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제 16화 만남2
모두가 잠들어 태양조차 잠든 고요한 새벽. 그녀는 연주했다.
"....."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하지만 건반을 향한 손놀림은 정확했으며,
건반을 깃털같이 부드럽게 연주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녀가 연주하는 노래는 천상을 나타내는 듯이 밝은 느낌의 음악이었으나..
천상의 음율 안에는 왠지 모르게 어두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
피아노 소리에 람히르의 날개가 박자를 맞추는 듯이 다시금 흔들렸지만.
그 날개 짓은 지난번의 연주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연주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멈추었다.
"......"
이러한 연주는 이제 의미 없는 짓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뒷면. 신성제국 '블러드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나올 것이고.
그 이후에는 그녀는 다시 이 피아노를 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우승자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더 나쁜 대우를 당할지도...
빛의 주신의 명령인 이상. 천족인 그녀는 따라야만 했다.
그렇기에 자신은 지금 연주를 해보는 것인가...
“음? 연주를 왜 멈추지?”
“..어?”
그녀가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을 때. 곁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고,
이에 그녀가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검은 흑발의 사내가 보였다. 평소라면 월검향이 있어야 하는 자리...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분명... 그녀가 서점에서 보았던 사내였다.
“....네메..시스?”
겨우 기억을 더듬어.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 물음에 사내는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그때 들은 것을 기억하나 보네?”
“...이곳에는 어떻게..?”
“그냥 걸어서 들어왔는데.
새벽이라 경비도 없어서 말이지.
그런데.. 연주는 왜 그만뒀지?”
“이 이상의 연주는..
더 이상 제게 의미 없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앞으로는 못 할 테니까...
그녀는 뒷말을 생략하며, 조용히 피아노를 닫으려 했지만.
어느 사이에 다가온 네메시스가 그것을 제지하였다.
“흠...”
“뭐 하시는 거죠?...”
“얼마 전에 신성제국에 왔는데...
매일 새벽마다 울리는 너의 연주를 들었어.”
“...”
“근데 오늘 연주는 조금 다르더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천족 꼬마?”
“....”
꼬마? 람히르는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네메시스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딱히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네메시스는 람히르의 옆자리에 앉더니, 닫히려는 피아노를 열었다.
“오늘 노래는 다른 날과 달리. 실수를 많이 하더군.”
“...저도 알아요.”
그녀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 외면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그 모습을 본 네메시스는 씨익 웃으며 피아노의 건반에 손을 올렸다.
“음?”
노래가 울려 퍼졌다. 람히르가 연주했던 음악이 밝은 느낌이었다면.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녀와 다르게 웅장하고 무거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곡이었고,
이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네메시스를 바라보았다.
“...이 곡은?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요?”
“아아! 이거?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인간의 노래야.
천족들의 '천사의 악보'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노래랄까? 나쁘지는 않지?”
“확실히... 좋은 곡이네요.”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네메시스는 그 모습에 피식! 하고 웃더니. 생소한 노래를 연주해갔다.
그 음율이 너무나 따뜻해서...
람히르는 조용히 눈을 감아.
자신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피아노 음율을 따라갔다.
이 순간만큼은... 람히르는 자신의 걱정거리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이에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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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어라..?”
어느 사이에 자신이 잠들어 버린 건가?
람히르는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는 네메시스가 보였다.
"깼어?"
'월검향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네... 제가 잠든지... 얼마나 됐죠?"
“1시간 정도 일걸? 피곤한 듯이 푹 자던 군.”
“잠들어서 미안해요...
당신의 연주가 졸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뭐? 잠든 거? 하하하하하!
그건 딱히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 거야.
연주자와 듣는 사람이 만족하면 그거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천족 꼬마.”
“...저기 말끝마다 꼬마라고 하시는데.. 저는 꼬마가 아닙니다만?”
"내 눈에는 너는 아직 꼬마야."
그 말에 람히르는 표정을 구겼고 그는 그 모습에 웃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래... 꼬마. 마음은 풀렸어?”
어느 사이에 그녀의 마음속에 덩어리 진 것이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람히르의 고민은 그대로 남았지만. 새로운 연주를 들어서 그런지. 기분은 홀가분했다.
아마도... 마음이 안정되는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겠지.
이에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요.”
