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제 2화 엘프의 사정 그리고 죽음의 땅에서 (3/127)



〈 3화 〉제 2화 엘프의 사정 그리고 죽음의 땅에서

“하아... 하아....”

시야를 채우는 검은 몸체가 보였다.
산처럼 거대했기에 머리를 보려면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봐야 할 정도였다.
개와 곰의 머리를 섞은 듯한 짐승의 모습.
그것의  뒤로 뻗어 나온 8개의 날개가 검은 혈관에 뒤덮여 무엇보다 끔찍한 악몽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괴물의 날개에서 그녀의 영혼을 더럽히는 듯한 추악함이 전해져왔다.

‘또  꿈인가...?’

그녀가 가끔 꾸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8개의 날개를 가진 검은 괴물과 항상 싸웠고,
거친 전투 끝에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포기하지마! 플.....]

[할 수 있어...!]

꿈속에서 들리는 응원들.
그것은 눈앞의 괴물과 싸우는 데에 그녀의 힘이 되어주었다.
발밑으로 성스러운 녹색이 퍼져나가 안전지대를 만들고,
그녀의 활은 검은 악몽을 정화해갔다.

“난 반드시... 당신을...!!!!”

[■■■■■■■■■■■■■■□□□□!!!!!!]

괴기스러운 괴물의 포효와 뒤섞여 다음 말은 들리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꿈은 여기서 끝나겠지.

“으으... 또야.”

세레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무언가 생각날 듯싶은데.
기억나지 않는 답답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뒤숭숭한 기분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그녀가 경계를 서고 있던 오래된 나무의 가지 위였다.

“요즘 언데드들과 싸우지 않아서 그런가?
시답지 않는 악몽이야. 으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검은 괴물은 뭐지?
어째서 난  괴물과 싸우는 걸까?”

언제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
자신은 한 번도 그 괴물을 본 적이 없다.
솔직히 그런 괴물이 현실에 있다면 군대로 맞서야겠지...
산만한 괴물을 상대로 혼자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미워하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아.”

세레나가 꿈에서 괴물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나 증오가 아니었다.
그녀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턱을 괴었다.

“나 혼자 고민해도 의미 없으려나?”

세레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했다.
주변에 언데드도  보이는 만큼.
그녀가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고...

꼬르르르륵!

배에서 배고프다고 항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고파...
요즘 풀때기만 먹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인간들이 빨리 좀 오면 좋을 텐데.”

주변이 언데드로 오염된 대지이다 보니,
그녀가살아가는 실버 게이트는 식량이 궁한 편이었다.
 때문에 인간들과 거래를 하면서 식량을 수입하지만.
 기간은 1년에 한 번이었으므로,
거래하기 직전인 1주일은 제대로 된 음식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음? 말소리가?"

낯선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데드 출몰지역이라 자신과 같은 레인저가 아니고선 오지 않는 지역인데.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귀가 호기심으로 까닥거렸다.

“...가볼까?”

그녀가 아는 목소리가 아닌 것을 생각하면.
엘프가 아닌 타종족이겠지.
이 지역 근처에는 엘프와 인간을 제외한 유사인종은 없는 관계로,
용의자는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좁혀졌다.
세레나는 숲의 종족답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숲을 달려나가,
곧 목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어라?’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인간이 신기하게 생긴 도마뱀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특이하네...?’

남자에 대한  감상은 따뜻함보다는 차갑다는 느낌이 강한 존재였다.
그동안 실버 게이트에 물건을 거래하러 오는 인간들로 인해 인간을 자주 보았지만.
저런 느낌의 인간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세레나의 오감은 엘프들 중에서도 예민한 편인데.
눈앞의 인간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일반인이라도 해도.
소량의 마나라도 느껴지는 것이 정상인데.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그곳에 없는 듯한 감각이었다.
세레나는 이 사실에 이상함을 느꼈다.

"저 인간은 무언가 이상하네..? 윽!!!!!!"

속이 울렁거렸다.
배고파서인가?
아니.. 저 남자를 보는 순간.
두통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건 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원적인...

‘뭐야.... 저거....?’

보인다. 저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으으윽!!!!’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세레나는 지면에 쓰러졌고,
그러자 그녀의 존재를 눈치를  듯한 두 존재가 세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응?"

세레나의 정신은 어지럽다 못해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현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괴롭다’라는 감각뿐.

[플로라.. 플로라...!!]

눈앞의 남자가 ‘무언가’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그러자 동료로 보이는 보라색 머리칼의 청년과 아까 보았던 도마뱀이 다가왔고,
저 앞에서 흐릿하게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 또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

그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포위하는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그림자들...
남자는 그림자들을 모두 둘러보더니,
보라색 머리칼의 청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야누스."

