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전쟁은 끝났다.
데스 스타는 사라졌고, 자연히 평화도 찾아왔다.
하나.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쁨은 잠시였다.
전쟁이 불러온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성실히 쌓아온 성벽이 무너진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장 큰 피해는 역시나 인명 피해였다.
생각보다 많은 청년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과 함께 싸워 준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오크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장렬히 싸우자 전사한 그 모든 이들을 훑던 이든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것은.
다름 아닌 주검으로 누워 있는 마르코였다.
이든이 천천히 고갤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런 일이 있었군."
마르코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발리스타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이든의 두 눈에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마르코와 함께 싸웠던 발리스타 역시 같은 눈빛을 하고는 물었다.
"어찌하겠소?"
마르코의 처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과거엔 귀족이었다곤 하나 불미스러운 일로 변방 땅으로 유배된 이였고, 그 이후엔 도적들의 수장으로 노릇까지 하며 제국의 정세를 어지럽혔던 이였기 때문이다.
하나, 이든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인지 곧바로 발리스타의 물음에 곧바로 입을 뗐다.
"병사들과 함께 장례를 치러 주자. 영웅으로서…."
그때였다. 찰나 말끝을 흐렸던 이든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칼스테인 공작님."
"어인 말이요. 응당 그래야지. 제아무리 몰락한 가문이고, 유배되었던 이라 한들…. 눈을 감은 그 순간만큼은 제국의 영웅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소. 이곳에서 눈을 감은 병사들과 함께 국장(國葬)으로 치르도록 말해 놓겠소."
"고맙습니다."
몰락한 가문에서 목숨을 대가로 영광을 되찾은 것이니 마르코의 마지막 꿈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칼스테인 공작이 고갤 저었다.
"제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 고마움은 목숨 바쳐 싸워 준 이들에게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음?"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칼스테인 공작의 시선이 이든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레온하르트 영지를 돕기 위해 달려와 주고, 함께 싸우다 눈을 감은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오크족 전사들의 주검이 뉘어진 곳이었다, 칼스테인 공작이 냉큼 고갤 주억거리곤 엘프의 왕 갤러하드와 오크 족의 쿠훌락, 그리고 드워프 족의 대장 장인 멀린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함께 자리하신 각 종족의 대표분들만 괜찮다면 저기 누워 있는 영웅들도 우리 병사들과 함께 국장을 치르고 싶습니다."
칼스테인의 제안이 의외였던 걸까. 듣던 각 종족의 대표들이 하나같이 상당히 놀란 표정들을 했다.
갤러하드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아스란 제국의 병사들 말고도…. 우리 전부 함께요?"
"물론입니다. 다른 종족, 그간 왕래라곤 전혀 없던 사이지만…. 그래도 오늘, 이 순간만큼은 함께 싸우고 함께 피 흘린 동료 아닙니까. 제가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것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
갤러하드와 멀린. 그리고 쿠훌락 조차도 일순 밀려오는 묘한 감정에 넋을 놓았다. 그사이, 칼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먼 과거엔…. 인간과 엘프. 드워프와 오크까지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활발한 교류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전해지는 말을 들은 것뿐이지만, 여기 자리하신 분들께선 인간인 저와는 달리 오랜 세월을 사셨을 테니, 당시 모습을 알고 계실 분도 계시리라 짐작됩니다. 저는…. 함께 힘을 합쳐 이 위기를 이겨 낸 것을 발판 삼아 그때의 영광을 다시 재현했으면 합니다. 서로 외면했던 지난 과거는 벗어 던지고,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위험할 땐 지켜 주며, 힘들 땐 나누어 도와주고, 기쁠 땐 함께 축하해 주며, 슬플 땐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됐으면 합니다. 여기 있는 모두 함께요."
그때였다.
쿠훌락이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나 쿠훌락. 그대의 제안 너무 고맙지만. 불안하다. 그것이 가능할지."
칼스테인이 고갤 주억거렸다.
"여러분의 그 걱정,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 드렸던 저의 제안은 분명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닐겁니다. 분명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하지만….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가 됐든 간에…. 우리는 서로 외면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
일순 모두가 긴 침묵에 들었다.
단지 국장을 치르는 것을 넘어, 종족 간의 화합이란 거대한 숙제 앞에 막연함이 밀려온 탓이었다.
하지만 자리한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기회가 없음을.
그리고.
지금과 같은 위기가 또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음을 말이다.
갤러하드와 멀린 그리고 쿠훌락이 찰나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일제히 고갤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해 봅시다."
"까짓거. 해 보는 거다. 도전 없으면. 희망도 없다!"
각 대표들이 쏟아 낸 한마디에 칼스테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그들과 함께 웃어 보였다.
그사이, 각 종족의 화합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든의 입가에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미소를 거두곤 재차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전사자들의 모습이 눈에 걸린다.
전쟁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
승리한 전쟁이든 패배한 전쟁이든 간에 늘 아픔은 뒤따르는 것이다.
