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이든이 무진의 삶을 살던 전생은 강호 역사상 유례없던 난세였다.
백도의 맹주와 흑도의 흑왕. 그리고 마도의 천마 할 것 없이 각 세력의 우두머리들이 저마다의 이상을 가지고 패도를 추구하던 사내들이었기에 생긴 문제였다.
이로 인해 강호엔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었고,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으니 응당 애꿎은 백성들만이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이만하면 제아무리 강호와 관(官)이 불가침이라 해도 중재에 나서야 하건만, 어째선지 관은 강호 속에 세력 다툼을 묵과하였다.
그렇다 보니 당시 지독했던 이 난세를 끝낼 수 있는 것은 한 세력의 강호일통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리고 무진은 그 난세 속을 살아간 당대 천마였고,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강호일통을 이뤄낸 고금제일의 전무후무한 사내였다.
그가 강호일통을 이뤄 낼 수 있었던 이유.
타고난 통솔력도 한몫했을 테지만, 강호를 살아가는 이에게 있어 지도자로서의 역량이란 무엇보다 압도적인 무위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
무진은 당시 난세 속에 더 없이 어울리는 신공을 보유한 이였다.
천마의 무공은 선대 천마로부터 후보자인 소교주에게 일인전승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진의 스승이라 볼 수 있는 선대 천마는 진즉에 이 난세가 올 것을 멀리 내다보고 무진에게 전승할 신공을 그의 뜻대로 변형시켜 가르쳤다.
일대일의 결투보단, 다수를 상대하는 전쟁을 염두에 둔 신공으로서 말이다. 그것이 당시 무진을 강호일통을 이뤄 낸 고금제일의 강호인으로 만든 선대 천마의 기막힌 한 수라 볼 수 있었다.
하나, 이 같은 고금제일의 신공도 분명히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에겐 타점이 넓다 보니 제대로 된 피해를 주는 것이 힘들고, 극심한 내공 소모는 장기간의 결투에서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무진은 전생의 삶을 통틀어 그런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제 신공의 이치가 어떻든 간에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했었으니까.
하나, 지금의 삶은 달랐다.
그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 주고, 죽음의 직전까지 몰고 간 데스 스타란 존재가 있었으니까.
물론 이든 체내에 드래곤 하트가 극심했던 내공 소모를 결해 주고 있고, 그의 신체 내구성을 드래곤에 가깝게 해 주었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존에 두고 있던 성명절기들과는 그 이치를 달리하는, 새로운 절기를 창조해 낼 필요성을 느꼈고 해서 새로운 일격필살을 만들어 냈으니 극마신검(極魔神劍)이 바로 그것이었다.
극마신검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베겠다는 신념으로 오직 극강의 날카로움을 추구하는 참으로 단순한 절기였다. 하나, 단순할지언정 그 이치가 향하는 지향점은 아득히도 높았다. 종례엔 천지(天地)마저 베어내 신검으로서 천하를 넘어 하늘에 닿는 것이 목표였으니 말이다.
바라는 바가 이토록 높고 원대할진대, 데스 스타의 육체가 제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극마신검을 버텨 낼 재간이 있겠는가?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데스 스타가 목청을 찢을 듯이 괴성을 질러 댔다. 조금 전, 이든이 놈의 팔 한 짝을 가져갔을 때보다 더욱 커다란 괴성이었다.
데스 스타의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훈풍이 스쳐 지나간 자신의 왼쪽 다릴 향했다.
각선미를 자랑하던 그녀의 매끈한 다리 한쪽이 그녀의 오른팔처럼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사이좋게 하나씩 없어진 셈이었다. 이든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다릴 노려봤는데, 꾀꼬리같이 질러 대는 네놈의 목소릴 들어보니, 제대로 벤 모양이군. 마음에 드나? 레온하르트 님의 복수였는데 말이야."
"크읏…!"
