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한스는 떨떠름한 어조로 그의 완치를 어색하게 응원했다.
잠시 후, 그가 볼을 긁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어떡하지, 조장? 나도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이번 조별 과제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은데…….”
“뭐?”
“할아버지의 전 애인 분이 돌아가셨대. 아무래도 지금 당장 조문을 가 봐야 할 것 같아. 정말 미안!”
그는 말을 빠르게 쏟아 내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잡을 새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잠깐 뒤를 돌아보며 하는 말.
“아! 나는 과제에서 이름 빼 줘! 같이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사라진 어처구니에, 오랫동안 멍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야. 할아버지의 전 애인이면 너랑은 그냥 남이잖아.
* * *
십 분을 더 기다려 봤지만, 결국 말하는 감자는 오지 않았다.
조별 과제가 험난할 거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세 명 모두가 개수작을 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 미래를 암시하는 건지, 아니면 내 기분을 대변하는 건지 우중충하다.
그래. 인생은 혼자 사는 거지.
차라리 홀로 과제를 해치우고, 제출할 때 그들의 이름을 빼는 게 나을 듯싶었다.
나는 반쯤 허탈해진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탓에 길이 잘 닦여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약초를 캐기 위해 이렇게 산을 오르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옛날에는 엄마와 같이 약초를 캐러 자주 나오곤 했었는데.
이모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이후에는 이모가 위험하다며 뜯어말리시는 바람에 돈 주고 사 온 약초밖에 만질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약초들은 대부분 구해다 주셨으니…….
이모도, 이모부도 참 좋은 분이셨다.
나를 다소 많이 싸고도는 경향은 있었지만, 군식구인 나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셨으니까.
만약 내가 부모님을 좀 더 일찍 여의었으면 분명 그분들을 엄마, 아빠라고 불렀을 것이다.
실제로 나를 호적에 넣으려고 하셨기도 하고.
결국에는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르니 어느새 산의 중턱이었다. 중턱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큰 경고문이 붙은 푯말 덕분이었다.
꽂힌 푯말에는 이곳부터 마물 출몰 지역이니 출입 시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
푯말을 시작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철조망이 쭉 이어져 있다.
나는 푯말에 대충 시선을 주다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애초에 쓸 만한 약초들은 대부분 마나를 양분으로 자란다.
마물 서식지는 공기 중 마나의 밀도가 높아 좋은 약초들이 많이 자랐다.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마물 서식지를 필히 들어가야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과제임에도 조지 교수님이 굳이 조별 과제로 낸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풀숲 어딘가에서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말감이야?”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작은 산짐승인 듯했다.
혹시 말하는 감자가 뒤늦게 왔나 해서 기대했는데.
그나저나 말감이라니 아주 입에 착 달라붙는 별명이었다.
앞으로 넌 말감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심한 후 나는 본격적으로 약초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집중력이 필요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록색뿐인 이곳에서 약초를 구분해 내려면 말이다.
“하나라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사실 내가 이렇게 넓은 곳에서 괜찮은 약초 하나 못 찾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은 약초를 더욱더 수월하게 찾기 위해서였다.
이름하여 파멸의 주둥아리 비법.
아니나 다를까 말을 내뱉자마자 눈에 탐사 마법이라도 건 듯 내가 예전부터 찾던 약초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건 트란토과 식물 다오 트란토(Dao Tranto)잖아!”
나는 눈이 돌아가 흥분한 얼굴로 다오 트란토를 캐기 시작했다.
이 약초는 희귀하기만 할 뿐, 딱히 큰 쓰임새는 없어 길거리 잡초 취급을 받기도 하는 약초였다.
아무도 사려고도, 팔려고도 하지 않는 약초.
그러나 나는 내가 개발한 조제 방법으로 다오 트란토를 굉장한 것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바로 땀 억제제.
참고로 내가 땀 억제제를 쓰는 부위는 ‘그곳’이었다.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푹푹 찌는 여름날 가장 신경 쓰이는 부위가.
살과 살이 맞닿아 유독 많은 땀을 배출해 내는 곳.
회색 옷을 입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곳만 진한 색으로 보여 모두의 시선을 강탈할 수 있는 곳.
그렇다.
오금이다. 설마 ‘겨’로 시작하는 다른 부위를 떠올린 사람은 없겠지.
나는 약초가 다치지 않게 살살 잘 캐낸 후 그것을 잡고 한참이나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요 사랑스러운 것을 만나려고 이곳에 올라왔구나.
