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들에게 나쁜 일이 생긴 건, 손뼉 치며 축하해 주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내게 안 좋은 소문이 생겨 버렸다.
나를 건드리면 집안에 재환이 든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안 그래도 친구가 없었는데, 그 소문 때문에 이제는 호기심에 가끔 말을 걸어 오던 사람조차 없어졌다.
“나도 있잖아, 리엔.”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나는 생각하던 것을 몰아넣었다.
음성의 주인인 피오르를 바라보니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뿌듯한 얼굴이다.
그래 너도 있었구나.
“고오맙다.”
내 성의 없는 감사 인사에 카르시온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피오르를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꼭 좋아하는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넌 필요 없으니까 꺼ㅈ…… 가 아니라, 얌전히 구석에 박혀 있어.”
“뭐야. 갑자기 왜 시비야.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넌 한 게 없으니, 리엔에게 네 존재는 개미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수준이지.”
카르시온의 도발에 피오르도 조금 화가 났는지 그 유치한 말을 똑같은 유치함으로 받아쳤다.
“너야말로 리엔에게 필요도 없는 물건만 선물하기나 했지, 실질적으로 해 준 게 뭐가 있어? 사실 리엔도 널 162번째 머리카락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걸?”
“내가 162번째면 넌 만 번째쯤 되겠지.”
“그럼 너는 십만 번째.”
카르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는 천만 번째.”
“일억 번째.”
“일 조.”
“경.”
“해.”
“둘 다 그만!”
나는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숫자만큼 유치해지고 있는 싸움을 중재했다.
애초에 사람 머리에 그렇게 많은 머리카락이 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무한대.”
그만하라니까, 피오르 저 자식이.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도대체 순서가 뭐가 중요하다고 이 난리야?”
“중요해.”
카르시온이었다.
“내게는 중요한 문제야, 리엔.”
카르시온은 내 앞에서 수줍어하거나 웃는 모습만 보여 왔기에 저런 진지한 표정은 조금 낯설었다.
왜 또 별거 아닌 말에 진지해지고 난리인지.
“리엔. 나는 너에게 뭐야?”
나는 카르시온의 벽안을 마주하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뭐긴 뭐야. [{(‘친구’)}] 지.”
“……쓸데없는 강조가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카르시온이 굉장히 시무룩해진 얼굴로 눈썹을 내리깔았다.
“질문을 바꿀게. 너에게 난 몇 번째야?”
썩 기대할 만한 순위는 아닐 텐데.
이런 말에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건 나만 손해다. 장난 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가야 했다.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내 27번째 속눈썹과 비슷한 순위가 아닐까?”
“뭐?”
카르시온은 충격에 휩싸인 듯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어버버 거리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내가 말한 게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이야, 리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정말 이상하게도 카르시온의 양 뺨이 서서히 분홍빛 홍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그가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수줍게 웃었다.
이걸 기뻐한다고……?
심지어 27번째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 ‘27번째 속눈썹’과 비슷한 순위면 존재감조차 없는 건데?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나는 쟤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뜻으로 방금까지 카르시온과 싸우고 있던 피오르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피오르는 카르시온을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 내 눈짓을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보니 그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게 선명히 보인다.
충격받은 너를 앞장세우려 했다니, 미안해 피오르.
근데 나름 귀엽지 않았나. 저렇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까지야.
나는 장난스럽게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는 거야, 카온? 방금 내가 말한 건 누가 봐도 장난이었잖아.”
“으응?”
카르시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저것 봐. 얼마나 귀여워.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서비스로 입에 발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친구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카르시온과 피오르가 전부였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카르시온이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뭐지. 이건 또 생각지 못했던 반응인데.
“친구보다는 음. 그, 그…….”
설마.
“친구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지?”
“아니! 너랑 사귀고 싶다거나, 너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나도 안 했어!”
사귀는 건 둘째 치더라도 결혼은 너무 간 것 같은데……?
하지만 곧 나는 당황을 지워 내고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그려 내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너희들밖에 없는 거 알잖아. 계속 내 친구가 되어 줄 거지, 카온?”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말처럼 포장했지만, 선을 긋는 말이었다.
카르시온이 내가 선을 그었다는 것을 읽어 내고 표정을 굳혔다.
“……다른 친구를 만들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아무도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걸.”
