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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8)화 (8/161)

8화

“리엔. 소, 손부터 어떻게 좀.”

“손?”

아.

리엔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직도 제가 카르시온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스르륵 손에 힘을 빼고 뒤로 물리니 그에게 전해지고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이렇게 크게 와닿을 정도면 지금 그의 체온은 꽤 높은 상태인 것 같았다.

“미안. 널 급하게 숨겨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네가 스킨십을 싫어한다는 걸 깜빡했어.”

“…….”

카르시온은 리엔의 사과에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히 가려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푹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분홍 머리야, 화났어?”

리엔은 그가 화가 난 줄 알았지만, 사실 카르시온은 화난 게 아니었다.

그저 리엔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까지 왔는데, 막상 그녀를 앞에 두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어쩔 줄 몰랐을 뿐.

작은 문틈 사이로 리엔의 검은 눈동자를 잠시 마주쳤을 때부터 미친 듯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 손목을 잡고 이끌었을 때는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리엔의 행동 하나하나에 몸과 정신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방금 그녀가 자신을 만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 때는,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만지지도, 이름도 부르지 말라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않아.”

“응?”

“……지 않아.”

카르시온의 목소리는 힘없이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려 더욱 뜻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리엔이 카르시온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 다시 말해 줘.”

“싫지 않아……. 네가 나를 만지는 것도, 이름을 부르는 것도.”

카르시온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리엔은 당황한 듯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거리가 조금 멀어지고 나니 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붉어진 귓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분홍 머리라고 하지 말고, 카온이라고 불러 줘.”

* * *

카르시온의 떨리는 목소리는 진심을 담은 듯 애처로웠다. 그리고 나는 그의 목소리에 확신했다.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든 생각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였다.

뭐, 그래도 완전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카르시온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꽤 예쁜 외모라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말이다.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있듯 꼭 빠르게 반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카르시온과 내가 이어지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었다.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저렇게 잘생기고 순진한 아이가 날 좋아한다니. 누구라도 뿌듯할 것이다.

아까 당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나는 아직도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카르시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처음 그가 내게 손대지 말라고 소리쳤을 때처럼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손길 한 번에 그의 온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이름도 카르시온이 아니라, 애칭인 카온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귀엽기도 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만져도 싫지 않다는 거지, 카온?”

“……응.”

이왕이면 붉어진 얼굴도 같이 보고 싶은데.

“카온. 이제 손은 떼고 나랑 얼굴 보면서 대화하자.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

“내 얼굴 보는 게 싫어?”

그 말에 카르시온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절레절레가 아니라 도리도리였다는 거다.

정말 귀엽게 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움직여, 그의 손목을 붙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저 예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요망한 손을 뗄 수 있도록.

“쉬…… 착하지.”

내 노력 덕분일까 카르시온의 손이 내려가고 점차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붉어진 얼굴이 모두 드러나고 촉촉하게 젖어 있는 벽안이 나를 향했을 때,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키웠다.

순간, 방금까지 수줍은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어……. 싸늘한 표정?

카르시온의 흉흉한 표정에 너무 강제적으로 굴었나 생각이 들 찰나.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엔. 울었었어?”

“……아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두 눈이 부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아닌 척 그에게 거짓말했다.

카르시온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울었다는 것을 아는 게 싫었다.

그래서 동아리실에 있던 담요를 얼굴에 칭칭 감고 기숙사까지 왔던 건데.

이미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려나.

“리엔. 오늘 있었던 사건 때문에 그래?”

“그런 거로 내가 왜 울어.”

카르시온도 그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피오르가 내 부탁을 잘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까득.

카르시온이 이를 갈았다. 그는 화를 참듯 흉흉한 얼굴로 입술을 짓이기고 있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그 자식들 때문에 운 거 맞ㅈ……!”

나는 한껏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내 손길에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금방 풀려 버린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인상 찌푸리지 마. 못생겨진다.”

아. 내가 말했지만, 너무 어불성설이었다. 저 얼굴에 못생겨질 부분이 어디 있어.

“……언제는 잘생겼다며.”

“내가 언제.”

나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었나.

의문 어린 얼굴로 카르시온을 바라보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 모양인지 금세 또 얼굴이 붉어진다.

