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그가 살던 세상에 돌아왔다 해야 할까. 아니면 내려왔다 해야 할까.
어떤 표현이든 틀린 것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든이 신과 독대하던 조금 전 장소에서.
대륙의 파멸을 막기 위해 제 몸을 희생하겠단 각오로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에 몸을 내던졌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돌아온 이든은 일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든이란 삶을 살아가는 내내 깜깜한 어둠만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이 신을 만났던 그 장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말짱해진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라본 세상은 모든 것이 멈추어 있었다.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에서 쏟아져 나오던 푸른빛의 화염도, 폭음도, 바람도, 휘날리던 먼지도, 저 자신을 제외한 세상의 전부가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착용하던 미스릴 갑옷은 폭발에 휘말려 진즉에 넝마가 되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던 상황. 그렇다면 그의 피부 역시 새까맣게 그을렸어야 하는 것이 맞건만….
어째선지 화상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든이 말짱해진 두 눈만큼이나 제 몸의 변화 중에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체내에 드래곤 하트가 사라진 것처럼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드래곤 하트가 사라진 자리엔 단전도, 그 무엇도 아닌 묘한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춘 주변과 탈바꿈한 자신을 새롭게 감상하던 이든의 시선이 다시 빛에 둘러싸인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로 향했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상을 파멸로 내몰려 하는, 발악과도 같은 데스 스타의 마지막 화염을 왠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별안간 들어서였다.
스윽.
멈춘 빛 속에서 팔을 뻗은 이든의 손이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에 닿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데스 스타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모두 끝났다. 너의 발악도, 너의 야망도. 세상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리라."
그 순간.
이든의 두 눈과 뻗었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마기(魔氣)가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한 기(氣)의 형태에 가까웠다. ‘마나’ 그 자체로서 말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의 단전에서 끌어오는 기운도 아니었다.
그저 이든이란 사람의 의지에 답하듯 마나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터져 나온 빛은 천지(天地)를 채웠다. 그리고 사방으로 번졌던 데스 스타의 화염을 잠재웠다.
그 화염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찰나의 찰나라고 표현해도 부족한 짧은 순간에 세상을 휩쓸던 새하얀 빛은 사방에 퍼진 민들레처럼 점점이 사라지며 세상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시간이 멈춘 듯했던 세상이 자연의 이치대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을 토해 내던 이든의 눈도 차츰 본래의 눈동자로 돌아왔다. 제 아비인 브라운을 쏙 빼닮은 푸른 눈동자가 별처럼 거기에 박혀있었다. 그 별은 여전히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이 잃은 드래곤 하트가 생명이 꺼져 가고 있음을 암시하듯 차츰 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드래곤 하트에서 데스 스타의 힘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 힘은…. 대체 뭐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드래곤 하트를 기폭제 삼아 터트린 자폭이었으니, 응당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됐었어야 하는 것이 옳았으니까 말이다.
하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힘에 조금 전까지만 대륙 전체를 맹렬히 휩쓸던 저 자신의 화염이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았는가.
-…….
데스 스타의 사념이 빛을 잃어 가는 드래곤 하트처럼 점차 꺼져 가듯 사라질 무렵. 이든이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란 존재가 너보다 강했을 뿐."
-…마, 말도 안 되는….
이든의 답을 듣던 데스 스타의 한 줌 남은 사념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음성만을 남긴 채 비로소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세상의 평화는 거짓말과 같이 기적처럼 찾아왔다.
이제는 완전히 돌이 되어 버린 데스 스타의 드래곤 하트.
이든은 한 손에 들고 있던 그것을 아무 곳에 내던졌다.
그 순간, 그것은 더는 드래곤 하트가 아니게 되었다. 그저 하나의 돌로서 자연 일부로 스며든 것이다.
이제는 그저 수많은 돌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그것에서 이든의 시선이 작별을 고하듯 떨어졌다. 그리곤 곧장 레온하르트 성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
그에게 있어 소중하며 수많은 인생이 있을 그곳으로 말이다.
***
발리스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왜 이리 조용하지?"
"그러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리도 아니었는데?"
릴리 역시 같은 반응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단 그 둘뿐일까.
이든과 데스 스타의 격돌이 일으킨 엄청난 여파에 성안으로 피신했던 모두가 영문 모를 표정들로 눈만 꿈뻑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오던 천둥 번개와 같던 굉음과 땅을 뒤집어엎을 것만 같던 돌풍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마치 애초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말도 안 되는 고요함에 주변이 다른 의미로 어수선해질 무렵이었다. 집 안에 숨어 있던 영지민들조차 이상함을 느끼곤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 사귄 친구인 촌장을 지키겠다고 함께 있던 쿠오락 역시 고갤 갸웃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꾸…? 조용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옆에서 듣던 촌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다.
"그, 그러게 말이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적들의 괴성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함성조차 없는.