“곧 생길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나는 부정하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르시온의 저 뇌까림이 사실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나는 그 느낌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정규 수업과 동아리 활동을 끝낸 후 기숙사에 들어왔더니 누군가 짐을 풀고 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기숙사가 2인 1실이라 언젠가는 룸메이트가 생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생길 줄은 몰랐다. 학기 중에 신입생이랑 전학생은 받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새로 들어온 게 아니라 방만 바뀐 건가?
“맙소사! 생각보다 더 사랑스럽잖아?”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발견하자마자 나의 두 손을 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만에 십년지기 친구를 만난 듯한 태도였다.
그녀의 짧은 밀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꺄! 진짜 너무 예쁘세요!”
“……누구?”
“앗!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룸메이트가 된 제인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내 인사를 듣더니 눈을 크게 뜨며 잡은 손을 놓고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앗, 말 편하게 하세요!”
“제인도 말을 놓으면 편하게 할게요.”
“제가 어떻게 감히!”
“감히?”
“그, 그게……. 그러니까 처음 보는 분에게 반말하기도 그렇고, 제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 하하.”
날 처음 보자마자 손을 잡고 방방 뛴 사람이 낯을 가려……?
말의 앞뒤가 조금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좋든 싫든 꽤 오랫동안 같이 지내야 할 테니까.
“계속 존대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같이 계속 존대할래요.”
“그, 그런.”
“앞으로 계속 지낼 건데, 반말이 편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반말이 더 친근해 보이기도 하고.”
“헙.”
그녀는 반말이 더 친근해 보인다는 말에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마치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속을 보여 주는 듯했다.
“아마 친해지기도 더 쉽겠죠.”
“나도 사실 처음부터 반말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리엔.”
제인은 마지막 한마디에 카운터를 맞은 듯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아무래도 귀가 좀 얇은 사람인 것 같다.
가만, 내가 이름을 알려 준 적 있었나?
아. 명찰을 본 건가.
나는 생각 난 김에 제인이 입고 있는 옷을 슬쩍 봤다.
명찰은 이름 말고도 색으로 학년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인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 몇 학년인지 모르겠다.
“이건 혹시 실례일 수도 있는데, 제인 너는 몇 학년이야?”
“실례라니 무슨. 나도 너와 같은 시니어 1학년이야.”
“그래? 나랑 같은 학년이었구나.”
성숙해 보여서 당연히 나보다 높은 학년일 줄 알았다.
나는 멋쩍은 마음에 괜히 볼을 긁적였다.
제인은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챈 듯했다.
“시니어 1학기까지 다니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잠시 휴학했어. 그런데 이번에 좋은 기회로 다시 복학할 수 있게 됐지 뭐야? 그래서 나이는 너보다 두 살 더 많아.”
“좋은 기회?”
“그건 비밀!”
제인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며 빙그레 웃었다.
“학기가 시작한 지 꽤 지나서 늦은 줄 알았는데, 나는 이미 1학기를 다녀서 그런지 허가가 나더라고. 개학하고 몇 주간 다니지 못한 것은 전에 다닌 것으로 대체된다고 했어.”
“아하.”
“리엔 네가 어쩌다가 그런…….”
제인은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벌린 채 눈을 요리조리 굴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을 잘못 꺼냈다는 표정이다.
“……것에 걸리게 된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런 게 뭔데?”
“아, 아무것도 아냐.”
“혹시 나를 건드리면 집안에 재환이 든다는 소문을 들은 거야?”
“뭐? 그런 개소리를 누가 믿어?”
“모두가 믿는 눈치던데.”
“리엔. 걔들은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건드려선 안 될 무언가를 건드렸던 거야. 넌 아무 잘못 없어.”
말하는 것을 보니, 제인은 나를 둘러싼 사건과 소문을 들은 것 같았다. 이제 막 기숙사에 들어왔는데 언제 또 그것들을 들은 걸까.
하지만 결국 내 편을 들어줬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만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응.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제인.”
* * *
이른 아침부터 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깼다. 나는 느릿하게 하품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룸메이트가 생긴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어, 리엔 일어났어? 미안해. 조금 시끄러웠지?”
“괜찮아. 어차피 주말은 종일 잠만 자니까.”
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이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굉장히 부지런하다.
자고로 주말에는 오후에 일어나야 하는 법이거늘.
그렇게 생각하며 제인을 바라봤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뭘 하고 있는,
“……음. 어, 두목님?”
“응, 리엔!”
그녀의 해맑은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두 눈에 담긴 제인은, 어제 봤던 제인이 아니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마주칠 만한 사람이었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조직으로 복귀하시는 겁니까,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