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갤러하드의 시선이 문득 주변을 훑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이 너무도 조용했던 탓이었다.
혼란만이 가득했던 이 땅. 언데드의 사특한 괴성과 그들과 사투를 벌인 고함만이 가득 울리던 이곳에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다.
길게만 느껴진 전투가 끝나고 찾아온 허무함 때문일까.
모두가 공허한 눈으로 전쟁이 불러온 참상을 시야에 담던 그때였다.
별안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차 사방으로 번졌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울음소리였다.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대뜸 몰아쳐 오는 슬픔만이 모두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릴 뿐이었다.
전쟁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돌아서 보면 결국엔 공허한 광경만이 남는 피폐함 말이다.
그렇게 병사들의 슬픔이 한도 끝도 없이 커질 무렵이었다.
어느 순간, 흐느끼던 소리가 뚝 끊겼다.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던 이든이 입을 뗀 것이다. 내공을 실은 그의 음성이 모두의 귓가에 꽂히며 우렁우렁 울렸다.
"벌써부터 슬퍼할 때가 아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니?
모두의 표정이 이든의 목소리에 그리 답하고 있었다. 하나, 소수의 몇몇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진정한 흑막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든이 재차 입을 떼곤 말을 이었다.
"전군, 모두 성으로 복귀 후에 전투태세를 그대로 유지한다. 동료를 향한 애도는 모든 싸움이 끝나고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이든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방 곳곳에서 병사들을 재촉하는 고함이 쩌렁쩌렁 들려왔다.
"쿠훌락 부족. 모두. 성 앞에서 대기한다!"
그중 한 명은 오크족의 우두머리인 쿠훌락의 목소리였고.
"아스란 제국 병사들은 즉시 성 앞에서 대열을 갖추도록!"
또 한 명은 아스란 제국의 근위대를 이끄는 칼스테인 공작의 목소리였으며.
"엘프족은 모두 성 앞에서 대기한다!!!"
또 다른 이의 음성은 조금 전 깨달음을 얻은 엘프의 왕 갤러하드의 것이었고.
"형제들이여! 우리도 끝까지 함께하자!"
마지막으로 들린 이의 음성은 드워프 종족의 대장 장인 멀린의 것이었다.
각 종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들이 조금 전의 슬픔은 잠시 묻어 두고, 병사들을 다그치며 서둘러 전열을 다시 갖추던 그때였다.
휘익.
타박….
성벽 위에 있던 이든이 몸을 날리더니 어느새 아래로 내려와 사뿐히 지면을 밟았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총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이든을 향했다. 그러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스윽.
그리고 그 기다림에 답하듯 이든이 병사들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뗐다. 그가 전군에 내린 명령은 이것이었다.
"모두 대기."
명령 하달과 동시에 병사들이 바짝 군기가 든 얼굴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사이, 전열을 갖춘 병사들을 성 앞에 대기시킨 이든은 그들 모두를 뒤로한 채, 곧장 저 혼자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러 가듯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병사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이든의 걸음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적군이 전열을 갖추던 대지 한가운데에서 말이다.
그의 발소리만이 외로이 울리다가 재차 찾아온 정적 속. 듣는 이 하나 없음에도 이든이 별안간 입을 열더니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듯이….
"…오랜만이구나.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한 여인의 목소리가 이에 답하듯 뜬금없이 사방에 울리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 마찬가지다. 정말 간만이구나. 이든…
***
별안간 하늘이 먹물이라도 번진 것마냥 시커멓게 물들었다.
조금 전 어두웠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든이 멈춰 서 있던 자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 낯선 이공간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여인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엘프를 연상시키는 이목구비와 새하얀 피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기다란 흑발이 이목을 집중시켰고, 거기에 더해 몸에 착 달라붙듯이 하는 흑색의 드레스까지.
얼핏 보면 참으로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인이겠으나, 그녀에겐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바로 한쪽 눈에 기다랗게 그어진 검흔(劍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흉터가 그녀가 단순히 매혹적인 것을 넘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
이공간에서 나타난 그 여인은 한참 동안 말없이 사방을 둘러봤다.
그녀의 하나 남은 시야에 저 자신이 직접 언데드로 만들었던 올리아 왕국의 병사들이 주검이 되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불사의 군대나 다름없는 언데드 병력을 이렇게 만든 이들이 누굴까.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시선이 레온하르트 성이 있는 전방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한 줌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레온하르트 성 앞을 지키듯 위풍당당히 선 병력들을.
병력의 구성은 참으로 신기했다.
인간과 엘프, 오크와 드워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들이 대열을 맞추고 늘어서 있었으니까.
그때, 전방의 병력을 훑던 그녀의 눈이 한 사람을 응시하듯이 덜컥 멈추었다.
여인의 시선이 향한 이.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였다.
그녀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레온하르트…. 일전에는 쥐새끼같이 숨어 있더니만, 오늘 모습을 드러냈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걸까. 레온하르트가 헛웃음을 내뱉던 그때였다.
근처에 있던 이든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아쉽게도 오늘 당신의 상대는 나야."
여인의 시선이 레온하르트에서 자연히 이든에게 옮겨졌다.
"알고 있다. 나 역시 레온하르트보단 너에게 더 관심이 가는 중이니까."
이든이 피식 웃었다.
"영광이군. 다른 이도 아닌, 데스 스타가 누구보다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니 말이야."
여인의 정체는 바로 이 모든 것의 흑막이던 데스 스타였다. 데스 스타가 웃으며 답했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지. 일전, 고작 인간이었던 네놈이 나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니 말이야."
