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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6)화 (6/161)

6화

모든 상황을 녹음 하나로 해결한 후, 교무실을 나온 나는 손을 들어 덜덜 떨리고 있는 손끝을 바라봤다.

아.

잘게 떨려 오는 손을 보니, 애써 괜찮은 척했던 얼굴에 마치 유리처럼 균열이 일었다.

그들 앞에서 뻔뻔히 턱을 치켜들었던 것과 극명히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얼굴에 표정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와 동시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강제로 밀려들어 왔다.

쿵.쿵.쿵.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왔다. 손바닥은 이미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주변에 학생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떠오른 순간부터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동아리실.

지금은 교과 시간이 다 끝나지 않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둘러 판단을 끝낸 나는 동아리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녹음 가능한 마도구 볼펜을 아카데미에서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잊고 있었는데. 겨우 벗어났는데.

한동안 쓰지 않았던 볼펜을 쓰게 되니,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동아리실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문을 잠갔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 내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죄여 들어오는 불안감을 진정시키려 이를 악물었다.

진정하자.

여기는 아카데미야. 걔는 내 옆에 없어.

아까 봤잖아, 리엔.

여기서는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해.

아무도.

* * *

“……라는 일이 있었대.”

“다시 말해 봐, 피오르.”

“그러니까 리엔이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걸 안 극성 애들 다섯 명이…….”

“처음부터 말고, 동아리에 들어온 이유를 말한 부분만.”

“카르시온 네 얼굴이 착해서 동아리에 들어왔다고 말한 부분?”

“……그거 잘생겼다는 말이겠지?”

“그렇겠지.”

“그 무뚝뚝한 여자애가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응. 녹음 구가 돌아다녀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해 줄 수 있어. 다섯이나 되는 애들의 퇴학이 걸려 있는 큰 사건이라 더욱 퍼지는 속도도 빠른 것 같던데.”

피오르는 카르시온의 물음에 자세히 답해 주었으나, 사실 카르시온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얼굴 때문에 동아리에 들어온 거라고?’

그렇게 저에게는 관심 한 톨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무표정은 그냥 습관이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싶어서 그랬던 걸까.

그리고 자신은 겨우 그 사실 하나에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카르시온 너 얼굴이 빨개.”

“알고 있으니까, 닥쳐.”

피오르는 얼굴이 벌게진 카르시온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설마 하며 입을 뗐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카르시온 너 혹시……?”

“하.”

카르시온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푹 고개를 숙였다.

“피오르, 나 어떡하냐.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거 같다.”

저런.

지랄 맞은 성격의 카르시온이 리엔에게 한마디도 못 하고 놀림당할 때부터 예상하긴 했다.

특히나 그가 말한 동아리 정정 기간인 이 주가 지났음에도 한마디 못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박장대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확언을 듣고 나니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참 안됐네.”

카르시온의 집착을 감내해야 할 리엔이 말이다.

* * *

카르시온은 리엔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답지 않게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동아리 모임 첫날. 자신과 다르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피오르와 그녀를 보고 대화를 끊어 버린 건…….

‘그건 걔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가식적으로 웃는 피오르가 거슬려서 그런 거잖아.’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좀 당황스러웠던 것도 같다.

귀에 바람을 불었을 때는?

그때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얼굴이 달아오른 거다. 아니면 겨우 그런 장난에 속았다는 창피함 때문이던가.

……그럼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는 건데.

문제는 그날 카르시온은 기숙사에 들어가서 내내 그녀 생각이 났다는 거다.

그녀가 딱딱한 의자 위에 누워 있었던 것도 거슬렸고, 조금 올라간 치마 때문에 희고 가는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물론 케이프로 어느 정도 가리긴 했지만.

‘짜증 나.’

카르시온은 누워 있던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리곤 복잡한 표정으로 옷장에 있는 외투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옆에서 룸메이트인 피오르가 이 밤중에 어딜 나가려는 거냐고 물어왔다. 물론 카르시온은 가볍게 무시했다.

공간 이동.

한밤중에 외투를 꺼내 입고 무지막지한 마나를 소모해 가면서 도착한 곳은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수도 저택이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카르시온이 수도 저택을 찾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고급 가구들은 대부분 주문 제작을 맡긴다. 그래서 질 좋은 소파를 구매하려면 적어도 몇 주는 기다려야 했다.

그런 이유로 카르시온이 선택한 방법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져오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방에 있던 소파를 간단히 아공간에 집어넣은 카르시온은 방금까지 소파가 차지했던 공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무심히 침대 맡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울릴 리가 없는 곳에서 설렁이 울리자, 헐레벌떡 달려온 시종이 급하게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가 이 밤중에 도련님 방에서 설렁줄을……!”

