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우당탕탕-!
그가 나와 거리를 벌리려다가 뒤에 있는 책상과 부딪쳐 큰 소리를 냈다.
……와 아프겠다.
“미, 미쳤어?!”
“분홍 머리야, 괜찮아?”
“너라면 괜찮겠냐?”
그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가 바람을 분 귀를 틀어막았다.
귀 말고 부딪친 거 괜찮냐는 물음이었는데.
뭐, 저 반응을 보니 다른 곳은 괜찮은 듯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프면 호 해 줄까?”
“제발 그 입 좀……!”
카르시온이 빠르게 다가와 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말할 수단을 잃어버린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손을 떼 줄게.”
그다지 시끄럽게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불만이 올라왔지만, 구태여 따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막힌 입이야 손 하나 대지 않고도 뗄 수 있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눈을 휘고는 살짝 입을 벌려 그의 손을 핥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파드득 떨며 부리나케 나와 멀어졌다.
“너 진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짜네.”
내 말을 생생하게 들은 그의 얼굴은, 이제 벌게지다 못해 이젠 ‘톡’ 건드리면 ‘팡’하고 터질 지경이었다.
하아.
진짜 귀엽네.
아무래도 내 새로운 취향을 알게 된 것 같다.
저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종종 놀려 먹어야지.
* * *
내가 지금 재학 중인 ‘아레나 아카데미’는 초대 아레나라는 귀족에 의해 설립된, 제국 유일의 신분 없는 학교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마디로 귀족, 평민 상관없이 입학시험만 통과하면 누구나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입학시험부터가 배움의 기회가 별로 없는 평민들에게 불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이 아카데미는 정말 꿈의 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완벽했다.
아레나 아카데미가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건물이 굉장히 크고 넓은 것뿐만 아니라 음식, 기숙사, 수업의 퀄리티, 장학 제도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따로 있다.
‘배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라는 빛과 같은 초대 설립자님의 신념에 의해, 이 아카데미는 자신의 신분 언급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평민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교칙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보니 이 교칙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겪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은근히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어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게다가 지금만 봐도…….
“분홍 머리야.”
카르시온을 분홍 머리라고 칭하자,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이게 뭐야?”
“보면 몰라? 소파잖아.”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니.
도대체 소파가 왜.
그것도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문양이 찍혀 있는 소파가, 우리 동아리실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데.
이 소파 설마 자기 집에서 가져온 건가.
이렇게 큰 소파를 어떻게 하루 만에 가져올 수 있었는가는 둘째치고, 이건 거의 자기 신분을 떠벌리는 수준 아냐?
“그게 아니라 동아리실에 이게 왜 있냐고.”
“딱딱한 의자보단 소파가 편하잖아.”
“동아리실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걸 가져다 놓아도 되는 거야?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어떤 미친 새끼가 소파를 훔ㅊ…….”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고는 대뜸 자기가 뱉은 말을 순화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저 큰 소파를 가져갈 수 있겠냐. 게다가 여기는 우리 동아리의 지정실이라 다른 사람은 못 들어와.”
이미 다 들은 마당에 굳이 왜 말을 순화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여기 지정 동아리실이야? 오. 겨우 최소 인원을 만족한 동아리에 방 하나를 내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네가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나 본데,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도 못 껴.”
확실히 소문대로 아레나 아카데미가 돈이 많긴 한가 보다.
“그것참 놀랍네.”
“진짜 놀란 거야, 아니면 비웃는 거야?”
카르시온이 내 반응이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어왔다.
저거저거 별것도 아닌 일에 눈썹 치켜세우는 거 봐.
진짜 잘생겼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방금은 진심으로 놀란 거였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네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말하는 건지 궁금해.”
무슨 생각을 하긴.
네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또는 네 행동이 귀엽다거나, 네 얼굴이 달아오른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는 등의 생각을 하고 있지.
“네 머리를 반으로 가르면 알 수 있을까?”
카르시온의 눈에 잠깐 섬뜩한 기운이 스쳐 갔다. 하지만 나는 그가 표정 연기도 잘한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받아쳤다.
“한번 갈라 볼래?”
장난 섞인 말에, 어쩐지 가라앉은 듯한 그의 벽안이 나의 검은 눈동자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다 얼마 후 눈이 조용히 감겼다.
“아니.”
싱겁긴.
그럴 땐 진짜 내 머리를 두 쪽으로 가를 것처럼 연기를 이어 나갔어야지.
나는 카르시온의 부족한 센스에 조금 실망하며 그의 옆에 있던 의자를 빼 와 자리에 앉았다.
원래는 어제처럼 동아리 시간을 잠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저 푹신해 보이는 소파를 두고 딱딱한 의자에서 잠을 청하면 뭔가 슬픈 기분일 것 같다.
