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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0)화 (10/161)

10화

“아이참. 그렇게 칭찬해 주면 쑥스러워, 리엔.”

칭찬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흘기며 느낀 그대로의 감상을 칭찬인 듯 입에 담았다.

“음. 제인은 분장을 잘하네.”

그러자 제인이 꺄르륵 웃는다. 지금의 얼굴과 굉장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분장이 아니라 화장이겠지, 리엔!”

“그래서 오늘 분장…… 아니, 화장한 이유는 뭐야? 환불?”

어제는 분명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는데.

말괄량이에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이 단숨에 두목님으로 변해 버렸다.

화장한 얼굴이 못난 것은 아니었다. 예뻤다.

예뻤는데, 단지 그 얼굴이 같은 반 학생 몇몇을 그녀의 발닦개로 전직시킬 수 있을 만한 얼굴이었다는 거지.

제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간 ‘지갑을 어디에 놨었지’ 하는 생각이 든 게 괜히 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환불이 목적이었으면 더 세게 했겠지. 오늘은 적당한 전투력이 필요한 날이거든!”

저것보다 강하게 할 수도 있다고? 게다가 전투력이라니. 제인은 정말 어디 패싸움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전……투력?”

“사실 급하게 아카데미로 오는 바람에 사야 할 게 꽤 많아. 그래서 오늘은 상점가에 가서 여러 가지를 구매할 생각이야.”

설명을 들었지만, 아직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대체 물건을 사는데 왜 전투력이 필요하다는 건지.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제인이 씩 웃었다.

“아하. 리엔은 아카데미 주변 상점가에서 뭐 사 본 적 없구나?”

“어떻게 알았어?”

그녀 말대로였다.

나는 이곳에 올 때 워낙 철저히 준비를 해 와서 아직 상점가에 갈 필요가 없었다.

워낙 침대에 붙어 있는 걸 좋아하는 탓에 구경 가 볼 생각도 해 본 적 없고.

제인이 양손을 허리에 단단히 얹었다.

“안 되겠다.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을 그냥 둘 순 없지. 준비해, 리엔. 같이 나가자!”

“……엑?”

* * *

제인의 손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 나온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제인의 큰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주변 상가는 호구 잡히기 쉬운 곳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카데미의 귀족 자제들이 평민인 척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이곳에 혼자 왔다면 바가지를 썼을 확률이 높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는 이렇게 호위 없이 상가에 나와 본 것도 처음이었으니.

어쩐지 신기한 마음에 제인과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제인은 복학생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이곳 지리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은 보이는 빵집과 디저트 가게마다 여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의아할 정도로 줄이 길었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저마다 예쁘게 포장된 쿠키를 손에 들고 나왔다. 여기 주변이 쿠키로 유명했나 생각할 무렵.

제인이 왠지 모르게 흥분한 얼굴로 물어왔다.

“리엔, 너도 사 가려고?”

“이왕 나온 김에 그럴까?”

“좋은 생각이야!”

그녀는 정말 기쁜 소식을 들은 듯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가지 않는다고 하면 내 지갑을 앗아 가서라도 사 올 기세였다.

쿠키가 그렇게 좋은가?

결국, 나는 두고두고 먹을 만한 양의 쿠키를 샀다. 제인이 먹고 싶을 때 부담 갖지 않고 먹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돈은 항상 신세를 지고 있는 이모가 과할 정도로 주고 계시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종일 쇼핑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제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리엔.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을까?”

“……뭔데?”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돼?”

진지하게 묻고 싶은 질문이라고 해서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제인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인 것 같다.

“진지하게 묻고 싶다는 게 겨우 그거야?”

“아니. 이건 내게 정말 중요한 질문이야.”

“내 이상형은…….”

중요한 질문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제인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심지어 긴장한 듯 침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이게 뭐라고.

나는 내 이상형이 뭘까 생각하다가 카르시온의 얼굴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 갔다.

“착한 남자.”

“어? 그, 그렇구나.”

“그것도 그냥 착하면 안 되고, 정말 정말 착해야 해.”

얼굴이.

제인의 표정이 사형 선고를 들은 듯 사색이 되었다.

“……조, 좀 많이 힘들겠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착한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형이잖아? 실제로는 그런 사람과 이루어지긴 힘들겠지.”

“하.하.하. 맞아! 어떻게 이상형이랑 이루어질 수 있겠어, 어림도 없지! 게다가 네가 말하는 정말 정말 착한 사람은 인기가 많아서 더욱 힘들걸?”