“하하하. 그럼 다행이야.”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앞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놀라서 주위를 둘려보니. 네메시스가 있었던 곳에는 피아노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대체 언제?”
분명... 그가 나타났을 때도 람히르는 감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분명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다니?
자신은.... 인간의 몇 배나 되는 감각을 가진 천족인데?
이에 람히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준비를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봐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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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곳에 있었군요. 네메시스.”
그녀가 서점에 다시 방문하자. 지난번의 그 장소에서 요리책을 읽고 있는 네메시스가 보였다. 람히르가 걸어오자.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응? 왔어? 꼬마.”
“대체...당신은 누구죠?...”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네메시스는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기 힘든 것을 깨달은 듯이,
책을 서서히 덮고는 책상에 내려두었다.
“글쎄?... 우리에게 수많은 이름과 이명, 멸칭 등이 있지만..
우리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말해. 4세계의 ‘괴물’들이라고 말이야.“
“말도 안 돼!! 그들은 분명...!!”
4세계 괴물들이라면.. 그녀도 분명 들어본 존재들이었다.
그녀가 듣기로는 그것들은 ‘천 년 전 전쟁’에서 주신들에게 맞서던 악의 존재들이며,
그 힘은.... 주신이란 존재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4세계 괴물들은 수많은 생물체들을 죽이고,
그들의 영혼을 삼켰으며 그때의 전쟁으로 천족의 숫자가 90%가 넘게 사라질 정도였다!
그런 악의 존재 중 한 명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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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요.."
꽤 고급의 여관이었다. 바닥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구석구석에는 꽃병이 배치되어 밝은 느낌을 드러낸 곳이었다.
인기가 좋을 것 같은 고급 여관에는 현재 사람 한명조차 없었고, 주방으로 추정되는 문 사이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옴으로서 누군가가 요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여기에 왜 오게 됐는지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말도 안 돼”
그녀가 경악하면서 네메시스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능해.”
“하.하지만... 그것들은..”
꼬르르륵!
"....."
"...음..식사도 안 하고 왔나 봐?"
람히르가 말없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곳까지 끌고 왔다.
“....”
'..사실상 납치잖아?'
툭!
그녀가 생각을 끝낼 때쯤. 네메시스는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담백한 음식의 냄새가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
“먹어.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그녀는 처음에 그릇에 담긴 음식을 수상하게 보더니,
곧 냄새에 못 이겨.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우물~ 우물~
"응?.. 엄청 맛있네요?!“
고기 육질부터가 상당히 부드러웠고 미디엄으로 익혔는지.
흘러나오는 짭짤한 피가 소스와 어울려져 절묘한 맛을 내는 음식이었다.
그녀가 놀라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 지으며 계속 먹으라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잠시 후. 그녀는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탁자에 내려두었다.
"맛있었어요."
람히르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홍차와 치즈 케이크로 보이는 것을 그녀 앞에 내려두더니 앉았다.
"자아. 나에게 궁금한 게 뭐야?"
"...진짜 괴물인가요?"
"응."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네메시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더니 볼을 잡았다.
쭈우욱!
"..어이?"
그녀가 당기던 손을 놓자. 네메시스의 볼이 탄력 있게 되돌아갔고,
그것은 마치 인간의 피부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
"이상하군요. 4세계 괴물들은 촉수라든가. 털이 온몸에 나있다고 배웠습니다만?"
"...저기 네가 상상하는 것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놈들도 존재하긴 한데..."
네메시스는 홍차를 한입 마시고는 람히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들 중 90%이상은 너희들이랑 별 차이 없다고.
우리 대부분이 1세계, 2세계, 3세계에서 온 이들이니까.“
“예예예예예!? 그런 건가요?!”
'평소에 켈렌트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잘알 것 같군.'
그는 그 반응에 한숨 쉬더니 말을 이었다.
"응. 그런 거야."
"왠지 그동안 상상하고 있던 괴물의 이미지가 무너져버린 느낌이네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으며 차를 마신 후. 은빛 눈을 다시 떴다.
“...그렇다면 괴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거? 그건..."
그는 회상하는 듯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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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일행이 신성제국 영토에 들어서자.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그 중 한명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호. 혹시.. 네메시스이십니까?"
"그렇다면?"
“교황님이 당신에게 보낸 친서입니다."