"...."

"...돌아간다."

"‘그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습니까? 네메시스님?"

"....돌아간다."

야누스는 걱정하는 듯이 그에게 물었지만,
네메시스라고 불리는 남자는 등을돌린 채로 차갑게 말할 뿐이었고,
그러자 야누스는 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림자들을 향해 외쳤다.

"전군! 4세계로 돌아간다!"

그림자들이 그의 외침에 하나둘 서서히 사라진다.
아니. 그녀가 보고 있던 세상 자체가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세레나가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자.
그녀의 눈앞에 꿈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꺄아아아악?!!!!!!"

"비명은 나중에 지르고,
왜 쓰러져 있었는지 말해주면 좋겠군."

"그래. 그래."

파란 도마뱀도 그의 말에 동의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꿈과 닮아 있는 두 명의 모습에 세레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혼란한 세레나는 이 상황에 어울릴 만한 변명거리를 고민하였고...

"어.. 그게..."

꼬르르르륵!

"배고파요."

"....."

"....."

결국, 그렇게 되지도 않는 변명을 통해 상황을 무마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그를 자주 찾아갔다.
처음 만난 남자가 그녀의 꿈에서 기억난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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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어어어엉?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살점이 여기저기 뒤섞여 마치 벌집처럼 생긴 괴이한 언데드가 강을 건너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의 몸 여기저기에는 희생자로 보이는 팔과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고,
지독할 정도의 진액이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데드들  모험가들이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메드 어보미네이션이었다.
몸의 살점이 상당히 헐겁기에 쉽게 베이는 언데드이지만.
떨어지는 살점 사이로 독가스와 독액이 뿜어져 나오기에,
잘못 상대하면 수십 명이 중독되어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한다고 악명 높았다.
그러한 언데드 뒤로 키가 3m 넘어가는 오우거 좀비가 따라가고 있었고,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뒤를 이었다.

“뭐야? 왜 여기에 언데드가 와?”

네메시스는 세레나를 만나고 온 후.
자신의 텐트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보고는 어이없었다.

‘여기가 실버 게이트와 떨어진 외진 곳이긴 해도.
언데드가 모이는 곳은 아닐 텐데?’

언데드가 좋아하는 지형이 절대 아니었기에 네메시스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저기 대화가 되는 친구 있니?”

네메시스가 말을 걸자.
언데드들은그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응?”

“우어어어어어어엉!!!”

산자에 대한 증오로 채워진 언데드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네메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대화도  되는 저급 언데드란 거지?”

네메시스는 자신을 향해 고목을 휘두르는 좀비 오우거를 보며 뒷말을 이었다.

“전부 죽여야겠네.”

쿠엉!?

좀비 오우거는 고목을 휘두른 후.
네메시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를 찾으려는 듯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뜻밖의 장소에서 네메시스를 찾을 수가 있었다.

“여기야.”

좀비 오우거가 들고 있는 고목 위에 네메시스가 몸을 숙이고 있었다.

“일단 하나.”

네메시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좀비 오우거의 뒤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는뜯겨나간 좀비 오우거의 머리가 있었다.
그러자 머리를 잃은 좀비 오우거의 몸이 서서히 쓰러져갔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쓰러지면 안 되지. 물이 오염되잖아.”

네메시스는 쓰러진 좀비 오우거의 팔을 잡으며 아직 강을 건너지 않는 소규모 언데드들에게 미소지었다.

“재활용하면 되겠네.”

콰아아앙!!!!

몸을 회전시키며 좀비 오우거의 몸을 언데들에게 내던졌다.
그러자 거기에 휘말리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저급 언데드들이 그대로 박살이나 식물을 위한 거름이 되어갔고,
다른 좀비 오우거  마리가 공격을 막아보았지만 그대로 상반신이 사라져버렸다.

“이 친구의 머리는 이렇게 써야겠지.”

배가 풍선처럼 부푼 좀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유독성 가스가 배에 가득 차 있어.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면 폭발한다는  좀비였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좀비를 보며 네메시스는 남은 오우거 머리를 던져주었다.

퍼엉!

그러자 풍선처럼 부푼 좀비의 몸의 가운데가  뚫렸다.
그와 동시에..

콰앙!!!

좀비는 그대로 폭발해버렸고,
사방을 향해 뼈와 썩은 장기들을 날카롭게 내뿜었지만.
네메시스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하나 남았나?”

쿠어어어엉!!!!!!!

