 떼어지기 무섭게 재차 두 검수의 검이 쾌속하게 휘둘러지며 연달아 부딪쳤고,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금속음이 혼란 속에서 노래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카앙! 카아아앙! 캉! 카아앙!

갤러하드의 검은 쾌속의 묘리를 담고 있다. 올리아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합은 찰나의 순산에도 수십 차례가 오갔다.

그렇게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수백 번의 검이 오가던 그때였다.

무심했던 정적 속에서 올리아가 입을 먼저 입을 뗐다.

"우리 둘은 아무래도 동수인 것 같소. 승부가 쉬이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겠소?"

갤러하드가 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제아무리 당신의 수하들이 뛰어나다 한들 저리 몰아치는 언데드 병력을 모두 막기란 불가능에 가깝소. 지금도 보시오. 죽어 가는 인간 놈들이 감염되어 우리와 같은 언데드로 변하고 있는 모습을. 우릴 막을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보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소. 그만 포기하고 물러나시오. 레온하르트 영지의 미래는 더는 없소."

"……."

올리아의 말을 듣던 갤러하드의 시선이 찰나 레온하르트 영지 쪽을 향했다.

확실히 올리아의 말대로 레온하르트 영지의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갤러하드, 그 자신의 수호 정예와 장로들까지 중간에 난입했음에도 늦췄을지언정 여전히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나.

왜일까.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갤러하드가 웃고 있는 이유는.

갤러하드의 표정을 본 올리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정신이라도 나갔소? 무엇이 우스우시오?"

"…너무 방심하고 있는 것 아니오?"

"내가 말이오?"

"우리의 병력이 이것이 끝일 것이라 그리 생각하시오?"

"더 있단 말이오?"

"…본대는 아직 오지도 않았소."

"허풍이 심하시군."

"허풍? 과연 허풍일 것 같소?"

그때였다.

올리아의 안광을 마주하던 갤러하드의 시선이 문득 좌우를 살폈다.

그가 대뜸 더없이 환하게 웃어젖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제야 왔구려. 우리의 본대가."

"그 무슨…?"

알아듣지 못할 말에 올리아의 시선이 자연히 갤러하드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그의 짙푸른 안광이 흔들대기 시작했다.

믿기지 못할 것이라도 본 듯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저, 저건… 저건 대체…!"

갈대처럼 흔들리는 올리아의 시선이 좌우로 번갈아 가며 향한 곳.

거기엔.

별안간 허공에서 거대한 이공간 문이 웅장히 열리고 있었고, 문이 열린 그 틈으론 수천의 오크 전사들과 아슬란 제국의 황실 근위대가 홍수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양쪽의 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전사들. 그중 가장 선봉에 선 이가 검집에서 검을 뽑고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레온하르트의 영지를 위하여! 그리고.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우아아아아아아아!!!!

곧이어 엄청난 함성과 함께, 도착한 전사들이 언데드 병력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선봉에서 전사들을 다독인 채 고함을 내지른 이 역시 여전히 선두를 유지한 채 돌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선봉에 선 이의 정체.

다름 아닌.

아슬란 제국, 전설의 기사.

레온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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