오늘은 책이나 읽어야지.
책을 꺼내려 가방을 뒤적이고 있는데, 대화가 끝난 뒤에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좀 부담스러운데.
나는 가방을 뒤지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분홍 머리야. 할 말 있어?”
“너 왜 여기 앉아?”
만지지도, 이름도 못 부르게 하는 거로도 모자라서 옆자리조차 앉지 말라는 건가.
“그럼 자리가 네 옆자리밖에 없는데 어떡해.”
“소파 있잖아.”
“저기 네 전용 아니었어?”
“…….”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네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남의 걸 마음대로 쓸 만큼 무개념은 아니라.”
“저건 동아리 공용이니까 마음껏 써.”
……저 고급스러운 소파가 공용이라고?
나는 당연히 카르시온이 자기 혼자 쓰려고 가져온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이름 불리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저 고급스러운 소파를 공유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응.”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넌 최고야.”
그에게 짧은 찬사를 보낸 뒤 냉큼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침대를 사랑하는 내게, 소파는 비슷한 안식처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뒤적거리던 가방도 의자 옆에 잘 놓아두고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푹.
으아아. 완전 쏙 들어가잖아?
한 번 더 해 보자.
푹신.
으아아. 너무 좋아. 한 번만 더.
푹신.
심각한 중독성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소파 위에서 퐁퐁거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푸핫’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행위를 멈추고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왜 웃어?”
카르시온이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
“그게 그렇게 좋아?”
“그냥 쓸 만하네.”
좋으면서도 아닌 척 새침하게 대답하니, 그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표정에 다 드러났어. 아주 흐물흐물하던데.”
이런. 소파에 안락함에 빠져 일하기를 게을리했구나 얼굴 근육아.
너희는 벌로 오늘 밤, 고영양 고수분 약초 팩을 받게 될 것이야.
“……어. 표정 돌아왔네.”
나는 카르시온의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에 생각하던 것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를 바라봤다.
내가 그의 외모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려 일부러 무표정을 지어낸 건 맞다.
하지만 저렇게 실망할 정도로 감정 없이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다시 흐물거릴까?”
“됐어. 내가 그걸 다시 봐서 뭐 해.”
그럼 그 시무룩한 목소리랑 표정부터 어떻게 하든지.
“계속 쫑알거리지 말고 어제처럼 잠이나 자.”
탁.
카르시온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위로 담요가 펄럭이며 떨어졌다.
나는 묘한 눈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까칠하게만 구는가 싶더니 이런 것도 챙겨 주고. 솔직히 감동이다.
“너 은근 착하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눈을 위해서지.”
“그래도 고마워. 감사의 의미로 다음에 네가 다치면 내가 책임지고 호 해 줄게.”
“그런 거 필요 없다고!”
“그래그래.”
다시 또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보며 참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고급스러운 소파도 양보해 주고, 세심하게 담요도 챙겨 줄 정도면 착한 거 아닌가?
어제의 까탈스럽고 나빠 보였던 성격도 조금 지켜본 결과,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느낌이었다.
분홍색 아기 고양이.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소문이 이상하게 난 것 같다.
“분홍 머리야. 분홍 머리야.”
“또 뭐.”
“내가 너에 대한 허무맹랑한 소문을 들은 게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잠이나 자라니까.”
“너한테 이걸 말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
“무슨 소문인데.”
“글쎄 너처럼 착한 애가 사람을 반쯤 죽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둥, 검술 대련에서 마법을 난사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들리더라고.”
“…….”
“아니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을 예비 살인마에, 사이코로 만들어놔? 이래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 소문…….”
“그치, 네가 들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 소문. 어디서 들었어?”
“복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누군지 명찰 좀 볼 걸 그랬다. 근데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온 걸 보면 소문이 생각보다 많이 퍼졌나 봐.”
이야기를 듣는 카르시온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게 속으로는 끓는 화를 참는 듯 보였다.
“다음부터는 몇 명이건 이름 좀 확인해 줘. 꼭.”
“응, 그럴게. 너는 물이라도 마시면서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다.”
내 말에 그가 자연스럽게 책상에 있던 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나저나 분홍 머리야.”
카르시온은 물을 마시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또 왜 부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파가 넓어서 두 명이 누워도 될 것 같은데 어때, 같이 누울래?”
푸흡-!
“농담이야.”
“너는 정말……!”
나는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리고는 얼굴이 달아올라 씩씩대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저렇게 순진한 반응이라니,
아이 재미있어.
* * *
그날 이후 왠지 모르게 복도에서 아이들의 주 얘깃거리로 활발히 거론되던 카르시온의 소문들이 싹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카르시온이 소문의 근원을 없애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이 설마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