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카르시온은 리엔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매일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카르시온은 이젠 놀림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엔의 죄책감 가득한 얼굴과 사과를 다시는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장난을 칠 때마다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동아리 시간이 될 때마다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최대한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미묘한 만남이 계속되다가, 동아리가 개설된 지 채 한 달이 안 됐을 때.
‘카르시온 얼굴이 착해서’라는 리엔의 한마디에 마침내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르시온은 그제야 자신이 했던 이상 행동들과 처음 느껴 보았던 감정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첫눈에 반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제 성격대로 행동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인정하는 것은 빨랐다.
카르시온은 리엔이 동아리실에 들어오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수십 수백 번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왔어?’라는 한마디를 꺼내기로 하고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리엔은 정해진 동아리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왔어?’만 되뇌던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피오르에게 물었다.
“피오르, 리엔이 왜 안 오지?”
초조한 표정의 카르시온을 보며 피오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얼씨구.
모든 동아리 시간을 통틀어 그가 리엔을 ‘야’, ‘너’라고 부르는 건 봤어도 이름으로 부르는 건 처음 봤다.
카르시온이 리엔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그녀가 동아리실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혼자 내적 친분이라도 쌓은 것 같은데?
“내가 아까 말해 준 사건, 오늘 있었던 일이잖아. 피곤해서 안 온 건가 보지.”
“총인원이 3명인 동아리에서 한 명은 늦게 오고 또 한 명은 한마디 말도 없이 오지 않은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피오르?”
“우리 둘 다 사정이 있었으니까.”
“너는 사정이 아니라 평소처럼 웃음이나 팔다 온 거겠지.”
“나라고 좋은 줄 아냐.”
피오르의 말에 카르시온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이야. 뭔데 갑자기 일어나?”
“나, 간다.”
“어디 가는데?”
“기숙사.”
“먼저 들어가려고?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자.”
피오르는 그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카르시온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반대했다.
“오지 마.”
“너 혼자 쓰는 방도 아닌데 오지 말라는 건 뭐야?”
“우리 방 말고. 리엔 보러 갈 거야.”
“리엔은 여자 기숙사에 있을 텐데?”
“거기에 갈 거야.”
피오르는 방금 들은 말이 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카르시온이 누굴 좋아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믿기질 않았는데. 이젠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금남의 구역에 발을 들이겠단다.
“너 미쳤어?”
미쳤냐는 말에 카르시온이 가볍게 시선을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네가 봐도 그런 것 같지? 내 생각도 그래.”
틀렸다.
카르시온의 눈은 이미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이미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피오르는 카르시온에게 딱 한마디를 남겼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만 마라.”
“당연하지.”
한없이 밝고 친절해 보였던 피오르도 정상 범주를 벗어난 성격이라는 것은, 아카데미 전체를 통틀어 카르시온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 *
리엔은 동아리실에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킨 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을 고민하지 않고 찾아갔다.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제 좁은 인간관계에서 그런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저기.”
“미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이야기하자. 오늘도 동아리에 늦으면 카르시온이 날 정말 반으로 쪼개 버릴지도 몰라.”
“나야, 피오르.”
피오르는 ‘나야.’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들려온 음성을 곱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낸 듯 그가 화사한 미소를 지어내며 자상하게 물었다.
“리엔이구나. 담요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어서 몰라봤네. 무슨 일이야? 동아리실에 같이 가면서 대화할까?”
사실 리엔은 피오르를 처음 만났을 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소개를 하는 피오르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저를 향한 감정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았으니까.
리엔이 그것을 눈치챈 것은 대화할 때마다 잠깐씩 스쳐 올라오는 그의 웃음기 없는 표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엔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쯤이야, 한두 번 본 게 아니니.
그런 피오르의 감정이 호의로 넘어왔다고 느끼게 된 것은, 동아리 모임이 정확히 이 주하고도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리엔은 평소와 같이 소파에 누워,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카르시온을 놀려댔다.
카르시온은 평소처럼 그에 당하고만 있었고.
리엔은 몰랐겠지만, 그날은 동아리 정정 기간이 지난 첫날이었다.