메드 어보미네이션이 뒤뚱거리며 네메시스를 향해 달려왔다.
비록 이동속도는 느렸지만.
어떻게든 그를 잡겠다는 듯이 온몸에 붙은 팔과 다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주변이 녹아내릴 정도의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흐음....”

그러자 네메시스는 메드 어보미네이션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메드 어보미네이션은 웃었다.
그를 향해 검을 들었던 이들은 근접하자마자 모조리 녹아내려 자신의 몸 일부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맨손이라니?
눈앞의 인간도 녹아내려 자신의 일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우엉?

하지만 자신의 독기에 녹지 않는다.
아니.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네메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메드 어보미네이션을 맨손으로 잡았다.

“날뛰면 주위에 민폐니까...”

그대로 아래를 향해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말고 죽으렴.”

으드드드드득!!!!!

메드 어보미네이션의 하체가 서서히 지면에 박혀 들어가는가 싶더니,
네메시스의 막대한 힘에 그대로 으깨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깜짝 놀란 메드 어보미네이션이 온몸의 팔과 다리를 이용해 저항했지만.
네메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콰지지지직!!!

뼈들이 부러지는 소리와살이 분쇄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숲에 울려 퍼지고,
메드 어보미네이션의 몸 절반이 파편이 되어 주위에 뿌려졌다.
그러자 광란에 빠진 어보미네이션이 자신이  수 있는  최악의 독기를 내뿜었지만.
네메시스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아. 이제 안녕.”

네메시스는 온몸이 갈려 머리만이 남은 메드 어보미네이션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그걸 끝으로 네메시스가 힘을 주자.
형체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메드 어보미네이션이 자랑하는 독기는 대기 중으로 사라져갔다.

“좋아. 이걸로 언데드들은 처리했네.”

네메시스는 메드 어보미네이션이었던 살점을 흘깃 보고는 텐트로 돌아갔다.

‘이상한걸? 이 수준정도의 언데드는 내가 여기에 와서 처음 보는 건데.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불길한걸...?’

네메시스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엘프들이라면 고전하거나 혹은 크게 다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네메시스는 불길함을 느꼈다.
실버 게이트에 사는 엘프들이 주기적으로 언데드들을 정리했기에 위험한 종류의 언데드들은 이곳에 없어야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어리석은 놈들!
겨우 그런 것을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느냐? 하하하하하!!!]


“?”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인간들의 모습에 리치는 웃음을 멈추더니,
붉은 안광만이 보이는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래...! 그때의 전쟁은 천년이나 지난일이니,
너희들에겐 그렇게 왜곡됐을지도 모르겠군.
하하! 하지만 잘 듣게 이름 모를 마법사여! 그분은 죽지 않았다.!!!]


붉은 안광의 리치는 단언하였고. 그 대답에 로브를 쓴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드림랜드에 알려진 역사에는 분명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군요. 전설에 전해진 대로라면...
4세계 악마들의 왕은 빛의 주신 켈렌트에게 처형당한 걸로 알려졌는데 말이죠.
...설마?”


[이제야 알았나보군. 이름 모를 마법사여.]

“전설은 조작된 거군요. 주신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의해...”

리치는 로브를 눌러쓴 남자가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하자.
제자를 가르치는듯이 나직이 말했다.

[다른 주신들의 존재도 아는 것 보아하니, 따로 조사를 해왔나 보군.
자네의 생각대로 이 세상은 넓어.
‘창조주의 아이’. 즉 주신은 총 8명.
이곳은 빛의 주신 켈렌트와 어둠의 주신 벨라작스가 다스리는 땅이지.
과거에 그들과 싸웠던 그분은..]


“그분은?”

[..‘괴물들의 왕’.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어.
그분의 육체는 그 어떠한 공격도 먹히지 않아!
수 백... 수천의 드래곤들이 그를 향해 그들의 숨결을 토해냈는데도!!
그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서 걸어서 나왔지!
그리고는 자신의 앞발로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겼지..!!
그때의 그 모습은...!!!]

리치는 당시의 모습을 회상하는 듯이, 잠시 침묵하더니 숨죽여 웃었다.


[왕... 진짜.... 왕...!! 그분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검은 액체가드림랜드를 삼켜갔다.
2세계의 철과 불의 군단도! 그분에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어!!!
그것도 버섯구름이 일어날 정도의 거대한 불꽃으로도 말이지!!
6명의 주신들이 그분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허공을 향해 조용히 팔을 내밀더니, 무언가 잡는 시늉을 하였다.


