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카르시온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그와 결혼해서 공작 부인이 되는 미래를 그리기에는 지독히 현실적이었다.
딱 한 번.
그와 한 것은 그저……
그래, 그저 이런 잘생긴 사람과 언제 한번 해 볼까 싶어서.
그리고 카르시온에 대한 기억을 하나라도 더 간직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우린 이미 성인이었고, 아카데미는 며칠 후 졸업이었으니.
이제 볼일은 없을 테니까.
혹여나 마주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처럼 동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 관계가 명확한 관계일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깊게 새기고 싶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기적이라고 욕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으니.
그런데, 작은 욕심을 부린 게 뭐가 어때서?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나 또한 그를 좋아하고 있었고.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걸 수 없는 일이었다.
신분의 격차는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좁힐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최고위 귀족인 공작가와 가진 것 하나 없는 평민이라면 더더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공작가에 돌아가 현실을 깨닫고, 사교계에 나가고 나면 나에게 있었던 관심도 사그라져 버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좋아하던 카르시온은 ‘그날’ 이후 나에게 더욱 매달리고 있었다. 마치 나와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카데미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다.
* * *
나는 아카데미에 1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학했다. 보통 10살 즈음 입학하는 아이들과 달리.
뭐, 그렇다고 주니어부터 다녀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내 나이에 맞는 편입 시험에 통과해 시니어 1학년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시니어는 4학년까지 있었으니, 아마 졸업 시험만 잘 치른다면 성년이 되는 해에 졸업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급하지 않고 무사히 졸업한다면 말이지.
문제는 미래의 일인 졸업이 아니라 당장 내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아레나 아카데미.
이곳은 사립인데도 불구하고 라그라스 제국의 지원을 어마무시하게 받았다.
여러 분야에서 인재를 배출해 내는 만큼, 우리 라그라스 제국의 자랑이랄까.
그런 대단한 아레나 아카데미는 동아리 활동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동아리 활동이 성적에 상당 부분 반영됐으니.
다행인 것은 동아리 활동이 성적에 반영이 많이 되는 것뿐이지, 동아리에 대한 자유도는 높았다.
호흡동아리나 수석 동아리 같은 동아리가 존재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참고로 호흡동아리. 줄여서 호동은, 정말 숨만 쉬는 동아리였고 수석 동아리는 돌을 수집하는 동아리였다.
심지어는 모기 고문 동아리도 있었더랬지.
하지만 나는 평범한 동아리는 물론이고 이런 이상한 동아리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동아리 입부 신청 기한을 놓쳤으니까……!
이 바보 멍청이.
덕분에 상황이 굉장히 뭣 같아졌다.
동아리 신청 기한을 놓치면 어떻게 되느냐.
비인기 동아리에 랜덤으로 배정된다. 물론 신입을 받아 주는 동아리에 한해서 말이다.
이색적인 동아리가 많은 만큼 비인기 동아리 중에서는 굉장히 괴짜 같은 곳이 많았다.
의외로 모기 고문 동아리는 인기 동아리였다. 교수님들도 유독 이 동아리에 대해 점수를 잘 주는 편이라 더 그랬다.
진정한 비인기 동아리는 마물의 사체를 구해 먹는다거나 ‘교수님’을 필두로 ‘주말’ 산악회 따위의 활동을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구차하지만 변명 하나 하자면, 나에게는 어제가 동아리 신청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친구가 없었다.
나는 이제 막 입학했으니 친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다른 애들은 주니어 1학년 때부터 아카데미를 다니며 친분을 쌓았을 것 아닌가.
그래서 결론은 내가 강제로 비인기 동아리에 들어갈 운명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가혹한 현실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아카데미 내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기한을 놓친 것은 교무처에 가서 울고불고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빨리 포기하는 게 낫다.
그렇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너! 리엔이라는 애 맞지!”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확 잡아채며 소리쳤다.
나는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빠진 탓이었다.
가만히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내 어깨를 잡아챈 갈색 머리 아이가 다급히 물어왔다.
“응? 리엔 맞지? 맞다고 해 줘, 제발.”
지금 사람이 자기 때문에 놀라 주저앉았는데 아무리 급해도 그게 먼저 나올 말인가?
저 싸가지 없는…….
나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부정했다.
“아닌데.”
“뭐? 네가 아니야?”
확신에 차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낭패 어린 얼굴로 변한다.
“미, 미안.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라고 해서 착각했어.”
“리엔이라는 애는 왜 찾는데?”
“……그, 그런 일이 있어!”
아이는 그런 일이 있다는 말로 얼버무린 후, 그가 왔던 길로 추정되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달려가는 뒤통수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명찰에 리엔이라고 버젓이 쓰여 있는데. 멍청이.
