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7화. (247/250)

247화.

이곳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사방이 빛인 듯 새하얀 공간.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마치 무(無)를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새까만 무저갱의 ‘무’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 선 이든은 연신 눈을 끔뻑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난데없이 두 눈이 멀쩡히 보여서 그런 것도 있었고,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싶었던 탓도 있었다.

그렇게 이든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주위를 살피던 그때였다.

"거기 계속 서 있을 참인가?"

재차 들려온 낯익은 음성.

이든의 시선이 조금 전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당신은."

"어찌,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

모를 리가 없다. 이든이 그를 알아보겠다는 듯 말을 건넸다.

"…신(神). 아니십니까? 일전 제게 새 삶의 기회를 주셨던…."

이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기묘했던 이. 신은 이든의 말을 듣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훗. 신은 무슨…. 그냥 세상사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지나가는 나객이라 해 둠세."

그때였다.

와닿지는 않지만, 저 자신을 나객이라 낮춘 신이 손짓하며 제 앞을 가리켰다.

"이리 와 앉게나."

"……."

불가항력이란 말이 이런 걸까.

이든은 저도 모르게 신의 앞까지 다가가서는 그가 가리킨 앞에 자리해 앉았다. 이든이 털썩 자리해 앉자 신이 물었다.

"술과 차, 어떤 것을 더 좋아하나?"

"…술입니다."

"하기야, 술꾼에게 괜한 물음이었나?"

신이 껄껄 웃고는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도록 튕기자 어느새 그와 이든 사이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이든은 그 기묘하고, 신묘한 현상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신이 술병을 들곤 바라보자 이든이 저도 모르게 제 앞에 놓인 잔을 쥐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또르르.

맑은 술이 청아한 소릴 내며 잔에 따라지자 일순 달콤한 과일 향기가 사방 가득 퍼졌는데, 그 향이 마치 복숭아를 연상시켰다.

이든의 잔에 술이 가득 따라지고, 신까지 자작하고 나니 향은 두 배로 강해졌다.

제 것에까지 마저 술을 따른 신이 잔을 슬쩍 앞으로 내밀곤 웃으며 말했다.

"마시세."

"…아, 예."

이든이 마주 내밀어 잔을 부딪치자 쨍 하는 유리의 맑은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이 곧장 잔에 있던 술을 넘기기 시작했다.

꿀꺽.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향만큼이나 그 맛 역시 일품이었다.

세상에 이런 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든이 금세 다 마시고 남은 빈 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술입니까?"

이든 딴에는 무엇으로 만든 술이냐 물은 것이었다.

하나, 신에게 들려온 것은 엉뚱한 대답이었다.

"축하주일세."

난데없이 축하주란 말에 이든이 고갤 갸웃거리며 물었다.

"축하주요?"

"응."

"무엇을 축하하기 위한 술입니까?"

"……."

신이 묘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입 모양을 봐선 별로 크게 웃는 것도 아닌 것 같건만, 웃음소리는 어찌나 큰지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듣기 싫은 소리는 또 아니었다.

이든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얼떨떨해하는 사이, 웃음을 뚝 그친 신이 재차 말을 이었다.

"무엇이긴. 당연히 자네의 등선(登仙)을 말하는 것이지."

"…예? 등선이라뇨? 제가 말입니까?"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이든이 곧장 되물었다.

신이 씩 웃어 보였다.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군."

"…아니, 모를 수밖에요. 저는 분명히…."

"그래, 자네는 분명히 뛰어들었지. 그 화염 속에 말이야."

신이 말하는 화염.

필시 데스 스타가 자폭과 함께 터트린 드래곤 하트의 거대한 화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이어 벌어진 기묘한 일에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새삼 당시의 일이 떠오른 걸까. 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거긴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도리어 묻는 신의 모습에 이든의 속이 금세 까맣게 타들어 갔다.

"설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든의 목소리에 신은 고갤 가로저었다.

"거기는 그만 잊게."

듣던 이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잊으라니요?"

"……."

"시원하게 말 좀 해 주십시오. 대체 그곳이 어찌 됐길래 잊으라 하십니까?"