[자신의 8개의 날개로...
모조리 짓밟았지.
그것도 주신들이 담당하는 속성으로 보란 듯이 말일세!!
그 빛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너희는 결코 상상하지 못할 거야!
그분의 등 뒤로 뻗어 나와 있는 날개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야를 빨아들이는 존재감이 느껴질 정도였어...!
하하하!!!! 그런 그분이... 죽었다고? 웃기는 소리!
천 년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그분에겐 상처하나 나지 않았는데? 그분은 살아있다네 산자여!!]

리치의 외침이 끝난 후. 로브를 쓴 사람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찾고 있는 존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겠네요.
그렇다면 죽지 않는 지식의 탐구자여.
당신에게 부탁을 하나 하겠습니다."

[부탁? 산자가? 나에게?]

"물론 맨입으로 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드리도록 하지요."


[이.... 이것은!!!]

리치는 로브를 쓴 자의 옆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곳에서 책이 나오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만.
곧 그 ‘책’을 보더니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질렸다.


[달.. 달의 책...? 녹색의 성녀가 쓰러뜨린 그 ‘악’들의 우두머리의 책을!? 어떻게 네가!?]


그러한 물음에 로브 밑에서 희미한 미소가 생기더니,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원본은 아닙니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사본...
다만... 사본이라고 하더라도 상당한 지식이 이곳에 담겨있죠.
이것을 주는 대가로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그는 자신을 보며 침묵하는 리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실버게이트의 모든 엘프들을...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그곳에 방문하였을 때.
제가 원하는 엘프 ‘시체’ 하나를 저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일에 필요한 물건이거든요.”


[어째서...그러한 일을 우리 언데드에게 부탁하는 거지?
너희라면... 충분히....]

“하하! 그렇긴 하지만.
아쉽게도 저희들은 국가에 소속된 몸이거든요.”


그는 그 말과 함께 달의 책의 사본을 흔들었고,
그러자 리치의 붉은 안광이 책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아쉽게도 명분도 없이 엘프들을 학살하면 곤란하답니다.
하지만 저희와는 달리.
당신들은 다르잖아요? 여러분은 언데드니까요.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약간의 사고로 알려지겠지요.”

남쪽의 언데드들을 막는 요새인 실버 게이트.
그곳이 언데드 대군에게 멸망 당한다고 하들. 이상한 점은 없었다.
물론 그 이후. 언데드 무리를 청소하려는 토벌대가 파견되겠지만.
 전에 그는 볼일을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그는 리치를 향해 제안을 던진 것이었다.

그 말에 리치의 안광이 깜박이더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뒤. 그것이 악수란 것을 깨달은 남자는 손을 잡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약을 완료한 남자는 자신의 책을 리치에게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리치는 자신의 손에 있는 책을 보더니,
이곳을 떠나기 시작한 두 명의 인간들을 향해 물었다.


[알겠네.. 그대의 제안을 따르겠네.
하지만...
이것만은 나에게 말해주게나.
그대는.. 그 ‘시체’를 대체 어디다 쓰려는 거지?]

 물음에 그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떠나가면서 손을 흔들고는  마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천 년 전 전쟁을 끝낸 녹색의 성녀...
그곳에서 ‘그녀’가 환생을 했거든요.
후후! 전 그녀의 힘이 필요하답니다.
저의 ‘실험’을 위해서 말이죠.”


그가 남긴 말에...
리치는 해서는 안 되는 계약을 한 듯이 경악한 눈동자로 그들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손을 씁쓸하게 내려다보았다.
해서는  되는 죄를 진 것처럼...

[맙소사.....]


‘녹색의 성녀’란 이름은 드림랜드에 살아가는 존재라면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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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와 인간들이 광장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드림랜드에서 오직 실버 게이트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으로.
그것은 엘프들의 국가인 블루문과 인간국가의 교차점이기 때문에 볼  있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필멸자들은...
언제나 시끄럽군...”

시끄럽다.  인간과 엘프들은 저렇게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가?
네메시스는 성벽 위에 누우며 그렇게 생각했다.
세레나의 말에 의하면 오늘은 친목을 위한 축제.
그리고 다음 날 거래 후.
인간들이 실버 게이트를 떠나간다고 한다.
네메시스는 거기까지 생각하더니 곧 눈을 감았다.
이곳의 일은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으므로...
애당초에 그의 관심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플로라.’

그가 살아가는 ‘4세계’에서 이 증오스러운 ‘1세계’로 오게 된 유일한 이유이자.
과거에 ‘천  전 전쟁’을 끝낸 엘프였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연인...
너무나 보고 싶은 그녀였기에,
네메시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기 있어요? 네메시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여기에서 뭐 하세요?"

"세레나..?"