당황하며 어색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이 어쩐지 내게 하는 충고로 들려왔다.

제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인정하며 넘어갔을 말에 작은 반발심이 들었다.

“노력하면 짧게 연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이상형이 날 좋아할 수도 있잖아.”

“뭐? 그게 누군데!”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제인은 마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흥분했다.

혹시 나한테 반했나……? 어쩌지 난 남자가 좋은데.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리엔, 너랑 같은 동아리라고 했던 피오르라는 애는 어떻게 생각해?”

“피오르? 확실히 피오르는 음. 착하지.”

제인은 내 말을 듣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경악 어린 표정이었다.

이제 알겠다. 제인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피오르는 친구일 뿐이야, 제인.”

“…….”

“진짜로.”

제인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전혀 아니었다.

“피오르가 널 좋아하고 있는 거구나……!”

아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후 나는 제인의 오해를 풀어 보려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결국 풀려 했던 오해는 풀지 못하고 그녀의 체념 어린 말만 들었다.

“……그래, 아직 네가 피오르를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지.”

이젠 나도 제인의 오해를 푸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피오르에게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그녀 혼자 오해하고 있는 사실인데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 * *

큰일 났다.

사실 사건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오늘 내 하루를 되돌아보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하루하고 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제인과 같은 반에 배정됐기 때문이다.

이제 점심을 그녀와 같이 먹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더 이상 혼자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됐다. 전공 수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만족스러운 교과 시간을 보내고, 어김없이 푹신한 소파에서 낮잠 시간을 가지려 동아리실에 들어 왔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동아리실은 내가 며칠 전에 왔었던 그 동아리실이 아니었다.

동아리실에 몇 개 있지 않았던 책상과 의자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고,

카르시온의 마법 서적들은 어느 한 곳이 불타 있거나 찢겨 있어 성한 곳 하나 없었으며, 피오르가 가져온 체스판과 카드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거 완전 난장판이잖아.

불현듯 다른 것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소파의 안위를 확인했다.

맙소사. 내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소파와 그의 영원한 친구 담요가 온데간데없어져 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현실에, 들고 있던 책 몇 권을 후드득 떨궜다.

파국이다.

여러 권의 책이 떨어지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대치하고 있던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리엔!”

“……너희 싸웠어?”

“카르시온 저 자식이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들었는지 머리가 홱 돌아서는!”

피오르의 절규 섞인 외침에 카르시온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냈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화난,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나 화 안 났으니까, 솔직히 말해.”

“어딜 봐야 화가 안 난 걸 알 수 있는 건데! 그리고 진짜 아니라니까!”

저 둘의 대화로 추측건대, 카르시온이 그를 추궁하다가 동아리실이 이렇게 된 것 같다. 피오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카온, 피오르. 둘이 왜 싸웠는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동아리실이 이렇게 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리엔. 나는 비폭력 주의자라 피오르에게 손 한번 댄 적 없어.”

카르시온의 순박한 눈망울이 결백함을 주장하듯 옅게 일렁였다.

그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표정이든 말에서든 티가 많이 났다. 그런데 지금 저 얼굴은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인다.

그럼 동아리실이 이렇게 된 건 전부 피오르가?

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놀란 얼굴로 피오르를 바라보자, 그는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내게 호소했다.

“설마 카르시온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쟤는 비폭력 주의자가 아니라 be폭력 주의자고, 내게 손 한번 댄 적 없다는 건 마법을 난사해서 그런 거라고!”

비폭력 주의자가 아니라 비폭력 주의자라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어찌 됐든 싸운 건 맞다는 거지? 너희 사이의 일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고, 싸우려면 둘이 같은 기숙사니까 거기서 싸워. 지금은 엉망 된 동아리실이나 치우고.”

내 한숨 섞인 어조에 카르시온이 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피오르는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고.

“둘 다 할 말 있어?”

“리엔. 소파와 담요는 무사하니까 화 풀어. 응?”

소파와 담요가 무사하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니 화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잔해조차 안 보이더라. 그래, 그것들만 무사하면 됐다.

풀어지는 내 미간에, 카르시온이 용기를 얻었는지 주뼛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내 질문에 하나만 대답해 주면 네 말대로 얌전히 동아리실도 치울게.”

“뭔데?”

카르시온은 땅에 시선을 두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너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해?”

“……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피오르를 바라보니 그가 다급하게 ‘그렇다고 해! 그렇다고!’라는 입 모양을 만들어 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카르시온은 확실히 착했다.

“카온 너는 누가 봐도 착하지.”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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