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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2)화 (12/161)

12화

제인과 점심을 먹고 함께 반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극히 심도 있고 무게 있는 주제의 토론을 하며.

“에엑! 리엔 너는 토 맛 토마토가 낫다고?”

“응. 너야말로 토마토 맛 토가 낫다니. 좀 충격이다.”

“생각해 봐, 리엔. 토 맛을 무슨 맛으로 먹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래도 비주얼이 멀쩡한 게 먹을 만할 것 같아서.”

“맛만 좋으면 다 아닐까? 그와 같은 이치로 사람도…….”

“뭐?”

“아, 아니 말실수.”

제인이 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으며 손사래를 쳤다. 상황을 모면하려는 눈치다.

하지만 이미 다 들어 버린걸.

나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으응?”

그러고는 벙찐 제인을 뒤로하고 걸음을 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같이 가, 리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동아리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었는데.

아, 물론 안 한 게 아니라 대화할 친구가 없어서 못 한 것이었다.

내 학교생활의 만족도는 제인이 학교에 온 것을 기점으로 수직 상승했다. 같이 대화해 줄 친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생긴 큰 변화였다.

그렇게 산뜻한 기분을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걷고 있을 때. 불현듯 눈앞에 분홍색 무언가가 훅하고 나타났다.

“리엔, 안녕!”

분홍색 무언가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모습을 드러낸 카르시온이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온 카르시온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고.

그런데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을까. 기숙사에 찾아왔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이렇게 따로 찾아온 적은 없었는데.

“그래 안녕.”

“응!”

“…….”

카르시온은 그게 다라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뭐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러자 카르시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어, 혹시, 음.”

저 말을 한 지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슬슬 옆에 있는 제인에게도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뭐.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시간 뺏어서 미안해!”

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카르시온은 화들짝 놀라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놀란 표정이라니. 꼭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팔짱을 끼며 그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서 제인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을 걸어 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리엔?”

“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니, 그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쉰다.

“아냐. 아무것도.”

“싱겁긴.”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반에 거의 도착했을 때 즈음.

“리엔!”

이번에는 피오르였다.

피오르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입을 뗀다.

“시간이 없어서 본론만 말할게! 너 오늘 쿠키 가져왔어?”

쿠키는 있는데, 너한테 줄 쿠키는 없지 뭐야.

“아니.”

“그래? 그럼 이거 받아!”

그러자 피오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 품에 안겨 줬다.

“이게 뭐…….”

“참고로 이건 선물 받은 거 아니고 내가 직접 돈 주고 사 온 거니까, 괜히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네가 동아리 시간에 이걸 꼭 가져와 줬으면 하는데, 내 부탁 들어줄 거지? 그 성격 파탄자 카르시온한테 직접 주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나는 걔한테 시달리고 싶지 않다고.”

황당한 나머지 이게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 피오르가 우다다 말을 쏟아 냈다.

아무래도 내가 카르시온에게 쿠키를 주지 않으면 그가 실망할까 봐 대신 사다 준 모양인데…….

그리고 피오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멀리서 단체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였다.

“저기 있다, 피오르!”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피오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했다.

“윽, 벌써?”

피오르의 뒤쪽으로 수많은 여학생 무리가 전투적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중간중간 남학생 몇몇도 보인다.

피오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부탁한다는 얼굴로 비장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그러고는 피오르는 장렬하게 여학생 무리에게로 다가가 그들과 격돌했다.

그리고 질색했던 표정을 싹 지워 내고는 다정한 미소를 걸친 채 한 명 한 명의 쿠키를 받아 주는 피오르.

굉장한 광경에 나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인기 많네.”

“얼굴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게다가 다들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가문도 명망 있는 후작가니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잖아?”

피오르는 후작가 영식이었구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제인을 바라봤다.

“오히려 더 인기 있을 것 같은 카온은 여유로워 보이던데? 피오르와 달리 텔레포트로 도망 다녀서 그런가.”

“카르시온은…….”

제인은 한참 동안 눈을 굴리며 말을 고르다가 겨우 입을 뗐다.

“몇 년 전에 많이 화냈다나 봐. 이런 거 가져오지 말라고.”

“그래?”

하긴 저렇게 전투적으로 쫓아다니면 신물 날 만했겠다.

그래도 한 번 화를 낸 이후로는 괜찮은가 보네.