"……."

신이 입을 꾹 다물고는 재차 묘한 눈빛으로 이든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시피 바라본 그가 무겁던 입을 천천히 뗐다.

"자네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 아닌가. 그 화염을 막을 수 없다고 말이야."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든이 어떻게든 세상의 종말을 막겠답시고 드래곤 하트로 몸을 날리긴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발악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 역시 그 이후에 세상이 어찌 됐을지는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신이 화제를 돌리듯 재차 말했다.

"나 또한 안타깝긴 하네만, 그것이 그들의 운명인 게지.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주고 주어진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신이 말하는 바는 분명 이것이었다.

이든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그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 말이다….

하나.

이든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거칠게 고갤 저어 댔다.

"말도 안 됩니다. 그곳이 멸망하다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일세. 지나간 일에 마음 쓰지 말게. 어차피 후회만 남는 것을."

딱 잘라 말하는 신의 말에 이든이 표정을 굳힌 채로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응?"

"당신께서 창조한 곳이고, 당신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는 것이 안타깝지도 않으십니까?"

"안타깝다라…."

신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도리어 물었다.

"왜 안타까워해야 하지?"

"…예?"

"온 우주가 내 손바닥 안이고, 자네가 살던 세상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곳일세. 쉽게 말하면 그래, 먼지 같달까. 그런 먼지와도 같은 곳이 단지 사라지는 것뿐인데, 내가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 무슨!"

"이보게. 무진."

"……!"

이든 아니, 무진의 눈이 일순 부릅 뜨였다. 만물의 창조자이자 전지전능한 이에게서 일순 엄청난 위압감이 해일처럼 터져 나왔다.

"자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찌했을 것 같나? 구태여 고생하여 그들을 구원이라도 해 줄 터인가?"

"……."

"누가 떠들어 대는 것처럼 신이란 이가 그저 자비로운 존재인 줄로만 알았나? 난 그저 창조하고 지켜볼 뿐. 그들의 삶은 그들이 결정하는 것일세. 자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데스 스타도 결국엔 나의 피조물이고, 나의 자식인 셈이지. 많고 많은 자식들 싸움에 내가 어찌 간섭하겠나. 그저 바라만 볼 뿐이지. 아니 그런가?"

"……."

신의 말을 듣던 무진은 할 말을 잃었다.

하기야….

세상이 그저 신의 뜻대로만 움직인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세상도 없을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진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물었다.

"그럼."

"……?"

"저에겐 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겁니까?"

"일생의 기회를 간절히 바란 건 자네일세. 난 그저 변덕 좀 부렸을 뿐이고."

"…변덕이요?"

"왜? 신이란 양반이 변덕을 부리는 것이 그리도 이상한가?"

"……."

신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어라 대답할 수 없게 만드는 이였다. 그것이 도무지 반발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위엄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 자체가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것에 도가 튼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일순 말문이 막혔던 무진의 머릿속에 옛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감겨 있는 눈으로 내내 어둠 속을 살아왔건만, 신기하게도 마치 직접 봤던 것처럼 추억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가족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생생히 그려졌다.

그다음으론 그려진 것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발리스타와 릴리, 그리고 제이콥부터 해서 함께 싸워 준 병사들과 유니콘 무관 학교의 아이들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론 동료들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짧았던 생이라 할 수 있지만, 살아온 내내 스쳐 지나간 인연이 이토록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떠오른 얼굴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던 무진이 재차 입을 뗀 것은 한참 후였다.

"…그 변덕. 한 번 더 부려 주십시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변덕을 한 번 더 부려 달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제게 그들을 살릴 기회를 달라 그 말입니다."

"…살릴 기회를 달라?"

"예.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변덕을 부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변덕…. 변덕이라…."

그때였다.

무진이 대뜸 신을 향해 조아리듯 오체투지를 하였다. 그런 무진을 신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물었다.

"자네 말대로 내가 변덕을 부렸다고 함세. 그럼, 자네는 어떤 변덕을 부릴 텐가?"

무진은 진즉에 생각해 뒀던 것이 있는 듯 거침없이 답했다.