헉.

아카데미에 계셔야 할 카르시온 도련님이 여긴 어떻게?

“너. 담요 하나만 가져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보던 시종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한동안 얼을 탔다.

카르시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시종이 급하게 용서를 구하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도련님께서 덮을 만하신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네, 네? 다른 명령하실 것이라도.”

“내가 덮을 것이 아니라…….”

카르시온은 달리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시종은 그 모습을 보고 눈치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아니라, 다른 분께 드릴 담요가 필요하시군요.”

카르시온이 입을 꾹 다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르시온의 명령으로 담요를 가지러 나간 시종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사람 같지 않은 잘난 얼굴과 그놈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그대로다.

그런데 자꾸만 느껴지는 이 위화감은 뭘까.

카르시온 도련님으로 위장한 도적이 저택에 침입한 것을 자신이 예민한 감각으로 눈치를 챈 것일까?

……그럴 리 없지.

시종은 말도 안 되는 추측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에 카르시온 도련님이 아니라면,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오는 거 차제가 말이 안 된다.

경비의 눈을 어찌어찌 피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공작님이 어떤 분이신데 침입자 한 명을 모를까.

공작님은 침입자가 도련님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거다.

그렇다면 대체 이 위화감은 뭘까.

순간 시종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아.

위화감이 뭔지 깨달았다.

맙소사!

도련님께서 담요를 다른 사람에게 덮어 준다고? 그런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는 혼란에 빠져, 빠르게 놀리고 있던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한번 찬찬히 그 말의 의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도련님께서 담요를 주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누굴 죽이고 시체 위에 덮을 것을 달라고 하신 건가.

그래. 그러면 말이 된다.

후.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쉰 시종은 “공작님께 오랜만에 시체 치울 일이 생겼다고 말씀드려야겠군.”하고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동아리실에 소파를 가져다 놓은 카르시온은 리엔이 동아리실에 들어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애타게?

아니, 애탈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소파를 보고 반응할 그녀가 ‘조금’ 궁금했을 뿐.

동아리실에 들어온 리엔은 그가 가져온 소파를 잠시 응시하다가 ‘분홍 머리야.’하고 그를 불렀다.

‘사람을 저런 기분 나쁜 호칭으로 부르다니.’

카르시온은 기분이 나빴지만 리엔이 하는 말에는 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그는 자연스럽게 ‘미친 새끼’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그때 카르시온은 속으로 아차 싶어서 빠르게 눈을 굴리다가 순화해서 다시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카르시온은 낯선 감정을 느끼며 소파를 사용하지 않는 리엔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왜 소파에 앉지 않는 거지. 어제는 딱딱한 의자에서도 잘만 잤으면서.

알고 보니 그녀는 소파를 자신이 사용하려고 가져온 건 줄 알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가져온 건데.

오해가 풀린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다행히 자신이 가져온 소파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흐물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귀여웠다.

하늘거리는 몸짓에, 퐁퐁거리기 위해 힘준 발끝 하나하나까지도.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녀의 표정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을 때 든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됐어. 내가 그걸 다시 봐서 뭐 해.”

실은 더 보고 싶었다.

자꾸만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에 카르시온은 그녀와의 대화를 그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어제 챙겨 왔던 담요를 꺼내 주며 잠이나 자라는 말을 했다.

리엔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착하다는 생각이라도 했는지, 그에 대한 소문이 허무맹랑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문을 들어 보니 없는 걸 지어낸 게 아니라, 있었던 사건을 축소시킨 수준이었다.

카르시온은 지금껏 자신의 소문에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들으니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둘러싼 소문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카데미에서 배정된 동아리 시간은 ‘매일’ 2시간 이상이었다.

그건 주말을 제외한 모든 날에 리엔을 볼 수밖에 없다는 뜻.

다른 사람이 쳤더라면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장난에 카르시온은 매일매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

일주일째였던가.

차마 그녀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지 못해 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며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녀에게서 진심 어린 사과가 돌아왔다.

“미안. 네가 그 정도로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네. 앞으로 다시는 놀리지 않을게.”

그토록 원한 약조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듣는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래서 홧김에 말해 버리고 말았다.

“장난이었어.”

“응?”

“이제 그만하라는 말. 장난이었다고. 네가 매일 놀리길래 나도 한번 해 본 말인데, 겨우 이런 거짓말에 속으면 어떡해?”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는 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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