데스 스타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며 일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는 팔과 다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데스 스타의 핏발 선 눈이 이든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푸른 안광을 쏟아 내고 있음에도 도드라져 보일 만큼 눈알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데스 스타가 괴성을 질렀던 그 음성 그대로 이든을 향해 씹어 뱉듯이 말했다.
"이 죽일 놈…! 오냐, 죽는 것이 그토록 소원이라면 내 너를 죽여 주마…!!!"
그때였다.
악에 받친 듯 고함을 질러 대던 데스 스타의 신형 전체가 일순 휘황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빛은 점차 크기를 부풀려 가며 한없이 커졌고 하나의 형태로 변해 갔다.
하늘 전체를 가릴 듯한 커다란 두 날개와 세상의 모든 것을 짓눌러 버릴 듯한 거대한 몸뚱이.
데스 스타가 본연의 모습인 드래곤으로서 세상에 재차 현신한 것이다.
하나, 본체로 현신했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있었다.
이든이 하나씩 없앴던 놈의 팔과 다리가 그것이었다.
데스 스타가 푸른 안광을 줄줄이 토해 내며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모든 화는 네놈이 자초한 것이다. 너를 포함해, 네놈이 아끼는 저 영지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활활 불태워 주마!!!"
그때였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데스 스타가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곧장 푸른색의 거대한 태양구를 토해 냈다.
드래곤의 필멸(必滅)의 권능. 브레스였다.
-전부 사라져라!!!
짙푸른 빛을 명멸하던 태양구 모양의 브레스는 숨 쉴 틈이라곤 없이 데스 스타의 고함과 함께 이든과 이든의 뒤에 있던 레온하르트 영지를 향해 쭈욱 늘어나듯 곧바로 쏘아졌다.
쿠오아아아아아아!!!!
삼 년 전, 이든은 데스 스타의 브레스를 막기 위해 천마심혼곡진으로 거대한 막을 만들어 저 자신과 데스 스타를 가두며 동귀어진을 택했었다.
하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이든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데스 스타의 브레스를 향해 오히려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곧장 휘둘렀다.
점차 코앞으로 다가오는 브레스를 넘어, 그대로 하늘까지 벨 듯한 기세로 극마신검을 펼친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극강의 날카로움은 드래곤의 필멸의 권능마저 넘어서는 것일까.
직선으로 쏘아진 브레스가 이든이 검을 휘두른 방향인 수직으로 주욱 그어지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좌우로 갈라진 브레스가 저 먼 데까지 날아가 애꿎은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그대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하나, 브레스는 사라졌으되, 이든이 펼쳤던 극마신검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브레스를 갈라냈던 이든의 성명절기가 그대로 데스 스타의 가슴팍을 베어 버린 것이다.
하나, 극마신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데스 스타의 가슴을 베어 버린 검기가 더 나아가 그대로 몸 전체를 베어 낸 듯 놈의 등 뒤를 뚫고 터져 나왔다. 뒤이어 피가 수직으로 분수처럼 튀며 데스 스타의 괴성도 곧장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데스 스타가 질러 대는 괴성에 깜짝 놀라기라도 한 걸까.
천지 사방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려 댔다. 그때였다. 쏟아진 다량의 피로 땅바닥을 흠뻑 적신 데스 스타의 거대한 신형이 수직으로 반듯하게 갈라지며 곧장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쿠우우우웅!
-끄, 끄르르륵….
쓰러진 데스 스타의 입에서 피 거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멸하며 짙푸른 빛을 토해 내던 눈동자 역시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와중에 놈의 시선이 저 자신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오는 이든을 향했다.
-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만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일전은 방심하여 이든에게 치명상을 당했다지만, 그럼에도 데스 스타, 본인과 이든 사이엔 격차란 것이 분명히 존재했었으니까.
하나.
지금은 어떤가.
그때의 격차가 사라진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압도적으로 패배하고야 말았다. 이것은 단지 이든의 몸 안에 드래곤 하트가 있다고 해서 설명될 부분이 아니었다.
