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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화. (243/250)

243화.

선봉에 서서 언데드 병력을 향해 돌진하던 레온하르트의 검에서 별안간 새파란 검기가 벼락같이 쏘아졌다.

피이이잉! 피이이잉! 피이이잉!

연달아 쏘아진 십자(十) 모양의 검기가 정확히 언데드 병력만을 맞추며 놈들의 침투 경로를 단박에 무너뜨렸다.

"……."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문득 조금 전 위력적인 검기를 발산했던 검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제법 쓸 만하군."

그의 눈이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오른손.

그것은 본래 그의 손이 아니었다.

전설의 대장 장인 몰린이 그를 위해 제작해 준 미스릴 의수였다.

오른손뿐일까.

그의 왼쪽 다리 역시 똑같은 재질의 의족이었다.

본래 그의 손과 발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그럼에도 몰린이 그에게 준 의수와 의족은 필시 범상치 않은 물건임에는 분명했다.

물론 마나를 주입해 작동해야 한다는 법이 까다롭긴 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이렇게….

간만에 전장을 누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말을 타고 달리던 레온하르트의 옆으로 칼스테인 공작이 마주 달려와 옆에 섰다.

칼스테인 공작이 입을 뗐다.

"다시 이렇게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레온하르트 공작님."

듣던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 그대들에게 면목이 없네. 내가 너무 늦게 왔어."

"……."

제국이 세워지고 별안간 말도 없이 사라졌던 레온하르트 공작.

당시 젊은 시절에 칼스테인 공작은 그를 말도 못 하게 원망했었다.

평소 존경하던 기사가 아무런 얘기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그 사이 제국이 위험했던 몇 차례 순간에도 끝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만 해도 몰랐지….’

그 전설의 기사 레온하르트 공작이 드래곤이란 존재였고.

그가 사라진 날이.

레온하르트라는 이름의 드래곤이 데스 스타로부터 세상을 지켜 낸 순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칼스테인 공작이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

"…오히려 의심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싸워 주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훗."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칼스테인 공작의 그 무미건조한 얼굴에도 찰나 미소가 지어졌다.

그 잠깐의 대화 사이, 레온하르트의 검과 칼스테인의 검은 수백 마리의 언데드를 베어 넘겼다.

언데드를 침투 경로를 휘저으며 전장을 휩쓸던 칼스테인 공작이 레온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든 공작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레온하르트가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그는 곧장 영지로 갔네. 가족들의 안위를 살피고 동시에 병사들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 마침 저기에 보이는군."

"응?"

레온하르트가 가리킨 곳에 이든이 멀쩡한 성벽 위에 서서 별안간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 내부에 침투한 언데드 병력을 그새 싹 정리한 모양인지, 그의 갑옷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소와 함께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향한 곳.

그의 시야에 비친 이든이 성벽 밖 전쟁터를 향해 검을 높게 치켜세우곤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사방천지에 쩌렁쩌렁 울렸다.

"전 병력!!! 창칼을 세워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놈들을 향해 돌격하라!!!"

그때였다.

이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너진 성벽과 성문으로 레온하르트 영지의 용사들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성은 오롯이 영주인 이든에게 맡기고, 사특한 언데드 병력을 향해 병사들이 내내 감추었던 발톱을 비로소 드러냈다. 그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

갤러하드와 여전히 검을 맞댄 채 힘을 겨루던 올리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려댔다.

그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마 지금 상황이 여전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자신들이 쥐고 있던 기세가 난데없는 병력의 난입으로 한순간에 레온하르트 영지 쪽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그의 시선이 내내 반격으로부터 몰살당하는 언데드 병력에서 떼어질 줄 모르던 그때였다.

별안간 갤러하드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자연히 올리아의 눈이 마주한 갤러하드를 향해 돌아왔다. 올리아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곧바로 맞받아쳤다.

카아아아아앙!

날카롭게 울리는 금속음과 함께 갤러하드가 입을 열었다.

"나를 앞에 두고 어찌 그리 한눈을 파시오."

"…알고 있었소?"

"무엇이?"

"저들이 도우러 올 것이란 걸 말이오."

"알고 있었다마다. 예상했던 것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허허."

듣던 올리아가 허탈한 듯 작게 웃었다.

야생의 생태계로 표현하면 그 자신들이 포식자이고, 레온하르트 영지는 먹잇감이라 생각했다.

하나.

지금 상황을 보라. 되레 자신들이 호랑이 굴에 뛰어든 먹잇감 꼴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사방에서 언데드 병력이 죽어 가며 울어 대는 괴성이 그 증거였다.

"패도는 한낱 망상이었나. 첫걸음부터 이리 무너질 줄이야…."

패도란 바람이 망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갤러하드의 검에서 새파란 오러 블레이드가 일순 화염을 터트리듯 솟아오르며 예리한 기세를 한껏 세웠다.

갤러하드가 입을 뗐다.

"그렇소. 그대의 꿈은 무너졌소. 하나,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소. 이왕 시작한 것 끝은 봐야 하지 않겠소?"

"……."

맞는 말이었다.

올리아가 고갤 주억거렸다.

허탈한 기색을 보이던 그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재차 사특한 명멸을 토해 냈다.

"맞는 말이오. 패도란 꿈은 물 건너갔으나, 훌륭한 전사를 앞에 두고 내 어찌 이 대결을 멈출 수 있겠소. 계속합시다. 누가 죽든 간에."