그것은 양피지로 만든 봉투로 교황을 뜻하는 황금색 인장이 도봉하고 있었다.
그것을 열자. 드림랜드에서 구하기 어려운,
새하얀 종이로 만들어진 종이가 두 장이 들어 있었고
네메시스는 그 중 하나를 폈다.
[괴물들의 왕. 안녕. 아마 편지를 받았겠지?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이 신성제국으로 오라고 했어.]
"...."
단지 그 문장만 있었기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글씨들이 꿈틀거리면서 다른 문장으로 변해갔다.
[다만 선물을 받기 전에 먼저 해줘야 하는 것이 있어.]
그는 편지를 찢고 싶은 충돌이 생겼지만 참았고,
세레나와 벨라(벨라스트라즈의 애칭)가 호기심에 다가오는 것을 최대한 제지하면서 편지를 보았다.
[신성제국의 '블러드 토너먼트'에 참가해서.
우승한 후. 상품 받아가~ 참 쉽지? 현재 내가 교황의 지위인 이상.
선물을 줄려면 별 수 없었어. 그리고 상품 내역은 편지 안의 또 다른 종이에 써두었어.]
"..음? 이것은 향신료들이네?
그것도 4세계에서 구하기 힘든 것만 골라서 모와 뒀군."
[아마 내용을 보고 만족했겠지?
쉴 여관도 구해났어. 정확히는 필멸자들에게 빌린 거니까.
깨끗이 사용하고, 네메시스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 쓸...]
네메시스는 더 이상 읽을 것이 없는 듯이 그대로 구기고는 땅에 던졌다.
이때 그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켈렌트가 네메시스에게 보낸 상품 목록에 '특별 상품'이란 단어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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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성질 나쁜 꼬마가 '블러드 토너먼트'인지 뭔지에 나가라고 해서. 후우..”
그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한숨 쉬면서 중얼거리자. 람히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참가..하신가요?”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로서는 귀찮기 짝이 없지만 말이야.”
스륵!
“잘 먹었어요. 그렇다면 안녕히.”
그의 대답에 람히르는 조용히 탁자에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언제라도 와. 꼬마 아가씨.
너의 고민 정도는 들어줄게.”
“....생각은 해볼게요.”
람히르는 로브를 다시 뒤집어쓰고는 거리로 나섰다.
곧 '블러드 토너먼트' 하는 시기라서 그런지.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복잡한 그녀의 마음과는 다르게 밝아 보였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도 들려왔고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걸 사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그녀가 지냈던 천계나 신계와는 다른 모습과 다른 규칙.
그렇기 때문에 생소하지만 즐거웠던 곳.
성녀라 존경 받는 자신이 이곳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과거 자신이 없을 때처럼 또 다른 인간을 성녀로서 내세우겠지.
그녀는 문뜩 자기도 모르게 인간이 거의 없는 뒷골목까지 왔다는 걸 느꼈고,
곧 그녀의 앞에 두 명의 인영이 급하게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 머리의 미녀와 그 뒤를 쫓는 엘프였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람히르에게 다가오더니, 그녀를 방패삼아 뒤에 숨었다.
"벨라!!!!
"조금 장난쳤을 뿐인데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세~레나~"
"지금 말이라고 해요!?"
람히르는 매우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깨닫고 벗어나려고 했지만.
뒤의 여성이 상당한 힘으로 람히르를 붙잡은 채로 방패로 쓰고 있었고,
눈앞의 엘프는 그녀 때문인지 함부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람히르는 한숨 쉬더니, 쉽게 벗어나는 것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앞에 엘프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푸른 여름 숲을 연상시키는 연한 초록 머릿결의 엘프였다.
세레나는 화가 많이 났는지. 볼에 옅은 붉은색 무언가가 나타나 있었고,
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음료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것에 젖어 있었다.
'저거 때문인가..?'
그녀는 세레나라고 불린 여성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정화>"
"감사합니다."
람히르의 손을 댄 곳부터, 젖어있는 곳이 깨끗하게 말라 갔고,
그 모습에 엘프는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다시 도망가는 벨라라는 여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벨~라~스~트라즈!!!!!!"
"...재미있는 분들이네."
람히르는 그들이 떠난 곳을 한번 보더니, 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행객이라 여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