소란이라곤 일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이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기이한 분위기에 영지민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 안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것도 잊고 병사들이 우르르 있던 성벽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병사들이 있던 곳에 도착한 이는 당연히 촌장 스왈로였다. 스왈로가 병사 중 하나를 붙잡고는 물었다.
"이, 이보게. 지금 일이 어떻게 된 건가?"
하나, 소용없었다.
병사들조차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는데 명확한 답이 들려올 리가 만무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갑자기 사방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져서는…. 다들 그것 때문에 어리둥절해하던 중이고요."
"…허."
스왈로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달려 나온 영지민들 역시 병사들을 하나씩 붙잡고 물었지만, 명쾌한 답을 듣진 못했다.
그러다 너무 답답했던 모양일까.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그때였다.
성 밖을 주시하던 영지민 중 하나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어어어…!!! 여, 영주님! 영주님이 오십니다!"
"뭐라고!?"
그 요란에 모두가 곧장 반응하듯 야단법석을 떨어 대며 무너진 성벽 쪽으로 몰렸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까지. 종족을 떠나 너나 할 것 없이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그 누군가의 말대로 영주인 이든으로 보이는 이가 이곳으로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 영주님이다! 진짜 영주님이야!"
"영주님이 이긴 거야! 영주님이 데스 스타를 쓰러뜨리신 거라고!!!"
영지민들과 병사들이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어 대는 사이, 발리스타와 릴리까지 성문 밖으로 이든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런데 왜일까.
이든을 주시하던 발리스타와 릴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발리스타가 이든을 가리키며 어버버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어… 어어어어?"
대체 무엇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걸까.
하나 발리스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릴리 역시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막고 있었다.
그사이, 어느새 성문 앞까지 온 이든이 발리스타와 릴리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들 고생 많았다."
"…어어… 이, 이든 형."
"음?"
"형…. 그러니까 그게…. 형 눈, 눈이…."
이든이 어색한 듯 볼을 긁적였다.
"보다시피 이렇게 됐다."
"……."
"……."
넋을 놓은 채 별처럼 박힌 이든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발리스타와 릴리가 별안간 이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형!!!"
"스승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요! 눈을 뜨다니!"
"스승님, 이거 꿈 아니죠? 정말…. 눈 뜨신 거 맞는 거죠? 그렇죠!?"
곰 같은 사내와 어여쁜 제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달려와 와락 껴안으니, 그들 사이에 빳빳이 어색한 듯 서 있던 이든도 결국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든이 그들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이렇게 직접 너희들을 보게 되니. 나 역시 정말 좋구나."
그때였다. 감격의 순간 중에 그들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던 이든이 대뜸 걸음을 옮겼다.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던 발리스타가 물었다.
"어? 형 어디 가는 거요?"
"어디긴. 당연한 걸 뭘 물어?"
"응?"
"제일 뵙고 싶던 분들을 보러 가야지."
"아…!"
알겠다는 듯 발리스타가 눈물을 스윽 닦고는 고갤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이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할 분들한테 어서 빨리 가 봐야지."
이든이 말하는 이.
다름 아닌 그의 부모인 브라운과 메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
브라운의 떨리는 손으로 이든의 얼굴을 연신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메리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느새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브라운이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저, 정말…. 우리 아들 맞니?"
이든이 미소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예, 아버지. 저 맞습니다. 아버지 아들 이든이요."
"허…."
그렇게 당연한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제 아들을 바라보던 브라운의 흔들리던 눈동자에서도 곧장 메리와 같은 굵은 눈물이 쏟아지듯 흐르기 시작했다.
하나.
눈물은 쏟되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브라운이 입술을 꽉 깨물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겨우 참아 내며 이든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우리 아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동안…. 너무도 고생 많았어…!!!"
"……."
어떻게 눈을 뜬 것인지. 이유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 기적처럼 두 눈을 떴다는 그 사실만이 벅차게 기쁠 뿐이었다.
브라운의 등이 감격에 겨워 그 떨림을 멈추지 못하던 그때였다.
제 아비의 그런 모습에서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이든이 별안간 브라운을 꽉 끌어안았다.
"정말 너무도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
일순, 말로 다 못 할 감정이 폭포처럼 밀려왔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아들의 그 한마디에 말이다….
입을 틀어막던 메리도.
그리고 이든을 안으며 참고 참던 브라운마저도 끝내 커다란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이든이 그토록 바랐고.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가족을 두 눈에 담은 그날….
브라운과 메리의 눈에서 터져 나온 감격에 찬 눈물바다는 이든의 가슴을 가득 적시며 스며들었다.
겨울은 여전히 한창이건만, 가슴은 어느 때보다 따듯하게 덥혀 와 추위마저 잊게 만들었다.
이든은 불현듯 신이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은 멋지고 소중한 것이라고.
그러니….
한낱 인생이 아니라고.
맞는 말이었다.
깨달음과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더욱이 와닿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것이었구나…. 산다는 것이 말이야. 이래서 소중한 것이구나. 인생이란 것이….’
깨달음이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새삼 이를 다시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