동아리 정정 기간이라는 것은 단지 카르시온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
피오르는 동아리실에 들어오자마자 세상이 떠나갈 듯 웃으며, 리엔을 향해 온갖 찬사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러고는 ‘나랑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아니, 친하게 지내 줘.’라며 리엔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그 후 피오르가 리엔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는 항상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리엔은 피오르가 카르시온이 놀림 받는 것을 굉장히 즐긴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피오르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은 다 가식이었다는 듯 카르시온과 눈만 마주치면 싸우기 바빴다.
물론 그 싸움은 모두 죄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엔에게는 여전히 친절했다.
사글사글하기로 소문난 피오르는 유독 카르시온한테만 가차 없었다.
‘그래, 저런 게 진정한 불x 친구지.’
리엔은 지금이라면 그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피오르에게 사건의 모든 것이 담긴 녹음구를 내밀며 부탁했다.
“피오르, 오늘 있었던 사건 하나만 아카데미 전체에 퍼트려 줄 수 있을까?”
이에 피오르는 리엔에게 사건을 전해 듣고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부탁을 아무도 모르게 해 달라는 말에, 카르시온도 모르게 해 주겠다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피오르에게 오늘 있었던 사건을 퍼뜨려 달라고 부탁한 것은 안전장치와도 같았다.
리엔에게 시비를 걸어 오던 학생들은 높은 확률로 퇴학을 면하지 못할 테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그녀는 일부러 소문을 냈다.
평소 알게 모르게 불만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이 사건에 분노하도록.
여론 선점은 어디서나 중요하지 않은가.
이로써 그들의 퇴학은 거의 확정이었다.
설사 권력이나 돈의 힘으로 아카데미에 남아 있더라도 눈치라는 게 있다면 그리 편한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나는 왜…….’
다시금 피어오르는 기억에 리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리엔은 발끝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자신은 그 흔하다는 친구 한 명 없었으니 조퇴한 걸 걱정해서 찾아온 사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뭔가를 통보하거나 알려 주러 온 사람일 게 뻔하지.
입학 온 몇 주 사이에 손님이라고는 그런 사람들 전부였으니까.
문까지 걸어가기 귀찮았던 리엔은 그냥 아무도 없는 척하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문 앞에 서 있을 사람이 아른거리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가요.”
리엔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 문을 열었고,
쾅-!
그리고 쾅 하고 닫아 버렸다.
리엔은 자신이 혹시나 기숙사를 잘못 찾아왔나 싶어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바라봤다.
아직 룸메이트가 없는 덕분에, 방 안의 물건은 모두 제 물건들이라 구분이 쉬웠다.
여기는 자신의 방이 맞다.
문을 열었을 때 본 것은 환상인가 생각이 든 리엔은 다시금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까 문을 열었을 때 봤던 곱슬곱슬한 벚꽃색 머리카락이 그대로 시야에 담겼다.
쾅.
리엔은 문을 다시 쾅 하고 닫아 버리고 눈을 빠르게 여러 번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에 취해 있던 정신이 확 깨 버렸다.
‘여기 여자 기숙사 아니야? 쟤가 왜 여기 있어?’
“리엔.”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리엔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 버렸다.
카르시온은 제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본 얼굴은 그가 확실했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두 번이나 잘못 봤을 리 없지 않은가.
리엔은 침을 한번 삼키고는 문손잡이를 돌려 아주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고는 경계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분홍 머리야?”
“응, 리엔.”
또 리엔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알아보려 작은 틈 사이로 몰래 그의 얼굴을 탐색하듯 훑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순간 그의 벽안이 그녀를 향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아니, 마주친 줄 알았다.
카르시온의 벽안이 리엔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다른 곳을 향했으니, 마주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리엔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카르시온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는지, 이 난감한 상황에 대한 한숨이었는지는 리엔 자신도 몰랐다.
‘카르시온이 여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을 들키면 골치 아파질 텐데.’
리엔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는 것보다 복도에서 누군가에게 들킬 것이 더 걱정됐다.
그녀는 작게 열어 놓았던 문을 활짝 열어 버리고는, 재빨리 카르시온의 손목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카르시온은 그런 리엔의 손길에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끌려 들어갔다.
문의 잠금까지 완벽히 끝낸 리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카르시온을 올려다봤다.
성격은 귀여운 주제에, 키는 안 어울리게 더럽게 컸다.
“분홍 머리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진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나 보다.
카르시온은 자신의 눈을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상하다.
이런 반응은 장난을 심하게 쳤을 때만 나오는 반응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