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일찍 동아리실에 도착한 리엔은 자연스럽게 카르시온이 가져온 소파에 누웠다.
이제 겨우 동아리 활동 사흘 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적응력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소파를 혼자 차지하는 건 너무했나.”
하지만 공용이니까 마음대로 쓰라고 한 건 카르시온 쪽이지 않은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것도 잠시.
불만 있으면 깨우겠지라는 편한 생각을 하며 리엔은 잠을 청했다.
눈을 감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벌컥 소리가 나며 동아리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리엔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어나서 인사해야 하나 고민했다.
물론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자는 척하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와야 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리엔의 의아함이 짙어질 무렵.
문밖으로 피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시온. 안 들어가고 밖에서 뭐 하냐?”
“……쉿.”
“뭐야, 안에 뭔 일이라도 났어?”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뭔가 깨달은 듯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
소파에서 곤히 자는 리엔을 발견한 것이다.
이윽고 피오르가 말소리를 확 줄이며 입을 열었다.
소리가 작아 리엔은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조용히 하라는 건지는 알겠는데,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나 좀 무서워지려고 한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카르시온이 느릿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편입생에 한해 동아리 정정 기간이라는 게 있다더라고.’
‘그런 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온갖 소문에 빠삭한 피오르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카르시온이 굳이 제게 거짓말을 입에 담을 이유는 없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변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정정 기간이 며칠인데?’
‘……이 주.’
답이 미묘하게 느렸으나, 피오르는 눈치채지 못하고 혀를 짧게 찼다.
‘……그동안 성격 잘 죽이고 있어라.’
최소 인원을 겨우 만족한 동아리에서 리엔이 나가 버리면 겨우 만든 동아리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둘은 무언의 합의를 본 듯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한편, 리엔은 카르시온의 쉿 소리와 함께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작게 감동했다.
역시 카르시온은 처음 본 자신을 경계했을 뿐 천성은 착한 게 맞았다.
안 보고 있을 때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다니.
‘역시 모두가 인정한 큐티 부농 아기 고양이.’
카르시온을 분홍색 새끼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리엔 혼자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라는 부사를 붙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잠시 후 리엔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워 있는 그녀의 위로 담요가 덮어진다.
‘와. 진짜 착하잖아.’
연이은 자상함에, 리엔은 간질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분홍 머리야, 뭐 해?”
담요를 덮어 주다가 갑작스레 그녀와 눈이 마주치게 된 카르시온이 확 얼굴을 붉혔다.
“이건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황하는 카르시온의 얼굴을 보며 리엔의 속에서 짓궂은 마음이 올라왔다.
착한 일을 했는데 저런 표정이라니. 꼭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 같지 않은가.
리엔은 다소 과장된 어투로 그의 행동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한테 몰래 담요를 덮어 주려고 했던 거야? 착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건 진짜 감동이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이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와, 그럼 친절이 몸에 배어 있다는 거구나. 더 대단한걸.”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칭찬이었으나, 효과가 있었는지 카르시온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리엔은 그것을 보며 박차를 가해 더욱 그를 놀려댔다.
“사실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님인 거 아니야? 설마, 힘을 숨겨 왔던 성자?”
그녀가 주접을 늘어놓을 때마다 청취자인 피오르의 얼굴에 경악이 짙어졌다.
지금 제가 뭘 들은 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리엔은 그런 피오르를 보지 못하고 계속 카르시온을 놀리기 바빴다.
리엔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후. 부농 아기 고양…… 아니, 천사님.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셔도 괜찮으신가요? 저 때문에 천계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이네요.”
카르시온은 결국 그 자리에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담요 덮어 주던 것을 들켜서 당황한 것에 더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연속으로 들었더니 사고가 정지된 탓이었다.
리엔은 입가에 웃음을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굳어 버린 카르시온 뒤로 사뿐히 걸어갔다.
어쩐지 적막감이 감도는 순간,
리엔은 카르시온의 오금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쑤욱.
그러자 순식간에 카르시온의 무릎이 접히며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이 휘청였다.
리엔은 그런 카르시온의 팔을 능숙하게 잡아 부축해 주며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런. 위험하잖아.”
꼭 자신이 하지 않은 일처럼 말이다.
그녀의 오금 공격에 정신을 차린 카르시온이 단박에 리엔의 손을 뿌리치며 삿대질했다.
“너, 너……!”
“응? 분홍 머리야,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피오르는 제 뺨을 찰싹 때렸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허허 웃음을 토해 냈다.