"…등선을 포기하겠습니다."

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곧장 되물었다.

"음? 등선을 포기하겠다? 이해가 안 되는군. 자네에게 있어 등선은 그토록 바라던 꿈 아니었나? 그것을 쉬이 포기할 만큼 그 세상이 그토록 소중하던가?"

"소중합니다. 제가 바라던 등선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등지고 훌쩍 떠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어차피 전 한낱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생을 끝내는 게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후회 없는 인생인 것을요."

"……."

무진의 대답을 듣던 신은 말이 없었다. 그저 한참을 그렇게 한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신이 일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 의미 모를 웃음에 무진의 고개가 살짝 들리더니, 그 시선이 신을 향했다.

신이 말했다.

"정답일세!"

"…예?"

"자네가 정답을 말했다 그 말이야. 기억나나?"

"……."

"자네를 처음 만나 기회를 줬던 날. 내가 말했지. 자네의 삶은 멋진 인생(人生)이었다고 말이야. 하나, 자넨 내게 말했지. 한낱 인생이었다고, 그래서 후회가 남는다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스스로를 보게. 자네는 말했네.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인생의 소중함을 안 것이지.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멋진지 말이야. 자, 그럼 다시 묻겠네. 지금도 한낱 인생이었던가?"

"……."

무진은 고갤 저었다.

"아뇨. 우라지게 멋진 인생이었습니다. 지금의 삶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 그거야. 그러니 자네는 한낱 인간이 아닐세. 자네를 포함해 자네와 연관된 인연 모두가 참으로 멋진 삶을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지. 이제 알겠는가? 등선이란 결국엔 허울이야. 세상에 존재했던 선인이라 불린 모든 이들도 결국엔 인생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았네. 그들 역시 깨달은 것이지. 도(道)의 끝이 말하는 바가 결국엔 사람(人) 그 자체임을. 자넨 그것을 깨우친 게야. 옛 선인들처럼 말이세. 간만이로군. 이 같은 선택을 한 이는 말이야. 근래에는 없었거든. 모두 자네와 반대되는 선택을 했었지. 그리고 다들 후회했지."

"……."

어떤 이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고, 어떤 이들이 후회를 했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신의 말대로라면 세상의 모든 도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결국엔 인간이란 뜻이 된다.

세상에 이치를 알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이미 그 자신에게 답이 있었다는 셈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때였다.

밀려오는 깨달음에 무진이 넋을 놓던 그때.

신이 손짓하여 인간을 일으켰다.

그러곤 무진의 뒤를 향해 턱짓하며 가리켰다.

"가게나."

"…그 말은?"

"가서 바로잡아 보게. 자네가 말한 그 멋진 인생들. 가서 살려야 하지 않겠나?"

"……!"

무진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서둘러 신을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소중한 깨달음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게 어찌 내가 자네에게 준 깨달음인가. 자네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어서 가게. 그리고 남은 생을 마저 살다 오시게. 깨달은 의미를 잊지 않은 채로 말일세."

"예,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음."

이든이 곧장 발길을 돌려 제 뒤에 펼쳐진 문으로 걷던 그때였다.

그의 걸음이 돌연 멈추더니,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말입니다."

"응?"

"…제가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 깨달음과 연관이 있습니까?"

"글쎄. 있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이겠지. 하나, 내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삶이란 것이 시작은 불공평해도 결국엔 그 끝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거지. 왜냐하면."

"결국엔 인생이니까요."

신이 씩 웃어 보였다.

"맞아. 결국엔 인생인 셈이지."

"그렇군요. 그럼, 정말 가 보겠습니다."

이든이 신을 향해 마주 미소 지어 보이곤 재차 걸음 옮겼다.

화염이 치솟던 그곳으로.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이들의 인생이 있던 그곳으로 말이다.

신이 재차 속세로 떠나는 이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게. 그리고…. 행복한 인생을 누리다 오시게."

"암요."

점점이 멀어져가는 이든의 모습처럼 그의 목소리도 메아리치며 점점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떠나는 이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던 신이 입을 떼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은 선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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