네메시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고개를 돌리자.
축제복인 듯한 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세레나가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네메시스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것이 꿈만 같아서.
네메시스는 자신의 눈을 비비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과거의 플로라도 이랬지...
내가 ‘그 일’을 벌이지 않는 이전에는...
그녀도 날 저런 눈으로 봤어...’


그 생각에 네메시스는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곧 털어내고는 그녀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요!! 아까 먼저 가버리더니.
칫! 이런 곳에나 있고 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네메시스의 옆에 걸쳐 앉았다.


“네메시스는 춤 안 추세요?”


“응”

애초에 춤을 추는 행위가 귀찮았다.
네메시스는 4세계에서 여러 일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만 하더라도 일에 파묻혀 사는 바쁜 괴물이었다.
그런 만큼. 1세계로 넘어오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고 편히 쉬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심정이었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지 마시고요!”


그런 그의 태도에 세레나는 볼을 불리면서 네메시스와 눈을 마주쳤고,
그러자 네메시스는 묵묵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


“....”

잠깐의 침묵. 먼저 항복한 것은 네메시스였다.

“휴우! 못 당하겠으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너무 닮았다고...’

네메시스가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일어서자.
세레나는 불만인 듯이 볼을 뾰로통하게 더욱 부풀렸다.
마치 복어 같은 모습에 그는 속으로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그녀의 기분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므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으음.. 레이디 세레나. 춤출래요?...”


“바로 그거에요! 처음부터 이랬으면 됐잖아요!”

그가 단지 그렇게 했을 뿐인데,
세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섰다.
그들이 있는 실버게이트의 성벽은 빛이 밝혀진 광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광장에서 흘러나온 엘프의 노래는 이곳까지 들려왔고,
하늘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달에 의해 주위가 밝았다.

“음? 춤을 추는 법을 아시네요? 네메시스?”

“...예전에 배워뒀어.”


장수한다는 엘프의 수명도 하나의 점으로 보일 정도로.
오랜 기간 살아온 존재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네메시스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가 손을 튕기자. 발끝부터 서서히 옷이 변해가더니, 검은 예복이 되었다.

“와!!! 마법이에요?”


멀리서 들려온 엘프들의 노래에 맞춰 스텝을 밞았다.

“응. 비슷한 거야.”



마법이란 말에 세레나는 다소 침울한 눈빛으로 네메시스를 훑어보았고 곧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부러워요..
저는 마법을 못 하는데...”

"응?"

그들의 춤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러자 세레나는 손을 떼더니 뒷걸음쳤다.

“네메시스. 전 마법을  해요.
그것도 아이들이 사용하는 간단한 마법조차도 말이에요...
후후.... 전 아무래도 엘프 실격이나 봐요... 후우...!”


‘마법을 못 한다고? 엘프가?’

 말에 네메시스의 마음속에서 ‘혹시?’란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마나’는 8개의 속성들 중.
가장 다루기 쉬운 속성으로서 엘프가 다루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가 아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세레나! 손 좀 나에게 줘봐!”

"네에?! 자...잠깐만요!

네메시스는 세레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네메시스?! 대.... 대체 왜!?"

괴물로서의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세레나의 육체를 구석구석 관측한다.


‘탐지 시작...
다른 에너지원 확인..
’조화‘속성이라고!?!?!?’

“...플로라?”

‘내 눈앞에 있는 엘프가....
정말 플로라라고!?!?!?!?!?’

네메시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눈동자로 눈앞의 엘프를 보았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플로라라면.
이렇게 살갑게 대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그것도 플로라가?
이건... 대체...?’


"저.. 저기... 네메시스...
손  놔주세요오..."


네메시스의 기습적인 행동에 세레나는 부끄러운 듯 붉히고 있었고,
그는 그제야 뒤로 물러섰다.


“아...아..!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세레나.”

“아.. 아니에요!! 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달랐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세레나의 모습에...
네메시스는 빛의 주신 켈렌트가 말한 날짜가 아직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직은 눈앞에 있는 존재는 플로라가 아닌 ‘타인’이었다.
 사실에 네메시스는 세레나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지었고,
세레나는 세레나대로 네메시스의 기습적인 스킨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 말을 이루지 못한 채로 서 있는지 얼마나 흘렀을까?
그들의 침묵은 실버게이트의 정문에서 달려온 어떤 엘프에 의해 갑작스럽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언... 언데드 대군이 몰려든다! 대략 4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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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성녀 : 4세계 괴물들과 주신들의 전쟁을 종결시킨 성녀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종족이 엘프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 자세한 사항은 현재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소문에 의하면 신성제국에서 보내진 이단 심문관이나 천족에 의해 그녀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말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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