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국장에 참석하고자 수도에 들른 칼라슈에게 오늘은 정말이지 간만의 외출이었다.
국장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수도의 일정도 모두 끝났을 무렵. 이제 다시 서둘러 그의 영지로 돌아갈 일만 남았건만….
칼라슈는 평소답지 않게 이왕 여기까지 온 것, 국장만 참석하고 다시 돌아가기는 퍽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정처 없이 걷던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기사 아카데미였다.
칼라슈는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아카데미에 들어서곤 주변을 둘러봤다.
차갑기 짝이 없던 겨울 같은 그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찰나 봄바람이 분 걸까.
칼라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보일 듯 말듯 걸쳐졌다.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군."
지금의 칼라슈는 그의 아비인 칼스테인 공작을 대신하여 칼스테인 영지의 젊은 영주로서 자리매김한 지 오래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칼라슈 백작이라든지, 혹은 칼라슈 영주님이 아닌, 천재라 불리던 그 시절의 칼라슈 말이다.
찰나 떠오른 옛 생각에 잠겼던 칼라슈가 이번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하나.
그것은 즐거움에서 나는 웃음소리라기보단 허탈한 감정에서 나오는 웃음에 더욱 가까웠다.
칼라슈가 웃음을 뚝 그치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천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봄이 온 듯했던 그의 미소에 재차 드리운 것은 깊은 수심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의 마음을 어지러이 하고 있길래 그것이 눈으로마저 착잡한 빛으로 드러나는 걸까.
그림자 진 얼굴로 재차 정처 없이 걷던 칼라슈의 걸음이 이번엔 연무장에 멈추어 섰다.
연무장 바닥에 웬 목검 하나가 외롭게도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학생 중 하나가 깜빡 잊고 흘리고 간 모양이었다.
칼라슈가 다가가 그것을 줍고는 제 손에 쥐어 보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목검의 감촉에 재차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였다.
"내게도 이걸 쥐고 훈련하던 시절이 있었지…."
웃는 듯, 슬픈 듯.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리던 칼라슈가 재차 말을 이었다.
"…천재라 불렸고. 천재인 줄로만 알았던 그 시절에 말이야."
칼라슈는 최근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가 아카데미 졸업 후. 칼스테인 영지의 영주로 부임한 이후로부터 줄곧 해 온 고민이었으니, 거진 사 년 가까이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라 할 수 있었다.
긴 시간 동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 고민의 정체. 다름 아닌, ‘실력의 정체’ 때문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시절에 칼라슈는 소드 마스터 직전의 경지라 할 수 있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사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벽을 넘지 못하며 익스퍼트 경지에 머물고 있었다.
단 한 걸음.
한 걸음만 넘으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코앞이건만….
목전에 둔 그 경지는 어째서인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정체가 길어지자 또 하나의 문제가 찾아왔다.
‘재미가 없어….’
일전엔 밥 먹듯이 당연히 하던 수련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치.
모든 흥미를 잃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
칼라슈가 목검을 쥔 제 손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맞수라 여겼던 이든은 진즉에 그 경지를 이루고 아버지마저 앞서갔고, 내 뒤를 쫓던 발리스타 역시 마스터에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 나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고민이 길어지면 의심을 낳길 마련이다.
제 재능에 대한 의심 말이다.
그렇게 재능도.
남들의 기대도.
심지어 흥미마저도 잃은 채.
칼라슈는 걷던 길을 걷고, 있던 곳만 머물며 방황을 일삼고 있었다. 그의 착잡한 눈이 그렇게 한참을 목검에 떼어지지 못하며 머물던 그때였다.
"저기…."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칼라슈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신입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학생이 저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칼라슈가 쥐고 있던 목검을 학생에게 건네며 물었다.
"네 것이구나. 이거."
"아, 예…! 맞아요. 연무장 뒷정리한다는 게 정작 제 것을 까먹고 놓고 와서…."
"그랬구나."
"…형은 누구세요?"