걸어오던 이든은 어느새 빛을 잃어 가는 데스 스타의 눈알이라 할 수 있는 곳의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이든이 한쪽 무릎을 굽히곤 데스 스타의 물음에 답했다.
"…글쎄. 너를 뛰어넘기를 간절히 원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나의 깨달음이 너의 하찮은 신념보다 강했었을 수도 있고. 내 사람들을 지켜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때문일 수도 있지. 뭐,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데스 스타, 모든 드래곤을 말살하고, 세상을 발아래 두겠다던 네놈의 꿈은 한낱 망상으로 끝났다는 것 말이다."
-크큭…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이든이 굽혔던 다릴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흑색 검을 하늘 위로 높게 치켜세웠다.
재차 극마신검을 펼쳐 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데스 스타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유는.
검을 치켜세우던 이든의 팔이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이든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곤 난데없이 질문한 이유.
다름 아닌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에서 다량의 마나가 난리를 쳐 댔기 때문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말이다.
데스 스타는 피 거품을 문 채로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내 살아서 목적을 이뤄 낼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이뤄 낼 것이다….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다. 나의 드래곤 하트는 이제 곧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폭발의 불길은 아슬란 제국을 넘어 온 대륙을 향할 것이고, 죽음의 드래곤으로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죽음을 내리는 것이지. 크크큭….
"이런 미친…!"
욕을 내뱉은 이든의 검이 재차 하늘로 향했다.
그의 흑색 검에서 하늘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오러가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막을 이루며 사방을 감싸 안았다. 데스 스타의 자폭을 천마심혼곡진으로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하나, 죽음을 앞둔 데스 스타의 얼굴에선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으론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나의 불길로….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물들 것이다아…….
그렇게 데스 스타의 숨이 점차 꺼져 가는 그 순간, 놈의 드래곤 하트가 찰나에 푸른빛을 한가득 토해 내더니 사방을 둘러싼 천마심혼곡진 내부를 어느새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든은 온몸이 그을린 채 악문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놈의 드래곤 하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 무지막지한 폭발을 막아 내기 위해서 말이다.
"크, 크윽…!"
하나, 역부족이었던 걸까.
이든, 그 자신의 드래곤 하트에 모든 마기를 총동원하여 버티고 있었음에도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폭발력은 이를 넘어서듯 내부에서 팽창하며 천마심혹곡진에 금을 내고 있었다.
금은 금세 전체로 번져 갔고, 천마심혹곡진에 금이 간 틈으로 푸른빛이 조금씩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꽈앙! 쾅! 꽝!
그럼에도 이든은 악착같이 버텼다. 그의 내부는 이미 진즉에 진탕된 듯 천둥 벼락이 치고 있었다.
그의 드래곤 하트 내 마기가 데스 스타의 자폭을 막아 내겠다고 온 힘을 쏟은 끝에 처음으로 바닥을 보인 것이다.
간만에 내상에 이든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든은 이 짓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를 버텨 내지 못한다면 데스 스타의 말대로 대륙 전체가 놈의 불길에 온통 휩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일 또한 있는 법이다.
지금의 상황이 그러했다.
악을 쓰며 버티고 버티던 천마심혼곡진이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일순 터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크기를 부풀려가던 데스 스타의 화염 역시 일순 대륙 전체를 향해 사방에 번지기 시작했다.
"안 돼!!!!!"
고함을 내지른 이든이 곧장 신형을 날렸다.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를 향해서….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저 자신의 몸뚱이를 희생해 태워서라도 온몸으로 막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든의 신형이 점차 빛에 삼켜졌다. 어느새 그의 모습도, 고함을 내지르던 그의 목소리마저 폭음에 가려져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세상의 끝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던 이든의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던 그 순간.
이든은 그를 만났다.
***
"…왔는가."
이든 아니, 무진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줬던 기묘했던 이.
바로 신(神)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