그러고는 곧 손을 바로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더러워진 치마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가 무슨 사고라도 친 적 있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학한 후에는 조용히 수업을 들은 기억밖에 없다.
누가 날 찾는다기에 아카데미 전체를 통틀어 나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교수님에게 혼날 만한 일이라고는 특정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잔 것밖에는…….
아. 시작하자마자 자서 그런가?
하긴 몸을 써야 하는 수업에서 연무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자는 게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검을 휘두르기도 하는 위험한 수업에서 까딱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차라리 혼이 나는 게 백 번 천 번 나았다.
유난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다치는 건 싫은걸.
어쨌든 그것 때문에 교수님이 날 찾은 거라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음 수업 시간에 혼나면 될 것이다.
에휴.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산책로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동아리에 대한 울적함은 나아지지 못했다.
“아 진짜, 산악회는 꾸역꾸역한다고 해도 마물 시식은 진짜 죽어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동아리에 들어와.”
나는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입학한 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말 한번 걸어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곱슬곱슬한 벚꽃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담겼다.
……와. 사람 맞아?
그의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분홍 솜사탕 같은 머리카락은 둘째 치더라도 저 잘생긴 얼굴은 말이 안 됐다.
청명하게 빛나는 벽안 밑으로 눈가에는 은은하게 붉은 기가 맴돌았고,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빨간 입술은 사람을 홀리는데 최적화된 듯했다.
묘하게 색기가 흐른다고 해야 하나 퇴폐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뿐.
얘랑 연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눈을 높이지 말자고 생각한 나는, 자기 최면을 걸며 무덤덤하게 입을 뗐다.
“동아리 입부 신청 기간 끝난 거 몰라?”
“……뭐?”
분홍 머리 아이는 멍하니 나를 보고 있다가 내 물음에 뒤늦게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아. 이름은 여기에 적으면 되고, 동아리 모임은 바로 내일부터 시작이야.”
그는 자연스럽게 동아리 개설 신청서라고 적인 종이를 내밀며 내 말에 동문서답했다.
동아리 신청서가 아닌 개설 신청서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동아리인 것 같다.
“분홍 머리야. 입부 신청 기간은 어제까지였다니까?”
“오늘이 마감일이었는데 네가 들어와 준다니 정말 다행이다.”
“……?”
“입부 신청서 작성이 귀찮으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서명 한 번만 해 줘. 이름은 리엔 맞지?”
귀가 막혔나.
쯧. 젊은데 안됐네.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그러자 그가 재빠르게 뒤를 도는 내 손을 잡아챘다.
“……서명 안 해 주고 어디가?”
잡힌 손을 빼내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그가 놀라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을 커다랗게 떠서 그런 걸까,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제 나이에 맞는 순수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바뀌어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정강이를 부러뜨려 주고 싶지만, 네 잘생긴 얼굴 때문에 참는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벌써 세 번째 말하는 거지만, 동아리 입부 신청 기한은 어제까지였어.”
소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동아리 신설 신청은 오늘까지야.”
“뭐?”
“즉, 네 이름을 여기에 적어 내면 우리 동아리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지.”
당연히 동아리 신설 신청 마감이 더 빠를 거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아리 신설 허가를 받지 못한다면 오늘 개설을 신청한 사람들은 다 랜덤으로 동아리를 배정받아야 하지 않나.
일단 동아리 신청서를 내면 무조건 허가가 나는 건가?
……별별 괴상한 동아리들을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안 들어갈래.”
하지만 나는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얼굴만 봐도 각이 나왔다. 저 동아리에 들어가면 아카데미 생활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게.
추측이지만, 저 아이를 덕질하기 위한 동아리도 있을 듯했다.
그가 예상치 못한 거절에 충격을 받은 듯 붉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동아리 최소 인원이 3명인데 지금 모인 부원이 나까지 2명밖에 없어. 도와줘.”
저런.
나처럼 동아리 신청 기한을 놓친 바보는 또 없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굳이 희생해가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저 아이가 개설하려는 동아리도 무슨 동아리인지 몰랐다.
그에게 다시금 거절의 말을 꺼내려 입을 달싹였다. 그러자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했는지 그가 먼저 선수를 친다.
“와, 정말? 우리 동아리에 들어와 준다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간 내가 들어간다고 말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응? 더 물어볼 게 있어?”
그가 눈을 반달로 휘며 예쁘게 웃는다.
그 미소를 보며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것은 ‘진짜 빌어먹게 잘생겼다.’라는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저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순탄한 아카데미 생활이고 뭐고 그거 하나 못 버리겠냐는 생각이었고.
내가 아무리 자기 최면을 하려 해도 눈이 멀쩡하게 달려 있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데.
저 얼굴로 웃는 건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