갤러하드가 고갤 끄덕였다.

"좋은 자세요."

"……."

"참고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나에게만 집중하시오. 어차피 우리 둘의 대결에 눈치 없이 끼어들 이는 없을 테니 말이오."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소."

"좋소. 그럼, 다시 시작해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둘의 신형이 재차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사방에서 들리던 혼란스러운 괴성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카아아아아아앙!

그들의 귓가에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것은 오직 서로의 검이 오고 가며 부딪치면서 나는 이 하나의 금속음뿐이었다.

그러니.

더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서로의 감정이.

서로의 생각이.

서로의 이상향이.

그 모든 게 오고 가는 이 검 속에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검의 이야기다.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검수들만이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반 각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그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도 오갔을 것이다.

두 검수는 이 순간만큼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잊었다. 눈과 귀, 그들의 모든 감각이 오직 상대의 검만을 향했다.

어떤 때는 베고.

어떤 때는 찌르며.

어떤 때는 두 가지를 동시에 펼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급소를 노리고.

또 다른 어떤 때는 허초로 상대를 속이며 그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움직임에 깃든 각기 다른 이야기들.

일각이란 시간 동안 수백의 합이 오갔고, 수많은 생각이 상대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동안에 대화가 점차 종전으로 치달을 때.

두 검수는 보았다.

짧은 듯하면서도 긴 듯했던 대화 속에서 얻게 된 다음 경지로 향하는 깨달음을 말이다.

하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깨달음을 끝끝내 손에 쥘 이는 둘 중에 하나뿐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지금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끝내 하나가 죽어야지만 비로소 막을 내릴 수 있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선수를 취한 이는 올리아였다.

올리아의 검이 더더욱 사특한 검기를 토해 내며 맹렬히 휘둘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카아앙! 카아아아아앙!!!

대화는 충분했으니, 더는 필요 없다. 이제는 상대를 절명시키겠다는 각오만이 그의 검에서 오롯이 표현되고 있었다.

갤러하드가 그의 맹렬한 움직임에 저항하듯 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다시 수십 합이 지나갔다. 둘은 훌륭한 검수였다. 동시에 우열을 가릴 수 없기도 했다.

쉬이 나지 않을 결론. 이것이 끝날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조금 전 그 깨달음.

그것이 누구의 손에서 먼저 실체를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성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사방에 혼란이 차츰 줄어들고 전쟁의 승기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질 때쯤.

이제는 정말 무심히도 두 검수의 금속음만이 울리며 쉴 틈 없이 상대의 숨통을 노려 댔다.

그리고 길었던 이 대결의 종착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휘이이이이익!!!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올리아의 검이 갤러하드의 오른쪽 목 부위를 향해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올리아의 의중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갤러하드의 비어 있는 오른팔이 무심코 움직이려 하는 본능을 이용하려는 것.

올리아는 십중팔구의 확률로 이 노림수가 통할 것이라 여겼다.

갤러하드의 눈썹이 찰나 꿈틀거렸다.

이를 예상하지 못해서?

그럴 리가.

검의 대화를 나누는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일전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이든이 오른팔을 본능처럼 움직이던 그의 습관을 고치겠다고 몰아치던 그 순간을 말이다.

찰나 예전 일을 떠올렸던 갤러하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듯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올리아의 검을 몸을 틀어 비켜 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그의 비어 있는 오른팔이 다시 버릇처럼 움직이려는 이유는.

수백 년간 검을 쥐어 온 오른팔.

그 본능은 쉽사리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노력을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본능은 노력을 앞서갈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오자 별안간 이든의 말이 떠올랐다.

-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선 다른 본능을 깨울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더군요. 죽음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주마등처럼 이든의 말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찰나 잠자코 있던 갤러하드의 왼손에 들린 검이 별안간 번개처럼 움직이고 섬광처럼 쏘아졌다.

파아아아아앗!!!

"……."

"……."

일순 사방의 혼란도. 내내 귓가를 울려 대던 금속음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이 찾아온 것이다.

그 정적 속.

올리아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문득 아래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저 자신의 복부를 뚫고 등에 삐죽 솟아 나온 갤러하드의 검을 향했다.

"크헙!"

그렇게 허망한 듯 갤러하드의 검을 바라보던 올리아는 울컥 피를 토했다. 새파란 안광과 대비되는 붉은 피를 말이다.

그가 씁쓸히 웃으며 쥐어 짜내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대의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소."

"맞소. 내 왼팔은 바보같이 움직이지 못했소."

"하나, 깨달음에는 나보다 더 먼저 도달했구려."

"…운이 좋았소."

"운도 결국 실력이오. 축하하오. 그대는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겠구려. 난… 여기서 멈출 시간인가 보오."

"잘 가시오. 좋은 승부였소."

"…덕분에 잘 가겠소."

올리아의 안광이 차츰 빛을 잃어 갔다.

조금씩 잦아지던 그 숨소리가 이내 뚝 끊겼다.

의식이 끊어진 순간, 그의 몸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올리아의 몸을 뚫었던 검이 마저 그의 몸을 뚫고 나와 갤러하드의 왼손으로 절로 되돌아왔다.

마치 그의 검이 스스로 의식을 가진 양 혼자서 말이다.

소드 마스터란 경지를 뛰어넘어.

이기어 경지라는 입신(入神)에 오른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기적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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