피오르가 준 쿠키를 가져가면 아무리 내가 준 쿠키라고 해도 싫어하는 거 아닌지 몰라.

딱히 줄 생각도 없었으니 괜한 걱정이겠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 * *

“리엔 오늘도 힘내고! 꼭 살아서 기숙사에서 만나자!”

“으응. 제인도 힘내.”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제인의 응원을 들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인은 그녀의 전공과목인 의상 디자인부에서 운영하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랜덤 동아리 배정이 아닌, 복학 전에 속해 있던 동아리에 복귀 처리가 된 모양이었다.

동아리 시간에는 나와 헤어져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제인은 매 동아리 시간이 될 때마다 내가 꼭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처럼 인사했다는 것.

정말 독특하다니까.

나는 총총거리며 사라져 가는 제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바로 하고 동아리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오는 벚꽃색 머리.

“……카르시온?”

“리엔!”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양팔을 벌리며 내 앞에 섰다.

나는 잠시 그의 행위에 의문을 느끼다가 문 앞에 서 있던 몸을 슬쩍 비켜 줬다.

“어딜 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다녀와.”

“어디 가려는 게 아니야. 널 기다리고 있었어.”

“응. 그렇구나.”

나는 그가 벌린 팔 밑으로 몸을 숙여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가방을 한쪽에 내려 두고 담요를 고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담요를 덮을까.

하늘색 모포? 아니야. 오늘은 분홍색 극세사 담요가 끌린다.

좋아. 이거로 간다.

“저기…….”

비장한 마음으로 오늘의 담요를 결정했을 때,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 달리 퍽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응.”

“리엔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나는 분홍색 극세사 담요를 집어 들고는 아직 문가에 서 있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어. 자세히 보니 뭔가 달랐다. 눈가는 유독 붉었고, 눈동자는 촉촉했다.

꼭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그 얼굴을 보니 양심이 콕콕 찔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모르는 척한 것뿐이지.

생각해 보면 내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이 담요도 모두 카르시온이 준 것이었다.

“난 몰랐는데 오늘이 쿠키 데이라고 하더라.”

왠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내뱉은 말이었다. 변명 같긴 해도 거짓말은 아니니 괜찮다고, 나는 혼자 합리화했다.

“어? 아……. 몰랐었어?”

카르시온은 어쩐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으으으.

“알고 있었어도 안 가져왔을 거야. 일주일간 교내에 과자류 가져오는 거 금지라고 했잖아.”

“그렇구나…….”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나는 애써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소파에 누웠다. 그러고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계속 카르시온의 촉촉한 눈가가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시무룩한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귀에 재생됐다.

도무지 오지 않는 잠에, 슬며시 담요를 끌어 내렸다.

동아리실 안이 너무 조용하니 괜히 궁금해졌다.

잠시 카르시온이 뭘 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거야…….

그렇게 시야에 담긴 카르시온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가방을 놓았던 곳으로 걸어가 빠르게 가방을 열어젖혔다.

“……리엔?”

카르시온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왔지만, 답해 주지 않고 묵묵히 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고이 모셔 놨던 쿠키 봉지를 꺼냈다.

피오르가 줬던 쿠키가 아니라, 내가 내 돈을 주고 직접 사 온 그 쿠키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르시온에게 척척 걸어갔다.

“오해하지 말고 받아. 이건 우정 쿠키야. 우.정.쿠.키!”

우정 쿠키라는 것을 강조하며 카르시온의 손에 쿠키 봉지를 쥐여 주자,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키웠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너무 좋아하지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우정 쿠키일 뿐이니까.”

“하지만 아까 쿠키 데이인 줄 몰랐다고…….”

“오다 주웠어.”

말도 안 되는 변명임에도 카르시온은 눈을 반달로 휘며 배시시 웃었다. 그가 쿠키 봉지를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고마워.”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고작 쿠키 하나가 뭐라고.

내가 괜히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 동아리실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동아리실에 들어온 피오르는 끌기도 벅차 보이는 큰 포대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와, 피오르. 그거 다 받은 거야?”

내 탄성에 피오르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카르시온에게 직접 못 주니,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것도 많아.”

“나한테 떠넘길 생각하지 말고 네가 받은 건 다 네가 처리해라.”

카르시온의 빛보다 빠른 거절에 피오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혼자 이걸 언제 다 버리라고. 좀 도와줘.”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뭘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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