그 아픔을 최소화하는 법은 오직 스스로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
서로 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손을 맞잡은 이들이 있다.
지금 당장은 큰 효과를 보긴 어려울 것이다.
지금 당장 절친한 사이가 됐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서로 맞잡은 손이 떼어지지 않는 한. 언제가 됐든 간에 진정한 친구가 될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승리라는 기쁨 뒤에 찾아온 피해로 인한 허탈함. 그리고 동료를 잃었다는 실감에 찾아온 커다란 슬픔까지….
하지만.
그 번민(煩悶) 뒤에 남는 것은 분명 희망이었다….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과 그 새로운 세상에서 시작될 새로운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희망 말이다.
***
예정대로 국장은 치러졌다.
인간과 엘프 그리고 오크와 드워프 할 것 없이 함께 싸우고 결국엔 전쟁터에서 눈을 감은 영웅들을 위한 국장이 말이다.
국장은 더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아스란 제국의 근위대들의 열병식과 함께 말이다.
적지 않은 수에 각 종족이 참석하여 추모하는 자리에 함께했지만, 참으로 다행인 것이 모인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마워했고, 함께 슬퍼해 줬다.
또 한 번 엿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생각보다 서로 거리낌 없이 화합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장이 끝나고 아슬란 제국의 황제는 모두가 모인 연단 위에 서서 연설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싸웠으며….
어떤 피해를 입었고.
앞으로 어찌 대비해야 하며….
훗날 이와 같은 위기를 어떻게 이겨 내야 하는지를 말이다.
황제의 연설에 반응은 다양했다.
눈물을 훔치는 이들과 감동하는 이들. 그리고 영웅의 일대기에 벅차하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든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국장에 이어 연설까지 쭉 지켜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와 달리 무거운 표정을 하던 발리스타가 넌지시 물었다.
"이든 형."
"응."
"이제 앞으로 어찌 지내실 생각이요? 역시 레온하르트 영지로 되돌아가는 것이오?"
이든이 미소 지으며 고갤 저었다.
"아니."
"응? 그럼, 안 돌아갈 생각이요?"
"그래."
"왜?"
"이제 내가 거기 있을 이유가 없거든."
"……."
"이제 내가 없어도 레온하르트 영지를 포함해서 모두가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까. 그리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야 하고. 일찍 시작해서 나쁠 것 없지."
"음."
발리스타가 딱히 반대하는 기색 없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이든이 발리스타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너는 앞으로 어찌 지낼 생각이야?"
"나야 뭐, 갈 곳도 없고. 그냥 거기 남아 있을 생각이오. 릴리도 형 따라 돌아갈 테고. 그래도 교관 하나쯤 남아 있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하기야 그렇겠구나. 혼자서 꽤 바빠지겠군."
"훗. 바쁘게 사는 것엔 이젠 익숙해져서…. 그보다 형은 이제 좀 쉬쇼.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았소?"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이제 뒤에도 좀 보고 살련다. 쉬엄쉬엄 말이야."
"고생 많았소."
"고생은 무슨."
"그럼, 이든 형은 역시 거기로 돌아가는 건가?"
이든이 고갤 끄덕였다.
"응. 역시 고향만 한 곳이 없지."
"거기 가서도 잘 지내쇼. 종종 연락도 좀 해 주시고."
"오냐. 너도 건강히 잘 지내라."
그사이, 황제의 연설이 끝나고.
각 종족의 수장들은 서로 함께 모여 여러 가지를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앞으로 어찌 합심할 것인지.
앞으로 어찌 교류할 것인지.
앞으로 어찌 함께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무렵.
국장을 치르는 자리에 함께 참석했던 레온하르트 영지의 식구들은 갑작스런 이든과의 작별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중 스왈로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한참을 넋 나간 듯 있던 스왈로가 일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영주님, 아무런 기별도 없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랍니까. 여기서 작별이라니요…!!!"
"떠나기에 지금이 가장 적기인 듯싶어서요."
"적기라니요. 계속 저희와 함께 해 주셔야 하지요. 영주님 없이 저희만으로 어찌 영지를 재건한단 말입니까…!"
이든이 미소 지으며 고갤 저었다.
"촌장님."
"…예, 영주님."
"전 잘 싸울 줄만 알던 놈이지. 사실 그리 유능한 놈이 아닙니다. 영지의 재건 대부분은 여기 계신 여러분들 스스로가 해낸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제가 한 것은 닦달해 댄 것이 전부지요. 영지를 관리하는 일도 실상은 촌장님께서 다 해 오셨고요. 게다가 영지를 지키는 일 역시 이젠 병사들 스스로 할 줄 아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이젠 스스로를 믿으세요. 제가 없어도 촌장님을 포함한 여러분들께선 앞으로 잘 이겨 내실 수 있을 겁니다."
"영주님…."
촌장을 포함한 이든의 말을 듣던 모두가 눈물을 적셨다.
함께한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사이 어느새 가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이든이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곱씹어 담듯 쭈욱 바라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동안 못난 영주의 말 따라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 여러분들과의 추억들. 전부 잊지 못할 겁니다."
