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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화 (14/161)

14화

“아오, 진짜!”

나는 덮고 있던 담요를 발로 뻥뻥 차올렸다.

그러자 내가 누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던 카르시온이 황급히 나를 바라봤다.

놀란 건지, 걱정되는 건지 눈이 커져 있다.

“리엔.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다리가 저려와서.”

사실 담요를 뻥뻥 찬 것은 내가 조장에 당첨된 후, 조원들이 보였던 태도 때문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기쁨을 토해 내는 조원들. 누가 보면 벌써 과제를 끝낸 줄 알았을 거다.

아니면 사다리 타기로 조장을 뽑는 게 아니라 조별 과제 몰빵 내기를 한 줄 알거나.

심지어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던 말하는 감자도, 나를 보며 고소하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안 되겠다. 오늘 저녁은 감자 요리다.

떠오르는 기억에 저녁 메뉴를 감자 요리로 확정 지을 즈음,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해. 많이 아파? 내가 다리 주물러 줄까?”

“뭐?”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카르시온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지 깨달은 듯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포함한 몸 전체가 새빨갛게 변한다.

“미안! 불순한 의도는 아니었어! 나는 그저 걱정되는 마음에!”

“지x 염x 한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저 상스러운 욕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피오르였다.

그는 흡사 꿈틀거리는 장구벌레를 보는 눈빛으로 카르시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극히 혐오스럽다는 표정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가는 것은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나는 피오르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짓궂은 웃음을 지어냈다.

“내 다리를 주물러 준다고? 와, 대체 얼마나 고단수인 거야 카온?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어.”

“뭐? 그런 거 아니야아…….”

“다리를 주물러 주는 척하면서 뭘 하려고 했는데? 육하원칙을 따져서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을까?”

“육하원칙 따질 것도 없이 나는 그냥……!”

“카온. 순진한 줄만 알았더니 속은 완전 음흉하구나?”

“아니라니까아……!”

“어휴, 앞으로 말조심해야겠다. 카온이 언제 수작 부릴지 모르니까.”

그는 결국 울상을 지으며 손을 얼굴에 묻었다.

“리엔…….”

나는 한참 동안 부끄럼타는 카르시온을 놀렸다. 이제는 일과처럼 굳어 버린 일이라 그를 놀리는 것은 퍽 익숙했다.

만족할 만큼 그를 놀린 후, 나는 그의 숨통을 트여 주기 위해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것보다 요즘 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내 한숨 섞인 어조에, 카르시온이 놀라울 정도로 빠른 표정 변화를 보였다. 방금까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슨 소문?”

“네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소문.”

잠시 정적이 흘렀다.

“리엔은…….”

카르시온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소문이 기분 나빠?”

조심스러운 어조가,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말처럼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생각하면 피곤했다.

차라리 내가 카르시온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면 걱정하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말해 주려 입술을 달싹였다.

한 치의 고민 없이 말했을 것이다. 카르시온의 촉촉해진 눈동자를 발견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우는 사람에게 유독 약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약해 보여서. 툭 하면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아서.

어쩌면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절망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과거의 내가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달싹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순전히 그의 울음을 막기 위한 말이었다.

“나보다는 네 혼삿길 막힐까 봐 걱정이지.”

그의 혼삿길, 내가 알게 뭔가.

알아서 좋은 가문의 어여쁜 영애와 결혼해서 잘만 살 텐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시온은 내 말에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활짝 미소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가 기분 나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나는 나중에 어차피 너랑…….”

똑똑.

카르시온이 방긋 웃으며 말을 잇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시온과 내 시선이 자연스레 피오르에게 향한다. 그러자 피오르가 움찔거리며 입술을 비죽였다.

“왜 둘 다 나를 봐?”

“그야 당연히 너를 찾아온 사람일 게 뻔하잖아, 피오르.”

“알아서 잘 쳐냈어야지 왜 맨날 누군가 문을 두드리게 만들어? 너 때문에 리엔이 잠에서 깬 게 한두 번이냐?”

나와 카르시온이 동시에 피오르를 타박했다.

피오르는 높은 친화력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굉장한 인기를 구가했다. 누구와는 다르게 인망이 좋다는 것.

그런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하, 피오르. 내가 동아리에 네 친구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어쩐다고 했는지 기억하지?”

“나도 몇 번이나 동아리실에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그리고 너나 리엔 찾아온 사람일 수도 있지 왜 나한테만 그러냐?”

억울하다는 피오르의 외침에 카르시온이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아주 당당한 걸 보니, 우리 피오르가 내 경고를 귓등으로 들었나 보다. 그래, 유병장수가 그렇게 꿈이라면 들어 줘야지.”

똑똑.

“……저기. 리엔 찾으러 왔는데요.”