"나…? 난 여기 졸업생이야. 잠깐 볼일이 있어 수도에 들르던 참에 한번 구경차 들러 봤단다."
"아…."
그때였다.
칼라슈의 시선이 학생의 손바닥을 향했다.
물집과 피가 덕지덕지 있는 것이 수련을 꽤나 열심히 하는 아이 같아 보였다.
칼라슈가 물었다.
"수업 시간은 이미 진즉에 다 끝났을 테고. 개인 훈련하러 온 거니?"
"네, 맞아요. 학교에서 알려 주는 수업도 나름 흥미롭지만, 역시 스승님이 알려 주신 훈련법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요."
‘스승이 따로 있던 아이로군.’ 칼라슈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더는 시간을 뺏어선 안 되겠구나. 볼일 보렴. 나도 좀 더 구경하다 갈 터이니."
"네…!"
학생이 칼라슈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곧장 연무장 하나를 잡아 훈련하기 시작했다.
칼라슈는 아카데미를 둘러보는 내내 중간중간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 아이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때였다.
학생의 움직임을 살피던 칼라슈가 고갤 갸웃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카데미를 구경하던 것도 잊고 그 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칼라슈가 살짝 넋 나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검술은 혹시…."
칼라슈가 바라보던 학생의 검술이 마치 누군가와 겹치듯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칼라슈가 저도 모르게 다가가 학생의 움직임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시선을 느낀 학생이 덜컥 움직임을 멈추고는 물었다.
"저, 저기…. 제,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요?"
"응?"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아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너의 스승이란 사람. 이름이 혹… ‘이든’이니?"
학생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희 스승님을 아세요!?"
***
제이콥이 고갤 주억거렸다.
"그럼, 형이 아니, 영주님께서 그 유명한 칼라슈 백작님이셔요?"
"하하…. 뭐, 유명까진 아니고."
어색하게 웃던 칼라슈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제이콥을 쳐다보았다.
‘이든, 그 녀석의 제자라니….’
제이콥을 바라보는 칼라슈의 눈빛엔 흥미로운 기색 가득했다.
다른 이도 아닌 이든의 제자다.
필시 제이콥의 재능이 남다를 것이 예상되었다.
그때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칼라슈가 제안했다.
"대련 한번 해 볼래? 한번 봐줄 테니."
"정말이요?"
"그래."
다른 이도 아닌 칼라슈가 봐준다는 말에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연무장 중앙에 섰다.
칼라슈도 검집째로 제 검을 쥐곤 제이콥 앞에 마주 섰다.
"난 목검이 따로 없다 보니 이렇게."
"네…!"
제이콥이 바짝 기합이 든 채로 대답했다.
칼라슈가 그 모습에 살짝 웃다가 간만에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제이콥을 향해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 순간.
제이콥이 칼라슈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제이콥의 목검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칼라슈를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사이, 칼라슈의 눈이 놀란 듯 부릅 뜨였다.
제이콥에게서 이든의 모습이 재차 그림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련이라 했지만, 칼라슈가 내내 제이콥의 공격을 받기만 하며,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때였다. 제이콥의 움직임이 초식의 끝자락을 향하다가 일순 절기를 펼치려는 찰나, 막기만 하던 칼라슈가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며 칼라슈의 검집을 막고는 몸을 굴렀다.
칼라슈 역시 저도 모르게 팔이 나갔던 터라 상당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칼라슈가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괘, 괜찮으냐?"
제이콥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헤헤…."
칼라슈가 고갤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련은 익숙지 않은 모양이구나."
"사실 대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아직 낯설다 해야하나…."
"그래?"
칼라슈가 의외란 표정을 했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이든의 제자이건만, 대련이 낯설단 말이 예상 밖이었던 탓이다.
칼라슈가 다시 들어오라는 듯 재차 검집을 까닥거리며 물었다.
"검을 익힌 지는 얼마나 됐지?"
제이콥이 신형을 날리며 대답했다.
"넉 달이요."
"뭐…?"