“하하, 세상이 미쳐 돌아가나 보다.”
* * *
“다가오지 마.”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완전 병균 취급이네.”
나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그러모으며 속으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삼켰다.
몇 번 놀렸다고 경계심이 저렇게 늘어나다니. 조금 자제해야 하나.
하지만 반응이 너무 재미있는걸.
어제 일로 심통이 났는지 내가 앉지 못하게 소파를 차지한 것만 봐도 그랬다. 나름의 복수인 것 같은데.
너무 귀엽지 않은가.
나는 카르시온의 바람대로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책걸상에 자리 잡았다. 피오르가 앉아 있는 맞은편 자리였다.
여기서 부농 아기 고양이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갔다가는 정말 진심으로 토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완급 조절도 해 줘야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경계심이 누그러질 수 있을 테니.
나는 카르시온이 알면 기함할 만한 생각을 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그나저나 뭘 해야 시간이 빨리 가려나.
오늘도 소파 위에서 잠잘 생각에 마땅히 시간 때울 만한 것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찰나, 시야에 다리를 꼰 채 책을 읽고 있는 피오르가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공중에 떠서 까닥거리고 있는 그의 오른쪽 발이.
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못 참지.
생각해 보니 카르시온이 삐침 쿨타임으로 인해 놀리는 게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놀리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피오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 해?”
그러자 피오르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누구와는 다른, 굉장히 자상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아, 오늘 수업 들은 거 복습 중이었어.”
“피오르는 의외로 성실하구나.”
“……의외로?”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는 듯 피오르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스쳤다.
나는 피오르의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말을 건 이유도 방심을 유도해 내기 위함이었다.
짧은 순간 나는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교묘한 움직임으로 피오르의 신발 뒤쪽을 툭 쳐서 밀어냈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부린 듯 신발이 툭 하고 벗겨진다.
간단해 보여도 섬세한 기술력을 겸비하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발놀림이었다.
“어……?”
순식간에 한쪽 신발이 벗겨진 피오르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신발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에 나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벗겨진 그의 신발을 멀리 차 버렸다.
툭. 데구루루.
날아가 동아리실 벽면에 부딪힌 신발 쪽으로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허망한 표정이었다.
“너……. 안 그렇게 생겨서는 진짜…….”
피오르는 내게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뻐끔거리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더욱 즐거움을 느꼈다.
아빠가 장난기가 많은 탓에, 맨날 엄마와 함께 아빠에게 수만 가지 장난에 당하고는 했었는데.
피는 못 속인다고 했나. 자신에게도 이렇게 짓궂은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러다 아빠처럼 장난치는 맛에 사는 거 아닌지 몰라.
하지만 놀리는 건 놀리는 거고, 이 이상 기분 상하게 하면 안 되겠지.
나는 털레털레 걸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신발을 주워 들었다.
내 손에 자신의 신발이 들어간 게 퍽 불안했는지 피오르가 잘게 눈을 떤다.
“설마 창밖으로 던지려는 건 아니지?”
“그 정도로 성격이 나쁘진 않아.”
피식 웃은 나는 그의 오른발 아래 고이 신발을 가져다 놓았다.
사서 고생하는 꼴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즐거움을 얻었으니 된 거 아니겠는가.
피오르가 다시 한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신발과 나를 번갈아 봤다.
“왜? 신겨 줘?”
신겨 주냐는 말에 피오르가 혼자 말을 하듯 작게 읊조렸다.
“대체 무심한 건지, 밝은 건지. 착한 건지 나쁜 건지…….”
혼란함이 그대로 담긴 표정과 말투에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조금 더 놀려 볼까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정말로 직접 그에게 신발을 신겨 주려 한쪽 무릎을 굽혔다. 아니, 굽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갑자기 들려온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야!”
다급해 보이는 카르시온의 음성에,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려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그를 바라봤다.
“너는 자존심도 없어?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무릎을 꿇으려고 해?”
나는 그가 화낸 의외의 포인트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장난으로 무릎 좀 꿇으려고 했던 거에 저렇게 화를 내줄 줄은 몰랐는데.
카르시온 자신이나 피오르에게 친 장난은 그냥 넘어갔으면서.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느낌에 괜히 그의 눈치가 보였다.
“분홍 머리야, 화났어?”
“아니.”
카르시온은 내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성나 보이는 네 표정 좀 풀던가.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경계심 많은 부농 아기 고양이가 놀라지 않도록.
조금씩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