***
이든과 그의 가족들은 오늘 하루 유니콘 본부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마침 칼스테인 영지로 향하는 의뢰가 있어 그곳까지 가는 길을 유니콘 길드의 호송 팀과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호송 팀은 물론 케인 대장의 일행들이었고.
깊게 내려앉은 밤에 모두 잠에 든 탓인지 사방이 고요함으로 가득한 시각.
잠이 오질 않아 난간에 기대어 찬바람을 쐬던 이든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섰다.
이든은 보지도 않고는 누군지 다 안다는 듯이 물었다.
"벌써 가시려고요?"
그의 물음에 레온하르트가 답했다.
"가야지. 더는 볼일도 없으니."
"이대로 인사도 없이요?"
"…말도 없이 사라졌던 나일세. 내가 무슨 염치로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
"그보다 고향인 칼스테인 영지로 돌아간다고."
"예, 그렇게 됐습니다."
"하긴 고향만 한 곳이 없지."
"레온하르트 님께선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난 수면기에 들 생각이네. 수백 년 후가 될지. 수천 년 후가 될지… 언제 눈을 다시 뜰지는 알 수 없는 아주 긴 수면기에 말이야."
"그럼, 저희 만남은 이게 마지막인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그때였다.
이든이 뒤돌아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그러곤 두 손을 가운데에 모아 더없이 정중히 포권을 올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레온하르트 님께 받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그렇게 고마우면 부디 잘 지내게. 그동안 고생한 만큼 더없이 행복하게 말이야."
"…암요."
"훗…."
이든과 레온하르트가 마주 보며 웃었다. 마지막 인사치고는 담백하기만 했지만,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간에 모든 고마움이 부족함 없이 담겨 있음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 보며 짓고 있는 그 미소 속에도 말이다….
***
다음 날.
이든과 그의 가족들은 유니콘에서 마련해 준 사두마차를 타고 케인 일행과 함께 칼스테인 영지로 떠났다.
간만에 이든과 함께하게 된 일정이라 그런지 길드원들 모두가 들뜬 얼굴들이었다.
그때였다. 함께 걷던 중 케인이 이든에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찌 지낼 생각인가?"
이든이 답했다.
"아, 그게 말이죠. 우선…."
.
.
.
"아휴…."
유니콘 길드의 칼스테인 지부장 이리아가 난데없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대뜸 앞에 놓인 사무용 책상에 철퍼덕 엎드렸다.
엎드린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한쪽에 두었던 면경을 향했다.
넋이라도 나간 듯 멍하니 면경을 바라보던 이리아가 별안간 씁쓸히 웃었다.
"초췌하네…."
사실 그녀의 안색이 초췌하지 않으면 이상하였다.
칼스테인 영지의 지부장이 된 이후로 줄곧 일에 매달리다시피 살아온 그녀였으니까.
물론 비서장이었을 때도 일에 매달려 왔지만, 근래 들어선 그것이 더더욱 심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마음이 허한 것이 일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넋 나간 표정으로 면경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이리아가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키곤 휘휘 고갤 저었다.
"…훗. 나도 참, 오늘따라 엄살은…."
이리아가 피식 웃고는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찰싹 쳐 대며 정신을 차리던 그때였다.
똑똑.
별안간 지부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끼익.
열린 문틈 사이로 사무관이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보였다.
"저 지부장님, 케인 대장의 일행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요?"
이리아가 고생한 호송 길드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사무관이 재차 말을 이었다.
"저, 그리고 손님도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이리아가 고갤 갸웃거렸다.
"오늘 일정 중에 손님이 오기로 했었나?"
"아뇨."
"그럼, 잠시 기다리시라고 전해 줄래요? 볼일만 보고 금방 돌아오겠다고요."
"저…."
"……?"
"손님이 용무가 급하시다고, 먼저 자기부터 봐줬으면 좋겠다 하시는데요…?"
"…예?"
이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런 막무가내가 다 있나 싶어서였다.
이리아가 재차 한숨을 푹 내쉬곤 고갤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빨리 손님부터 불러 주세요."
"아, 예. 잠시만…."
사무관이 재차 손님을 맞기 위해 나가고, 그사이에 이리아가 서류에 시선을 붙이던 그때였다.
잠시 뒤.
지부장실의 문이 열리고.
"어서 오세요. 지부장 이리아입니다.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그녀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향하던 그 순간이었다.
이리아가 일순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이에요. 이리아 씨."
낯익은 얼굴.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제가 근래 너무 바빠서 들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왔고.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던 한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하나.
이리아가 말을 잇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줄곧 그 남자의 두 눈동자에서 떼어질 줄을 몰랐다.
늘 감겨 있던 눈에 별안간 별처럼 박힌 푸른 눈동자.
이리아가 대뜸 눈물을 터트리곤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든 씨? 정말… 이든 씨예요?"
이리아의 물음에 이든이 환하게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리아 씨,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