카르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다시금 노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가 진행 중인 듯한 남학생의 목소리에 카르시온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는 순식간에 문 앞으로 이동해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너, 누구야.”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려 있었다. 나나 피오르를 대할 때와는 격이 다른, 차가운 어조였다. 퍽 낯선 모습.

……질투인가?

카르시온과 눈을 마주친 아이가 별안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란 듯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찾아온 사람이 나와 같은 조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카온, 잠시만. 약초학 조별 과제 때문에 날 찾아온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카르시온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나와 보라는 뜻이었다.

카르시온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리를 비켜 줬다.

“여긴 왜 왔어? 모임은 동아리 시간 끝난 후 갖기로 하지 않았어?”

왜 왔냐는 물음에, 혼이 반쯤 나가 있던 남자아이는 슬쩍 내 뒤에 있는 카르시온의 눈치를 봤다.

“히익.”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거의 교복 바지로 바닥을 닦는 수준이었다.

뭐야. 왜 저래.

의아함에 휙 고개를 돌려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가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을 껌뻑이며 나와 눈을 맞춘다.

“응? 리엔 왜 그래?”

“……아니야. 그냥.”

나는 묘한 느낌을 뒤로하고 쭈그려 앉아 남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동아리 시간이니까, 빨리 용건만 말해 줄래?”

“머, 머리가! 아, 아파서…… 오, 오늘 모임은 힘들 것 같……아.”

“아프다고?”

확실히 안색도 좋지 않고, 입술도 새파란 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은 것도 아파서 다리에 힘이 풀린 건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애들한테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오늘은 쉬고, 괜찮아지면 내일 모임에는 참석해 줘.”

오늘은 약초를 채집하러 뒷산에 오르기로 했다. 마침 오늘은 아카데미에서 전체적으로 단축 수업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말인 내일은 오늘 채집한 약초를 토대로 미니 사전을 만들기로 했고.

같이 사전을 만드는 일은 몰라도, 아픈 사람을 억지로 산에 오르게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으응, 고마워…….”

그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왼쪽 발을 절뚝거리며 자리를 벗어난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수업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쳐 온 거야. 그것도 하필 다리를.

어.

잠시만.

분명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다리는 왜 절어?

나는 이를 까득 갈았다.

저 자식, 나일론 환자였구나……!

한 사람을 몇 시간 만에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기적.

아무리 생각해도 조별 과제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회의 악이었다.

* * *

약초를 채집할 도구를 가지러 기숙사에 들렀다. 먼저 기숙사에 와있던 제인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리엔 왔어?”

“응. 근데 조별 과제 때문에 금방 다시 나가 봐야 해.”

“오, 저런.”

제인의 안타까운 얼굴을 뒤로하고 약속된 시간에 늦을까 급히 채집 도구를 찾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나를 보며 제인이 불쑥 무언가를 건넨다.

“오늘도 편지가 두 개나 왔더라.”

나는 그녀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위에 있는 편지는 우아한 새가 그려진 문양으로 밀랍이 찍혀 있었다.

이모에게서 온 편지였다.

굳이 가문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찍어 보낸 것은, 아카데미에 가문의 문양이 들어간 인장을 보내면 반송 처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편지는 보지 않아도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 뻔했다.

편지에서 벌써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라벤더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편지를 늘 그랬듯 서랍 속에 넣었다. 서랍 속에는 열어 보지도 않은 편지 봉투가 가득했다.

무심히 서랍을 닫은 후, 새 모양 밀랍이 찍힌 편지는 책상 위에 두었다.

조별 과제를 끝내고 돌아와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답장도 써야 하니까.

채집 도구를 챙기고 기숙사를 나가려 하자, 제인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며 물어왔다.

“왜 하나는 항상 열어 보지 않는 거야, 리엔?”

나는 등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돌리며 작게 읊조렸다.

“……읽을 가치가 없어서.”

* * *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조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에서 말이다.

어떻게 단 한 명도 제 시각에 오지를 않는지.

딱 10분만 더 기다려 보고 아무도 오지 않으면 혼자 산에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을 즈음,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실루엣이 시야에 담겼다.

사다리 타기를 주도했던 한스였다.

“조장님!”

지각한 주제에 이름도 아니고 저런 끔찍한 호칭으로 부르다니.

그는 사람 화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체계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는 한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정강이가 좋아? 아니면 명치?”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둘 중 하나를 고르면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보다 다른 조원들은 다 어디 있어, 조장?”

그는 음산한 내 얼굴을 보고는 눈치 좋게도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쯧.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싫다니까.

“여자애는 너처럼 지각인 것 같고, 한 명은 치질이 도져서 치료 중이래.”

“치, 치질……?”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하……. 꼭 완치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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