그렇지 않아도 이게 없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른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어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었는데.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급기야 약초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내 뒤쪽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해, 리엔!”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콰직 하고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검붉은 피가 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서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조각나 버려 원래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마물의 사체. 그리고 놀란 듯 눈을 키운 카르시온.
눈 깜짝할 사이 내 앞으로 이동한 카르시온은 불현듯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코끝으로 그의 체향이 훅 끼쳐 들어온다.
오염되지 않은 물과 같은 정순한.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빠져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농밀한 향기였다.
이보다도 그와 어울리는 향이 있을까.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리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의 체향을 맡고 있다가,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얘가 미쳤나.
나는 나를 세게 안고 있는 카르시온을 떼어 냈다.
밀어내는 손길에 힘없이 떨어져 나간 카르시온은, 내 얼굴을 보더니 작게 당황했다.
“리엔 얼굴에…….”
뺨에 튄 핏방울을 말하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핏방울을 내 손등으로 닦아 냈다.
카르시온이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겠다는 듯 교복 소매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새하얀 교복 셔츠로 피를 닦으려 하다니. 그것도 잘 지워지지도 않는 마물의 피를.
대체 얼마나 미련한 거야?
“카온, 네가 왜 여기 있어?”
“리엔이야말로 여긴 왜 혼자 들어왔어.”
그는 드물게 내게 화난 얼굴을 했다.
황당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그가 나를 걱정했다는 것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누그러진다.
나는 그의 좁혀진 미간을 전에 그랬듯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꾹꾹 눌러 폈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전처럼 금방 펴지지 않았다.
“카온. 왜 계속 그런 표정이야. 내가 아무런 대책 없이 들어왔을 것 같아?”
카르시온이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은 많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눈치였다.
“마물 기피제를 발랐어. 그것도 기존에 있던 거를 개량해서 만든 거라 기존의 것보다 성능도 배는 뛰어나.”
나는 조각난 마물의 사체를 턱짓했다.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쟤는 날 공격하지 않았을 거야.”
내 턱짓에, 고개를 돌려 마물의 사체를 목격한 카르시온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가 갑자기 사체에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조각난 사체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겨우 마법을 멈췄다. 마물의 사체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저런 끔찍한 걸 네 눈앞에 보이다니. 미안해, 리엔.”
야. 저게 더 끔찍해.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카르시온의 뿌듯한 얼굴을 보고 말을 급선회했다.
“마물 사체 정도는 개의치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리엔은 좋은 것만 봐야 하는걸.”
나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를 들어?”
“……내 얼굴?”
하?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당돌함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카르시온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뒤로 간 만큼 더 가까이 다가갔다.
“흐응, 정말? 그럼 내가 종일 이렇게 널 보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너, 너무 좋은……아, 아니, 그보다!”
카르시온이 달아오른 얼굴로 먼 곳을 보며 소리쳤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반응.
“겨우 마물 기피제 하나만 믿고 들어온 거야? 다른 조원들이 없었으면 당연히 나를 불렀어야지, 리엔.”
“아까도 말했지만, 그냥 기피제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개량한 마물 기피제를 바르고 와서 괜찮아. 까딱하면 마물에게 던질 독침도 가져왔고.”
“하지만……!”
“내가 만든 마물 기피제가 못 미덥다는 거야?”
카르시온이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늘로 향해 있던 고개를 다급히 내려 나를 바라본다.
“그런 거 아니야!”
역시 그는 놀리는 맛이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더 일그러지기 전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 장난 한번 쳐 본 거야. 그보다 이제 말해 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그는 우물쭈물하며 긴 속눈썹을 아래로 깔았다.
“……실은 네가 오늘 조별 과제가 있다고 하길래 같은 조원 중 남자가 있나만 확인해 보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 한 명은 금방 왔다가 가 버리고, 다른 사람은 오지도 않고. 결국에는 리엔 혼자 산에 오르길래 걱정돼서…….”
카르시온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졌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분홍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으니까 표정 풀어, 카온.”
네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내가 다 미안해진다.
* * *
카르시온과 함께하게 된 나는 그가 옆에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약초를 채집하기 바빴다.
학교 뒷산이라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귀한 약초들이 많아서 가만히 앉아 쉴 틈이 없었다.
과제 해결은 물론이고 내 약초 컬렉션도 한층 늘어날 듯했다.
심지어는 다오 트란토 군락을 발견하는 바람에 기쁨의 비명을 지를 뻔하기도 했다.
다음에 다시 와서 모두 채집해 갈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 행복하다.
얼굴에 자동으로 피어나는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정신없이 약초를 캤다.
한참을 그러던 도중, 내 얼굴 위로 무언가가 똑 하고 떨어졌다.