저렇게 자주 붉어져도 괜찮은 걸까.

카르시온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중대사를 묻듯 입을 뗐다.

“리엔. 너는 우리 동아리에 왜 들어왔어?”

“동아리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는 네가 안쓰러워서.”

그는 내 말을 듣고 난 후 대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도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해 줬는데.

무슨 말이 듣고 싶었길래.

“그것보다 이제 말해 봐, 카온. 금남의 구역인 이곳까지 날 찾아올 정도면 무슨 큰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일 거 아냐.”

“어……?”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 그냥 날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

음. 귀엽긴 하지만 이건 좀 괘씸하다. 나중에는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오겠네.

“설마 고작 오늘 있었던 사건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어떤 큰일이길래 그래?”

“…….”

“응?”

“가, 갑자기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해야 할 일?”

“미안, 너무 급한 일이라 대화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내일 동아리 시간에 대화하자 리엔.”

카르시온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허둥지둥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도망가기 전 문밖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는 하는 말이…….

“오늘 일었던 일은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방금까지 카르시온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내뱉었다.

이미 해결된 일을 네가 뭘 어떻게 더 해결할 건데.

* * *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동아리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번쩍 눈을 떴다.

“카온, 손에 든 그거.”

흠칫.

뒷짐을 진 채 내게 다가오고 있던 카르시온이 얼음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멈췄다.

“또 나한테 뭔가 주려고 가져온 건 아니지?”

“아냐. 나 아무것도 안 들고 있었어, 리엔.”

그는 서둘러 뒤로 숨기고 있던 양손을 내보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카르시온 뒤에 잠깐 생성된 아공간을 본 후였다.

……저렇게 열심히 주장하는데 그냥 모르는 척해 줘야겠다.

“그럼 다행이고.”

내가 다시 눈을 감자, 지척에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휴.”

바보야. 다 들려.

카르시온은 나를 보기 위해 여자 기숙사에 잠입한 이후, 매일같이 내게 줄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가 가져온 담요만 해도 벌써 다섯 개가 넘어갔다.

바다에 사는 해달은 ‘나를 해치지 말고 예뻐해 주세요.’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조개를 선물로 준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은데.

물론 내가 카르시온을 해칠 일은 없었으니, 예뻐해 달라는 의미겠지.

게다가 그는 매일 선물을 가져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에 까칠함이 싹 사라졌다. 말을 할 때도 한마디 한마디에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

이건 내가 진짜 카르시온을 해치기라도 할 것 같은 반응 아냐?

내가 뭘 했다고. 이건 좀 억울하다.

“카온.”

“으응?!”

뭘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라.

나는 감고 있었던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렸다.

내 가방에 몰래 손을 넣고 있는 카르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한껏 당황한 얼굴이다.

“내 가방에 훔쳐 갈 거 없는데.”

“그, 그게 아니라…….”

카르시온은 눈을 질끈 감으며, 가방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의 손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리엔. 오늘까지만 받아 주면 안 돼……?”

“…….”

다른 사람이 꺾어 왔다면 분명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저 순수하고 예쁜 얼굴을 보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까지만이야. 다음에는 내게 주겠다는 이유로 굳이 멀쩡한 나무를 훼손시키지 마.”

받아 준다는 의미와 다름없는 말에 카르시온이 제 머리 색과 비슷한 벚꽃을 들고 배시시 웃었다.

“명심할게. 그리고…… 받아 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선물을 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말 아닐까.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굴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가뜩이나 이 험난한 세상을.

“아카데미에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카온.”

퇴학 사건 이후 더더욱 말이야.

아. 그때의 사건을 퇴학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퇴학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교수 중 인맥이 있었는지, 퇴학은 무마되고 징계로 가볍게 처리되려는 낌새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짐을 싸고 아카데미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사건의 전말이 담긴 녹음 파일이 돌아다니고, 아카데미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았던 이사장까지 무슨 연유에서인지 발 벗고 나선 탓이었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후에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자의 가문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금광으로 유명하다고 했던 이엘…… 뭐시기 자작가는 금광에 폭탄 테러를 당해서 굴이 무너져 버렸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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