칼라슈가 놀라 곧장 되묻던 그때였다.
그의 눈이 저도 모르게 제이콥의 움직임을 좇다가 일순 넋을 놓았다.
지금 보이는 제이콥의 움직임이.
마치.
조금 전 자신이 본능적으로 펼쳤던 검술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저건 분명…. 조금 전 내 기술….’
칼라슈가 재차 검집을 휘둘렀다.
맞받아친 제이콥이 재차 바닥을 굴렀다.
"아고고…."
엉덩방아를 찧은 제이콥이 곡소릴 내는 사이, 칼라슈의 눈은 새삼 제이콥을 달리 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괜히 보이는 것이 아니었어. 천재였구나…."
"…네?"
칼라슈가 혼자 중얼거자, 제이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사이, 칼라슈는 제이콥이 쥔 목검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피와 땀이 배인 목검의 손잡이가 보였다.
"남다른 재능을 가졌음에도 안주하지 않는다라…. 그렇군. 어쩌면 난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라.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백작님?"
제이콥이 저 혼자 중얼거리는 칼라슈를 빤히 바라보다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불렀다.
칼라슈가 일순 고갤 홱 돌려 제이콥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구나."
"…네?"
"…아니다. 아무것도."
칼라슈가 검집째 뽑았던 검을 재차 허리에 꽂고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곧장 걸음을 떼려던 그때였다.
제이콥이 입을 떼더니 칼라슈를 불렀다.
"백작님!"
칼라슈가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덜컥 멈추고는 제이콥을 향해 고갤 돌린 그때였다. 제이콥이 말했다.
"……?"
"저희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이 끝났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어요. 백작님께서 영주로 계시는 칼스테인 영지에 말이에요."
"뭐라고…?"
칼라슈의 눈동자가 찰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
집 앞 공터.
어린 시절부터 줄곧 훈련에 매달려 온 이곳….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든이 눈을 뜨곤 별안간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군."
이든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칼라슈가 서 있었다.
칼라슈가 이든의 두 눈을 보곤 놀란 표정을 했지만, 구태여 그것에 관해선 묻지 않았다.
칼라슈가 입을 뗐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
"……."
칼라슈가 바라보는 이든의 표정은 왠지 묘했다.
마치…. 무언가 크게 깨달은 득도한 이 같달까?
칼라슈가 물었다.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나?"
"대충은?"
"…도와주겠나?"
"답은 이미 알아낸 듯 보이는데."
"그렇기야 하지."
"그럼, 답 대신 더욱 좋은 것을 선물해 주지."
"…더 좋은 것?"
"벽을 뛰어넘을 자극."
"……."
"뭐 해?"
"아."
칼라슈가 가져온 목검 두 개 중 하나를 이든에게 던졌다.
이든의 손이 번개와 같이 그것을 낚아챘다.
목검을 쥔 이든이 씩 웃었다.
"옛날 생각나는군…. 그때도 이랬지. 넌 나에게 목검을 줬고. 난 너에게 가르침을 줬었지. 그때 맞고 울음을 터트렸던 소년이 재차 날 찾아왔군. 제법 훌륭히 자라서 말이야."
"…훗. 그랬었나."
그때였다.
이든이 쥔 목검을 칼라슈를 향해 치켜세웠다.
"칼라슈, 망설이지 마라."
"……."
"너의 그 생각이 곧 답이니."
"……."
"어서 따라와라. 난 여기에 있다."
"……."
서로 마주 보는 이든과 칼라슈의 눈빛이 일순 착 가라앉았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런 그들에게 더는 대화 따윈 필요 없었다.
서로를 향해 신형을 쏠 뿐이었고.
오직 묵묵히 휘둘러지는 목검만이 필요한 대화의 전부였다.
이것은 무(武)를 좇던 이들의 이야기다.
하나.
비단 무(武)를 좇고, 검(劍)의 길을 걷는 이들만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를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부족함 없이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모든 인생(人生)이 특별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삶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든도.
칼라슈도.
그리고.
"당신들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