"드래곤 하트에 말이지?"
"그래, 맞아. 드래곤 하트에."
"쓰리던가?"
"제법 쓰렸지. 너는?"
"난 뭐, 죽다 살아났지."
"그래 맞아…. 그때의 넌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 한데 지금은 이렇게 멀쩡히 내 앞에 다시 나타났군."
말을 하던 데스 스타가 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단하군.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뭐가 말이지?"
"너의 안에 자리한 레온하르트 녀석의 반쪽짜리 드래곤 하트 말이야. 그것이 널 살린 모양인데, 볼수록 신기하군. 인간의 육체와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다라…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아무튼, 그래서 그런가. 네놈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구나."
"냄새?"
"드래곤 냄새."
"아, 그 냄새."
"뭐, 완벽한 드래곤 냄새는 아니야. 드래곤과 인간이 반반씩 섞여 있달까."
"뭐, 남의 몸 감상평은 그쯤 하시고."
이든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우득 소릴 냈다. 그가 별안간 몸을 풀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몸 상태는 어때? 드래곤 하트는 얼마나 회복됐지?"
데스 스타가 어깰 으쓱였다.
"글쎄. 한…. 구 할 정도? 네놈이 하도 난리를 쳐 대는 덕분에 요양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예정보다 빨리 나왔거든."
"내가 지난 몇 달간 고생 좀 했지. 대륙 곳곳에 숨어 있는 네놈 끄나풀들을 일일이 찾아내 때려죽이느라 말이지. 근데…. 그것 때문에 똥줄이라도 탔나 보지? 몇 남지도 않은 병력을 기어코 이곳까지 보낸 것을 보면 말이야."
"네놈 손에 병력을 허망하게 잃느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거든. 그래서 어때, 내 깜짝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데스 스타의 물음에 이든의 얼굴이 차츰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에 드냐고?"
그때였다.
이든의 신형이 데스 스타를 향해 별안간 벼락같이 쏘아졌다.
그의 주먹이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인 데스 스타의 아가리를 부숴 버릴 심산인 양 빠르게 휘둘러졌다.
파아아아아아앙!!!
하나.
제아무리 기습이었다 해도 데스 스타가 잠자코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이든이 날렸던 주먹은 어느새 데스 스타의 손바닥에 가로막혀 있었다.
데스 스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웃기는군. 시작하자는 말도 없이 기습이라니.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이든도 덩달아 피식 웃으며 답했다.
"굳이 말이 필요한가? 우리 사이에 말이야."
"하긴. 그렇기야 하지."
이든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주억거리던 데스 스타의 손에서 일순 검 모양의 짙푸른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죽음의 검 ‘데스 블레이드’였다.
데스 스타가 그것을 곧바로 이든을 향해 휘몰아치듯 휘둘렀다.
하나, 이든은 데스 스타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몸을 날려 이미 멀찍이 뒤로 물러선 후였다.
데스 스타의 기습과도 같은 검격(劒擊)이 무위로 돌아가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든이 허리춤에서 제 검을 뽑았다.
레온하르트에게 받았던 그의 보검이 아닌, 과거 그가 사용하던 흑색의 검과 비슷한 모양의 검이었다.
스릉.
검집에서 검을 뽑은 이든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먹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검이라. 흑막 중의 흑막. 데스 스타가 왜 이래? 너무한 것 아닌가?"
"고작 검 가지고 왜 그래? 우리 사이에 말이야."
나름 흔들겠답시고 비꼬아 본 도발이었건만, 조금 전, 이든이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준 데스 스타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한 방 먹자, 이든이 볼을 긁적였다.
"하긴. 그렇기야 하지."
치이이이잉.
그때, 이든이 쥔 검에서 검명(劒鳴)이 울려 댔다.
그리고 그와 마주한 데스 스타의 검에서도 짙푸른 색의 사이하고 섬뜩한 기운이 줄줄이 토해져 나왔다.
그 사이한 기운을 기감으로 느끼던 이든이 씩 웃으며 물었다.
"한번 진지하게 가 볼까?"
"얼마든지."
"대신 하나만 약속해라."
"뭐가?"
"둘이 싸우는 도중에 애꿎은 병사들은 건들지 않기."
"……."
데스 스타의 눈동자가 뒤편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레온하르트 성 앞의 병력들을 힐끗 향했다.
그녀가 물었다.
"쟤들?"
"그래."
"왜? 내가 혹여 밀리기라도 하면 너의 병사들을 건들기라도 할까 봐? 날 너무 얕보는 것 아닌가?"
"얕보는 게 아니라."
"……."
"경고하는 거다."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그때였다.
데스 스타가 말을 잇다 말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든의 신형이 섬광처럼 쏘아지더니 어느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흑색 검을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이에 맞받아치고자 검을 쥔 데스 스타의 손도 벼락같이 휘둘러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쳤는데 들리는 것은 금속음이 아닌 폭음이었다.
제대로 맞부딪친 힘의 격돌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푸하아아아아!
사방 천지에 태풍처럼 검풍(劒風)이 몰아닥쳤다.
레온하르트 성 앞에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며 서 있던 병력들이 버티려 악을 써 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찔끔찔끔 밀릴 만큼 대단한 검풍이었다.
그때였다.
맞부딪친 자세 그대로 데스 스타와 힘을 겨루던 이든이 씩 웃으며 물었다.
"어때? 이 정도면 너에게 경고할 자격이 충분한가?"
데스 스타가 역시 마주 웃었다.
"그래, 충분할 정도로 위협적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